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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줌인] "조선 역사 1천년 이래 제1대 사건"...'묘청의 난'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1.07.03 00:10

수정 2022.02.09 15:46

<정변의 역사 ⑧>
자주와 사대의 격돌 
서경천도운동 및 묘청의 난 전말 
고려 삼경 중 하나인 서경과 그 일대를 그린 조감도. 고려대학교 박물관
고려 삼경 중 하나인 서경과 그 일대를 그린 조감도. 고려대학교 박물관
[파이낸셜뉴스] "서경 전투에서 양편 병력이 서로 수만 명에 지나지 않고 전투의 기간이 2년도 안 되지만, 그 결과가 조선 사회에 끼친 영향은 고구려의 후예요 북방의 대국인 발해 멸망보다도 몇 곱절이나 더한 사건이니 대개 고려에서 이조에 이르는 1천 년 사이에 이 사건보다 더 중요한 사건이 없을 것이다" -신채호 '조선사연구초' 中

1127년, 고려는 문벌귀족 등 지배층의 갈등과 왕권 약화, 금(金)나라의 압박 등 대내외적으로 극심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를 타개하고자 정치 개혁을 모색하고 있던 인종에게 한 승려가 혜성처럼 나타났다. 바로 '정심'(淨心)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져 있던 서경 승려 '묘청'(妙淸)이다.

묘청을 중심으로 한 '서경파'는 '지덕쇠왕설'(地德衰旺說)을 내세우며 지금의 평양인 서경으로의 천도를 강하게 주장했다. 아울러 왕을 '황제'라 칭하고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함과 동시에 금나라를 정벌하자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쳤다.
그러나 김부식 등 문신 귀족들이 중심이 된 개경파에게 밀려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단재 신채호 선생 등은 이 같은 '서경천도운동'(西京遷都運動) 및 '묘청의 난'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즉 자주적이고 진취적인 역사의 흐름을 대변하는 거대한 움직임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개경파가 중심이 된 '반동'(反動)과 극명하게 대비시켰다. 신채호는 "역대의 사가들이 다만 왕의 군대가 반란의 무리를 친 싸움 정도로 알았을 뿐이었으나 이는 근시안적인 관찰이다. 그 실상은 낭불양가 대 유가의 싸움이며 국풍파 대 한학파의 싸움이며 독립당 대 사대당의 싸움이며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싸움이니, 묘청은 곧 전자의 대표요, 김부식은 곧 후자의 대표였던 것이다"라고 전했다.

다만, 신채호 선생은 묘청이 광망(狂妄)하여 준비가 너무 안 된 상태로 성급하게 난을 일으켜 주변 사람들을 사지에 빠뜨리고 대의를 그르쳤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중대한 역사의 분기점(分岐點)에서 묘청 등 서경파가 패배함으로써 우리나라 역사는 다시금 보수 사대주의(事大主義) 고착화라는 퇴행의 길로 나아가게 됐다고 결론지었다. 신채호가 조선사 1천 년 이래 제1대 사건이라고 규정한 '서경천도운동' 및 '묘청의 난' 전말을 되돌아봤다.

■개혁 모색과 묘청의 등장
1126년 왕실 외척이었던 이자겸의 난 이후 고려 조정은 한동안 뒤숭숭한 분위기가 계속됐다. 반란은 진압됐지만 지배층 내부의 갈등은 상존하고 있었고, 왕권은 여전히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흔들리는 기색이 역력했다. 더욱이 대외적으로는 북방의 요나라와 북송이 멸망한 후 여진족의 금나라가 큰 세력을 형성해 압박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고려의 제17대 왕이었던 인종(仁宗)은 더 이상의 혼란상을 좌시하지 않고 난국을 수습하기 위해 이전과는 달리 과감한 개혁에 나서기로 마음 먹었다. 그러던 중 명망(名望) 있던 문신인 '정지상'이 인종에게 접근해 묘청이라는 한 승려를 추천했다. 정지상은 묘청을 '성인'으로 추켜세우며 그가 바로 정치 개혁의 적임자라고 평가했다. 서경 출신이었던 정지상은 인종에게 눈엣가시였던 척준경을 제거하는데 공을 세웠고, 시문(詩文)에 뛰어나 언관직을 담당할 만큼 역량을 인정받았던 인물이었다.

묘청에 대한 지지는 비단 정지상 뿐만 아니라 일부 관원들에게서도 나타났다. 정지상과 일부 관원들이 일개 한 승려에게 이처럼 경도(傾倒)된 것은 그가 음양(陰陽)의 대가이자 '서경 천도'라는 매력적인 주장을 강하게 전파하고 다녔기 때문이다.

믿을 만한 사람들이 추천하고 정치 개혁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갖고 있던 인종은 묘청에게 상당한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인종은 1127년 2월~7월에 서경에 머무르며 묘청 등을 만났고, 그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서경에 15개 조항으로 구성된 '유신령'(維新令)을 선포했다. 여기에는 민생 안정과 왕권 강화, 올바른 관료 정치의 확립 등이 담겼다. 이는 곧 있을 '서경천도운동'의 서막이었다.

■서경천도운동
유신령이 선포된 후 대세(大勢)가 자신들에게 넘어오고 있다고 직감한 묘청과 정지상, 백수한 등은 자신들이 오랫동안 염두에 뒀던 '서경 천도' 카드를 꺼내 들었다. 현재 수도인 개경은 지덕(地德)이 쇠퇴한 반면 서경은 이것이 왕성해 만약 서경으로 수도를 옮기게 되면 주변 36개국이 조공을 바치게 될 것이라고 전했다.

이 같은 주장은 태조 왕건 때부터 고려가 표방했던 '북진(北進) 정책'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신흥 세력이었던 서경파가 기득권이었던 개경파를 제치고 중앙 정치의 주도권을 잡으려는 의도도 내포돼 있었다.

서경 천도를 위해 묘청 등은 일단 서경의 임원역(林原驛) 지역에 신궁 건설을 주청했다. 개경파의 반대가 있었지만 이미 서경파의 주장에 적지 않게 매혹된 인종은 이를 허락했고, 이로써 1129년 2월에 서경에 대화궁(大花宮)이 세워졌다. 신궁 건설은 한 겨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빠르게 진행돼 불과 3개월 만에 완공됐다. 이후 1131년에는 임원궁성을 쌓는 한편 토착신을 숭배하는 팔성당(八聖堂)도 지어졌다.

■개경파와 서경파 갈등
서경 대화궁 건설은 서경파에게 강한 자신감을 심어줬다. 이들은 더 이상 거칠 것이 없이 한발 더 나아간 주장을 펼쳤다. 바로 '칭제건원'(稱帝建元)과 금나라 정벌이다. 칭제건원은 군주를 황제라 칭하고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자는 것이다. 서경파의 일원이었던 동경지례사(東京持禮使) 서장관(書狀官) 최봉심은 "장사 1000명만 주면 금나라에 들어가 그 왕을 사로잡아 바칠 수 있다"라고도 공언했다.

태조 왕건 때부터 고려는 명목상으로는 북진 정책을 표방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사대주의(事大主義)의 길로 나아가는 모습을 보였다. 인종 대에 이르러서도 실권자였던 이자겸은 금나라의 불합리한 요구를 거의 대부분 들어주며 자신의 권력을 보전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서경파의 금나라 정벌 주장은 매우 과감하고 파격적인 것이었다. 당초 인종도 이 주장에 내심 동조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삼국사기의 저자인 김부식 등을 중심으로 한 개경파가 더 이상 가만히 있지 않았다. 안정과 권력 유지에 치중했던 보수적인 개경파에게 금나라 정벌 주장은 분명 커다란 위협 요인으로 다가왔다.

개경파는 인종에게 금나라 정벌은 고려의 국력을 감안할 때 현실적으로 힘들고, 묘청 등 서경파는 요망(妖妄)스러워 믿을 수 없다는 상소를 올렸다. 심지어 임완 등 일부 개경파 사람들은 묘청 등이 왕을 기만(欺瞞)하고 있으니 척살해야 한다고도 주장했다.

개경파의 극렬한 반대로 상황이 이전처럼 순조롭게 돌아가지 않자 서경파는 마음이 급해졌다. 서경파는 왕을 잇따라 만나 서경 천도의 필요성을 주장했고, 급기야 각종 술책(術策)을 부리다가 탄로가 나기도 했다. 어느 날 인종이 서경으로 행차해 대동강에서 뱃놀이를 즐길 때 물 위로 기름이 떠올랐고, 이것이 햇살을 받아 오색찬란한 빛을 내었다. 이는 마치 무지개가 뜬 것처럼 보였다. 이상하게 여긴 인종이 묘청에게 빛이 나는 연유(緣由)를 묻자 묘청은 "임금의 은혜에 감은(感恩)해 신룡(神龍)이 토한 오색구름이며, 서경이 왕도가 될 상서로운 징조"라고 했다.

그러나 뱃놀이 후에 개경파 중 한 사람이 물 밑을 조사해 봤더니, 기름이 오색으로 물들인 떡 시루 밑에서 흐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묘청 등은 사전에 오색 떡을 만들고 여기에 기름을 부어 강으로 흘러내리게 했던 것이다. 이 같은 거짓된 행동은 결과적으로 서경파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는 요인이 됐다. 더욱이 대화궁이 완공된 이듬해에는 서경 중흥사 탑에 화재가 발생했고, 인종의 서경 행차 시 폭우 및 돌풍으로 왕과 시종들이 큰 피해를 입는 일도 있었다. 이에 따라 서경파의 '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에 근본적인 의구심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났다.

연이은 악재로 인종의 마음도 묘청 등 서경파에게서 조금씩 멀어졌다. 이후에도 서경파는 지속적으로 서경 천도를 주장했지만, 인종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 사이 개경파의 입김은 더욱 거세지고 있었다. 이 즈음 인종의 심리 상태는 매우 복잡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전에 비해 서경파와 거리를 두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서경파의 주장을 완전히 물리치지도 않았고 북진 정책의 미련을 버리지도 못했다.

하지만, 머지않아 인종은 서경 천도를 완전히 단념하게 된다. 1134년 2월, 서경파의 거듭된 요청에 인종은 서경의 대화궁으로 행차했는데, 이상한 이변들이 발생했다. 인종과 신하들이 대동강에서 뱃놀이를 할 때 별안간 폭풍이 휘몰아쳐 술상이 엎어지고 배의 장막이 찢겼다. 이에 놀란 인종이 개경으로 돌아간 후에도 서경에는 때 아닌 눈과 서리가 내려 인명 및 농작물의 피해가 발생했고, 여름에는 가뭄의 피해도 극심했다. 결국, 이 같은 일을 겪은 후 개경파는 향후 인종의 서경 행차를 반대했고, 인종도 서경 천도 및 행차를 완전히 포기하기에 이른다.

■묘청의 난
서경 천도의 꿈이 사실상 수포로 돌아가자 서경파는 1135년 1월에 서경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서경파가 언제부터 반란을 모의했는지를 나타내는 기록은 구체적으로 존재하지 않지만, 일사분란하게 반란을 일으키고 단기간에 주변 지역을 장악한 것을 보면 사전에 충분히 반란을 준비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묘청의 난은 단순한 반란이 아니었다. 묘청은 국호를 '대위(大爲)', 연호를 '천개(天開)'라 명명했고, 자신들의 군사를 '천견충의군'(天遣忠義軍)이라고 부르며 자주적인 독립 국가 건설을 선포하기까지 했다.

아울러 묘청의 곁에는 분사시랑 조광, 병부상서 유참, 사재소경 조창언, 안중영 등이 있었다. 이들은 왕명을 빙자(憑藉)해 서경 부유수 최재, 감군사 이총림, 어사 안지종 등을 체포, 구금했고, 가짜 승선 김신을 파견해 서북면 병마사 이중과 그의 막료들, 각 성의 지휘관을 체포해 서경의 소금창고에 가두었다. 뒤이어 여러 성의 군사들을 모집했고, 약 3개 경로를 통해 개경으로 쳐들어가려는 계획도 세웠다.

이 같은 반란 소식을 접한 인종은 당장 무력으로 진압하는 것이 아니라 서경으로 사람을 보내 설득하고자 했다. 그러나 서경파는 요지부동(搖之不動)이었다. 즉각 왕이 서경으로 행차하고 천도를 단행할 것을 요구했다. 개경파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인종에게 서경파를 완전히 토벌해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다. 결국 인종은 이를 받아들였고, 김부식을 중심으로 한 관군이 서경으로 진격했다.

반란군은 초반에 자비령(慈悲嶺)을 포함한 서북 일대를 신속하게 장악하며 기세를 올렸다. 하지만 관군이 안북부(安北府)로 나아가자 서경파의 영향력 하에 있던 여러 성이 관군에 동조하기 시작했다. 김부식은 서경파의 핵심인 조광에게 항복할 것을 권고했고, 전세의 불리함을 느낀 조광은 묘청 등을 척살한 뒤 개경에 사람을 보내 항복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금세 생각이 바뀌어 다시 관군과 싸울 것을 결의했고, 인종이 재차 회유하러 보낸 사람들을 죽이기까지 했다.

이에 대응해 김부식의 관군은 대동강 주변에 진을 친 후 반란군을 포위, 압박했다. 반란군도 나름대로 결사항전 할 태세를 갖추고 약 1년 동안 버텼지만, 관군의 포위망에 갇혀 식량 부족 등에 시달리다 결국 완전히 진압되기에 이르렀다. 조광 등을 포함한 반란군 핵심들은 모두 자결(自決)을 선택했다.

■과거로의 회귀
묘청의 난이 진압된 후 서경 출신 세력은 완전히 몰락했다. 반대로 개경의 문신 귀족들은 기득권을 더욱 공고히 다졌다. 문신 귀족들은 조정의 요직과 경제력 등을 독점했고, 무신들을 홀대하고 심지어 왕까지 가볍게 보는 모습을 나타냈다. 이는 추후에 '무신정변'(武臣政變)을 촉발시키는 원인이 된다.

아울러 자주성이 퇴색하고 보수 사대주의가 고착화 됐다.
특히 개경 문신 귀족들의 거두(巨頭)였던 김부식은 사대주의에 기반했다고 평가를 받는 '삼국사기'(三國史記)를 출간해 이 같은 사회 분위기 고착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신채호는 "김부식이 승리해 조선 역사가 사대적 보수적 속박적 사상, 즉 유교 사상에 정복되고 말았거니와 만일 이와 반대로 묘청이 승리했다면 독립적 진취적 방면으로 나아갔을 것"이라고 개탄했다.
이후 고려는 말기인 공민왕(恭愍王, 제31대 왕) 때까지 제대로 된 자주성을 좀처럼 보여주지 못했다.

kschoi@fnnews.com 최경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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