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1년 6월 18일, 독일 왕실의 극장이었던 베를린의 콘체르트 하우스에서는 낭만주의 음악가 칼 마리아 폰 베버의 오페라 '마탄의 사수'가 초연됐다. 그 해 2월에 문을 열었던 신생극장은 어느덧 올해 200살을 맞이했고 이를 기념하는 공연으로 '마탄의 사수'가 200년 전과 같은 날이었던 지난 18일 현지에서 다시 올려졌다. 크리스토퍼 에셴바흐의 지휘로 성황리에 끝난 이날 공연에서 주목할만한 것은 바로 크레딧. 카를루스 파드리사 연출과 드라마투르그 다음에 한국인 무대의상 디자이너 김환(41)의 이름이 올랐다. 한국예술종합학교 무대미술과 졸업을 앞두고 있던 김환은 2010년 도독해 베를린예술대학교에 입학해 무대의상 학사와 박사를 마치고 유럽의 극장에서 인정받는 신진 디자이너로 이름이 널리 알리고 있다.
지난 18일 독일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에서 열린 오페라 '마탄의 사수' 초연 및 공연장 개관 200주년 기념 공연의 한 장면 /사진=프레스토아트
베를린에 거주중인 김환은 28일 서면 인터뷰에서 "한국의 성악가며 무용수를 해외의 유명 극장 무대 정면에서 보는 것이 낯설지 않은 시대가 된지 오래지만 백스테이지의 모습은 많이 다르다"며 "크레이티브팀, 스태프들 중 동양인이나 흑인을 보는 것은 힘들고 없는 경우가 더 많다.
무대예술이 개인예술이 아닌 공동예술이기 때문인데 이런 집단 안에 전혀 다른 언어와 문화권의 외국인이 새로 들어간다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또 어느 정도 알려진 극장에서 자기 이름을 건 작품을 선보인다는 것은 생각보다 많이 어려운데 저의 경우 스승인 플로란스 폰 게아칸 교수의 지원이 컸다"고 말했다.
지난 18일 오페라 '마탄의 사수' 초연 및 독일 베를린 콘체르트하우스 개관 200주년 기념 공연 직후 스태프들이 극장 앞에서 서로 꽃을 주고 받으며 축하 인사를 나누고 있다. 김환 디자이너는 카를루스 파드리사 연출의 오른편에 서 있다. /사진=프레스토아트
김환에게 기회가 찾아온 것은 2015년. 베를린의 유명 공연장인 라디알시스템에서 베를린국립발레학교가 스트라빈스키의 발레 '불새'를 무대에 올리게 됐고 무대의상 제의가 게아칸 교수에게 왔다. 하지만 게아칸은 김환에게 의상을 디자인 하도록 역으로 제안했다. 소위 '듣보잡'이었던 김환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는 성공적으로 작업을 마무리 했고 이후 잘즈부르크페스티벌의 무대의상 디자이너로 참여하면서 계속 커리어를 이어갔다.
김환의 2015년 독일 데뷔무대. 베를린의 유명 공연장 '라디알시스템'에서 열린 베를린국립발레학교 제작 스트라빈스키의 발레 '불새' /사진=프레스토아트
그가 의상 디자이너로서 주로 활동하는 오페라는 음악과 문학, 연극, 미술, 무용 등이 모든 것이 하나로 어우러지는 종합예술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은 음악과 극적인 요소만 신경쓸 때가 많다. 하지만 예술에 있어 중요하지 않은 요소는 없다. 무대 의상의 경우 현대 회화의 거장인 마르크 샤갈을 비롯해 샤넬과 베르사체, 발렌티노, 발망 등 명품 브랜드의 전설적인 디자이너들이 참여하는 경우가 왕왕있는데 유럽에서 무대의상 디자인을 바라보는 시선과 위상은 높다.
김환은 "무대의상은 극중 인물이 무대라는 공간 안에서 극중 인물로 존재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고, 관객들로 하여금 그 인물을 믿게 만들어 주는 작업"이라며 "무대의상은 단순히 배우를 장식하고 아름답게 꾸미는 차원을 넘어서는 작업이다. 보편적인 인간을 다루는 작업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웃길지 모르겠지만 저는 옷 자체에는 관심이 없다. 그랬다면 패션을 했을 것"이라며 "제 관심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람'이다. 무대 안 인물을 시각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하나의 표현수단이 무대의상인셈인 것"이라고 말했다.
김환이 무대의상 디자인으로 참여한 대만국립극장의 2017년작 푸치니 오페라 '일 트리티코' /사진=프레스토아트
김환은 "무대의상 디자이너에게는 인간과 공간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와 상상력이 가장 중요하다"며 "무대의상을 만들기 위해 기본적으로 작품의 텍스트를 외울 정도로 분석하고 옆에서 툭 치면 노래할 수 있을 정도로 오페라 음악을 반복해 듣는다. 무용의 경우에도 안무를 전부 머리에 넣고 작업하는데 독일에서 작품을 올리는 경우 평균 1년 정도의 시간을 들여 의상을 제작한다"고 말했다.
김환은 "극장 역사가 길지 않고 극장 시스템이 마련되지 않은 곳에선 유독 무대 중앙의 성악가들에게만 집중하는 경우가 잦다. 하지만 공연은 성악가들로만 올릴 수 없다"며 "적게는 수십명 많게는 수 백명의 크루들이 함께 해야만 관객을 만날 수 있는 공연인데 무대에서 빛을 받지 않는 분들의 수고에 대한 존중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환은 "조만간 잠시 한국에 왔다 독일로 돌아가 연출가 카를루스 파드리사와 다음 작업을 준비할 예정"이라며 "제 심장을 갖다 받친 좋은 작품을 꾸준히 만들어 내는 것이 제 꿈이고 향후 독일에서 활동하고자 하는 다음 세대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먼저 길을 가고 있는 제 역할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jhpark@fnnews.com 박지현 기자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