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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구순의 느린걸음] 불가촉(不可觸) 정책 '가상자산'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1.05.25 15:48

수정 2021.05.25 15:48

[파이낸셜뉴스] "언제 터질지도 모르는 폭탄 정책을 어느 부처가 나서겠습니까?" "가상자산은 비정상이 너무 커져서 지금은 마지막 폭탄돌리기 수준이예요. 폭탄 떠안지 않으려고 가상자산 쪽으로는 눈길도 안 돌려요." "특정 부처 추천하기도 눈치 보여요. 골치아픈 일 떠넘긴다고 눈총 받을게 겁나서요."

어느 부처가 가상자산 정책을 담당하면 좋을지 묻는 질문에 공무원들의 답변이 평소 알던 공무원 자세와 사뭇 다르다. 그동안 봤던 공무원들은 '규제는 곧 힘'이라며 새로운 규제거리가 눈에 띄면 서로 갖겠다고 다투는게 첫 자세였다. '부처간 밥그릇 싸움'이라는 제목을 단 기사가 쏟아지는 이유다.

[이구순의 느린걸음] 불가촉(不可觸) 정책 '가상자산'

그런데 가상자산 정책은 유독 '불가촉(不可觸)'이다. 불가촉은 인도의 계급제도 카스트의 최하층 천민이다.
다른 계급들은 길 가다 불가촉전민과 어깨라도 부딪치면 나쁜 기운이 옮을 수 있으니 닿지 않도록 멀찌감치 떨어져 걷는다. 가상자산이 딱 이런 꼴이다.

사실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이미 3년 전부터 그랬다. 2017년 가상자산 불장에 어느 부처도 낯선 가상자산 투자시장을 관리하고 제도를 만들겠다고 안 나섰다. 결국 국무조정실이 총괄이라는 이름을 갖고, 법무부가 총대를 맸다. 박상기 전 법무부장관의 가상자산 거래소 폐쇄설이 부처간 책임 떠넘기기의 결과인 셈이다.

그러고도 정부는 3년이나 더 가상자산을 불가촉의 영역으로 팽개쳐 뒀다. 가상자산의 정의조차 연구하지 않았다. 이름도 안 지었다. 그래서 암호화폐, 가상자산, 가상화폐, 디지털자산 같은, 이해하기 쉽지도 않고 개념도 모호한 이름들이 혼재돼 쓰인다. 그나마 국제자금세탁방지기구(FATF)가 자금세탁을 막을 목적으로 만든 지침에서 '화폐는 아니면서 가상에 존재하는 자산'이라고 지은 가상자산이라는 이름을 법률에 그대로 갖다 그대로 썼다.

우리 정부가 가상자산을 불가촉 영역에 팽개쳐 둔 동안 해외에서는 달랐다. 중국은 중앙은행 발행 디지털화폐(CBDC)를 만들었다. 정부가 직접 블록체인 서비스 네트워크(BSN)라는 블록체인을 개발해 전세계 블록체인 프로젝트를 통합하고 있다. 그러더니 민간 가상자산은 거래하지도 채굴하지도 말라고 단속령을 내렸다. 2014년부터 공부하고 준비한 뒤 시장정리 수순에 돌입한 것이다.

미국은 연방준비제도와 증권거래위원회, 상품선물위원회가 가상자산의 정의, 종류별 규제 방안을 담은 보고서 작성에 착수했다.

이제 우리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국경 개념이 없는 가상자산의 특성을 감안하면 외국의 촘촘한 규제를 피해 범죄자들이 한국으로 몰려드는 것은 일도 아니다. 사실 최근 가상자산 불장에 이미 기미가 보였다. 범죄 수법도 복잡해 웬만한 법률로는 처벌하기도 어렵다.
정부가 가상자산을 불가촉으로 던져놓은 탓에 국민과 금융시스템이 피해 당사자가 될 수 있지만 정부는 잡을 기술도, 단죄할 법도 없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다. 지금이라도 정부가 발등에 떨어진 불을 직시했으면 한다.
발등에 떨어진 불을 모른체하면 결국 국민들 발등이 뜨겁다.

cafe9@fnnews.com 이구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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