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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줌인] 병자호란 비극의 단초 '인조반정'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1.07.17 00:05

수정 2021.07.17 23:01

<정변의 역사 ⑩>
실리를 버리고 명분만을 쫓은 사대의 극치
서인 일파의 인조반정 전말 
삼전도의 치욕.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 )
삼전도의 치욕.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 )
[파이낸셜뉴스] ...(중략)... 김상헌(주전파) "명길이 칸을 황제 폐하라 칭하고 전하를 칸의 신하라 칭했으니, 전하께서는 명길의 문서를 두 손에 받쳐들고 칸 앞에 엎드리시겠습니까. 무릎을 꿇고 술을 따르라고 하면 술을 따라 올리시겠습니까."
최명길(주화파) "전하, 강한 자가 약한 자에게 못할 짓이 없는 것과 같이. 약한 자 또한 살아남기 위해 못할 짓이 없는 것이옵니다."
김상헌 "명길이 말하는 삶은 곧 죽음이옵니다. 신은 차라리 가벼운 죽음으로 죽음보다 더 무거운 삶을 지탱하려 하옵니다."
최명길 "죽음은 가볍지 않사옵니다 전하. 상헌이 말하는 죽음으로써 삶을 지탱하지는 못할 것이옵니다."
김상헌 "명길은 삶과 죽음을 구분하지 못하고, 삶을 죽음과 뒤섞어 삶을 욕되게 하는 자이옵니다.
"
최명길 "죽음은 견딜 수 없고, 치욕은 견딜 수 있사옵니다. 전하, 만백성과 함께 죽음을 각오하지 마시옵소서."
김상헌 "한 나라의 군왕이 오랑캐에 맞서 떳떳한 죽음을 맞을지언정 어찌 만백성이 보는 앞에서 치욕스런 삶을 구걸하려 하시옵니까. 신은 차마 그런 임금은 받들 수도 지켜볼 수도 없으니, 지금 이 자리에서 신의 목을 베소서."
최명길 "무엇이 임금이옵니까. 오랑캐의 발밑을 기어서라도 제 나라 백성이 살아서 걸어나갈 길을 열어줄 수 있는 자만이, 비로소 신하와 백성이 마음으로 따를 수 있는 임금이옵니다. 지금 신의 목을 먼저 베시고, 부디 전하께선 이 치욕을... 견뎌주소서." -영화 '남한산성' 中

1636년 병자년에 발발한 '병자호란'(丙子胡亂)은 우리나라 역사에서 가장 치욕적인 사건 중의 하나로 꼽힌다. 그동안 그저 변방의 오랑캐로 여겨졌던 여진족이 세운 후금(後金), 청(淸)나라에게 군사적으로 철저히 공략당한 것은 물론, 임금(인조)이 직접 삼전도(三田渡)에 나와 청 태종인 '홍타이지'(皇太極)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하며 임금(청나라)과 신하(조선)의 관계인 '군신'(君臣) 맹약을 체결했다. 조선의 임금과 대신들은 치욕에 몸서리를 쳤고, 백성들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이 같은 병자호란 비극의 단초는 1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623년, 서인(西人) 일파가 무력을 동원해 정변을 일으켜 당시 임금이었던 광해군(光海君)을 쫓아내고, 그의 조카인 능양군(綾陽君) 종(倧)을 왕으로 옹립한 '인조반정'(仁祖反正)이 발생했다. 서인들이 반정의 이유로 제시한 것은 바로 광해군의 '중립외교'(中立外交)와 어머니 인목대비(仁穆大妃)를 폐위하고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인 '폐모살제'(廢母殺弟)였다.

특히 중립외교와 관련, 광해군은 당시 요동치는 국제정세에 대해 깊은 통찰력을 갖고 있었고, 이전과는 다른 파격적인 외교 정책을 선보였다. 그동안 부모의 나라로 여겼던 명(明)나라가 기울고 새롭게 후금이 부상하는 만큼, 그 두 나라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며 실리(實利)를 챙기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는 유교적 세계관에 입각한 '대의명분'(大義名分)에 경도(傾倒)돼 있었던 서인들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냉정한 현실 인식을 기반으로 한 실리 추구를 저버리고 '친명배금'(親明排金, 명과 친하고 금을 배척한다)이라는 알량한 명분만을 내세우며 단행한 '인조반정'은 당시 조선에 뿌리 깊게 박혀있었던 '사대주의'(事大主義)의 극치를 보여주는 사건이었고, 이로 말미암아 추후 비극적인 상황이 초래되며 나라의 운명은 큰 위기에 빠져들고 말았다.

■전후 복구와 중립외교
1608년에 즉위한 광해군 앞에 놓인 것은 도탄(塗炭)에 빠진 나라와 백성들이었다. 7년 가까이 계속된 임진왜란(壬辰倭亂)은 전국을 파괴했고, 조선은 쉽사리 회복되지 못할 것처럼 보였다. 광해군은 아버지 선조(宣祖)와 함께 임진왜란을 몸소 겪으면서 전쟁으로 인한 참사를 뼈저리게 목격했고, 추후 자신이 나라와 백성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 지를 깊이 새겼다. 광해군은 우선 임진왜란으로 파괴된 사고(史庫)를 정비했고, 군적 정비를 위한 호패법(號牌法)을 시행했다. 또한 토지의 실제 경작 상황을 파악해 탈세를 방지하고 국가 재원을 확보하기 위한 양전(量田)도 시행했다.

그리고 현재까지도 광해군의 주된 업적으로 평가를 받는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했다. 대동법은 백성들이 부담하는 공물을 실물 대신 미곡으로 통일해 납부하도록 한 근대적 개념의 세제다. 기존 공납은 지역 별로 배정된 품목을 직접 바쳤기 때문에 백성들의 부담이 상당했다. 더욱이 해당 지역에서 생산되지 않는 특산품이 공물로 배정되는 '방납'(防納)의 폐단도 있었다. 이를 완화하기 위해 임진왜란 때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이 시행되기도 했는데, 이 대공수미법을 보완, 확대한 것이 바로 대동법이었다. 대동법을 통해 백성들의 부담과 방납의 폐단이 완화됐고, 시전(市廛)과 화폐경제도 발달했다.

이처럼 내정 측면에서 큰 치적(治績)을 일군 광해군은 시야를 넓혀 국제정세를 살폈다. 당시 국제정세는 요동치고 있었다. 기존 중원(中原)의 지배자였던 명나라가 쇠퇴하고 신흥 강자로 누르하치(奴爾哈齊)의 후금이 부상하고 있었다. 명분과 의리를 중시하는 유교 국가 조선에서는 명나라의 편을 드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광해군의 생각은 달랐다.

명나라와 후금(청나라) 간 전쟁의 결과가 불투명하기 때문에, 어느 한 쪽의 편을 일방적으로 들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결론을 내렸다. 유연하게 중립을 취하며 조선의 실리를 추구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명나라가 후금을 공격하기 위해 조선에 지원군을 요청했을 때 광해군은 여러 핑계를 대며 지원군 파견을 지체했다. 이후 명나라의 요구가 계속돼 마지못해 강홍립 장군을 통해 1만3000명의 지원군을 보냈지만, 광해군은 출병 전 강홍립에게 은밀하게 명나라의 명령을 따르지 말고 독자적으로 움직일 것을 지시했다. 강홍립은 이 명령에 기반해 후금과의 교전(交戰)을 회피하는 모습을 보였고, 적절한 시점에 후금과 휴전(休戰)을 맺고 귀국했다. 결과적으로 이 같은 광해군의 중립적인 실리 외교는 성공을 거뒀고, 조선은 명나라와 후금의 전쟁에 말려들지 않을 수 있었다.

■위기감 고조, 폐모살제
다만, 광해군은 태생적 한계 및 왕위 계승과 관련한 나름의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다. 우선 광해군은 장자(長子)가 아니었고, 정비 소생의 아들도 아닌 후궁 출신 공빈 김씨의 아들이었다. 원래는 장자였던 임해군이 왕위에 올라야 했지만, 난폭한 성격이 발목을 잡았다. 선조는 임진왜란으로 피난을 가면서 후사(後嗣)를 정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주변의 평판이 좋은 광해군을 최종적으로 선택했다. 이에 따라 광해군은 태생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차기 대권에 안착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선조와 중전인 인목대비 사이에서 뒤늦게 왕자가 출생했는데, 이가 바로 영창대군이다. 선조는 늦둥이였던 영창대군을 매우 총애했고, 대신들 앞에서도 이를 숨기지 않았다. 그러자 대신들 사이에서는 후사와 관련해 선조의 정확한 의중(意中)이 도대체 무엇인지에 대한 엇갈린 해석들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이런 가운데 선조의 병이 깊어졌고, 경황이 없어진 선조는 대신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광해군에게 선위(禪位)를 했다. 선위를 할 당시에도 영창대군을 염두에 뒀던 영의정 유영경 등이 선조의 선위 교서를 감췄다가 발각되는 일이 일어나기도 했다. 이 같은 우여곡절들을 가까스로 넘긴 후 광해군은 조선의 제15대 왕으로 즉위할 수 있었다.

문제는 광해군이 즉위한 후에도 태생적 한계 등에 기반해 왕권에 위협으로 느낄 만한 움직임이 있었고, 위기감이 고조된 광해군과 (당시 집권 여당격이었던) 대북파(大北派)는 이에 민감하게 반응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광해군 즉위 초 대북파와 서인 등이 권력을 분점(分占)하는 화목한 모습은 사라졌고, 비극적인 결말로 치닫는 무리수들이 나오게 됐다. 우선 친형인 임해군은 동생에게 왕위를 빼앗겼다는 생각에 분을 참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광해군의 국정을 비판하고 다녔다. 보다 못한 대북파는 형제여도 왕법에 위배되는 짓을 하면 형벌을 가해야 한다는 '할은론'(割恩論)을 내세우며 임해군을 엄히 다스릴 것을 요구했다. 여기에 명나라에서 광해군이 임해군 대신 왕위를 물려받은 경위를 묻기 위해 조사단을 파견한 것도 임해군 처단 목소리에 힘을 실었다. 결국, 임해군은 교동도에 유배를 갔다가 사약을 받고 죽음을 맞이했다.

광해군과 대북파의 위기감은 급기야 '폐모살제'마저 불러왔다. 이들에게 매 순간 가장 큰 걸림돌로 여겨졌던 것은 바로 잠재적 대권 주자인 영창대군의 존재였다. 그러던 중 1613년 서자 출신 일곱 명의 도적질을 심문하던 과정에서 서인 박순의 서자 박응서가 "김제남과 몰래 통해 영창대군을 임금으로 삼으려 했다"고 허위 자백하면서 이른바 '계축옥사'(癸丑獄事)가 일어났다. 이 사건의 결과로 대북파는 영창대군을 지지하던 소북파를 완전히 몰아냈고, 눈엣가시였던 영창대군도 서인으로 강등시킨 후 강화도에 위리안치(圍籬安置)했다가 이이첨의 사주로 불에 태워 죽였다.

더 나아가 대북파는 광해군에게 인목대비도 폐위(廢位)할 것을 주청했다. 당연하게도 영창대군의 친모인 인목대비가 광해군의 조치에 여과 없는 불만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인목대비는 광해군에게도 어머니였기 때문에 광해군은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러나 후환(後患)을 염려한 광해군은 결국 인목대비에게서 '대비'라는 존호(尊號)를 지우는 등 모든 특권과 대우를 박탈한 후 서궁에 유폐시켰다.

■인조반정
당시 폐모살제에 대한 여론은 대체로 좋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조선은 '효'(孝)를 중시하는 유교 국가였기 때문이다. 특히 유교적 세계관에 입각한 대의명분 등을 중시했던 서인들은 폐모살제 뿐만 아니라 광해군의 중립외교도 크게 문제삼고 있었다. 이에 따라 서인들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1620년부터 반정을 모의(謀議)하게 된다. 추후 인조가 되는 능양군은 반정 모의 초기 단계부터 참여한 것으로 전해진다.

짧지 않은 준비 기간을 가진 후 서인들은 1623년 3월 13일 새벽을 거사일로 확정했다. 그런데 거사에 함께 하기로 했던 일부 사람들의 밀고(密告)로 인해 거사 계획이 사전에 알려지는 불상사가 발생했다. 다급해진 서인들은 조정 관군에 의해 진압을 당하기 전에 거사일을 앞당겨 먼저 선수(先手)를 치기로 했다.

반정군의 총사령관이었던 김류와 이중로, 이귀, 최명길 등은 각각 군사를 이끌고 홍제원에 모였고, 능양군은 일부 반정군과 함께 대궐로 직행했다. 반정군의 행보는 생각보다 순탄했다. 그들은 창의문을 가볍게 돌파한 후 창덕궁 앞에 당도했고, 사전에 포섭된 훈련대장 이흥립 등의 도움을 받아 궁궐을 완전히 장악했다. 광해군은 반정에 대한 첫 보고를 받았을 때 그동안의 경험에 비춰 대수롭지 않게 생각해 신속한 대응을 하지 않는 실수를 범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반정군은 서궁에 유폐됐던 인목대비를 찾아가 거사 소식을 알렸다. 반정군은 인목대비를 복권시킨 후 그의 권위를 빌려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능양군을 왕위에 추대했다. 반정군이 궁궐에 진입할 무렵 궁궐 밖으로 달아났던 광해군은 얼마 안 가 체포돼 인목대비 앞으로 끌려와 무릎을 꿇게 됐고, 서인으로 강등된 후 유배 길에 올랐다. 광해군은 강화도와 제주도 등지에서 무려 18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게 된다.

■혹독한 후과(後果)
반정으로 출범한 인조 정권은 즉각적으로 광해군의 중립외교 정책을 폐기했다. 이에 따라 조선은 다시금 '친명배금' 기조를 명확히 했고, 후금에 대해 적대적인 태도를 취했다. 심지어 후금에서 보낸 사신(使臣)을 내쫓고 국서(國書)를 찢어버리기까지 했다. 또한 추후 청나라에 간 조선의 사신들은 청나라 황제 앞에서 고개를 숙이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 당시 중원에서는 후금의 위세가 눈에 띄게 높아진 상황이었지만, 인조 정권은 이 같은 국제정세를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러한 태도는 후금을 자극했고, 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을 촉발시켰다. 강력한 후금 군대는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남하했고, 인조 및 대신들은 강화도로, 소현세자는 전주로 급히 피난을 갔다. 이런 가운데 조선 각지에서 의병들이 들고 일어나 후금군을 곤경에 빠뜨리기도 했다. 후금은 조선에 오래 머무를 수 없었던 만큼 조선과 형제의 맹약을 맺은 후 철수했다. 그나마 이 때까지는 명나라와 외교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기 때문에 양호한 형편이었다.

하지만 9년이 지난 1636년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조선에 명나라와의 외교 관계 단절과 '군신의 의'를 요구했다. 조선은 후금과 형제 관계를 맺은 것도 치욕적인데, 군신 관계로 전환하는 것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반발했다. 결국, 그해 12월에 맹장 용골대(龍骨大)가 이끄는 청나라 10만 대군이 압록강을 넘어 조선을 전면적으로 침공했다. 청나라 군의 남하 속도는 정묘호란 때보다 훨씬 빨라 인조는 미처 강화도로 피난을 가지 못하고 '남한산성'(南漢山城)에 발이 묶이게 됐다.

이 당시 남한산성을 방어하는 군사들은 고작 1만3000여 명에 불과했고, 식량도 겨우 50여 일을 버틸 수 있는 수준에 그쳤다. 반면, 청나라 군대는 충분한 준비를 한 상태로 호기롭게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있었다. 더욱이 청나라 황제인 홍타이지가 친히 전장에 왔다. 이는 성문을 밖이 아닌 안에서 스스로 열게 만들려는 일종의 심리전 성격이 짙었다.

시간이 갈수록 추위와 배고픔 등으로 인해 성 안의 상황은 심각해졌다. 임금을 구원하기 위해 각 도의 관찰사 등이 이끌고 온 관군들은 목적지에 도달하기도 전에 청나라 군대에 의해 속절 없이 무너졌다. 이렇게 되자 성 안에서는 오랑캐인 청나라와 끝까지 싸우자는 김상헌 등 주전파(主戰派)의 주장이 힘을 잃기 시작했고,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 일단 청나라와 화친(和親)을 하자는 최명길 등 주화파(主和派)의 주장에 힘이 실렸다. 결국, 인조는 주화파의 주장을 채택했고, 최명길이 작성한 국서를 통해 청나라 황제에게 화호(和好)를 청했다.

그러나 홍타이지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국서를 보낼 것이 아니라 인조가 직접 자신 앞에 나와 머리를 조아리고 항복 선언을 하라고 요구했다. 강도 높은 요구에 당황한 인조와 대신들은 즉각 화답하지 않고 또 다시 망설이면서 시간을 허비했다. 이런 가운데 봉림대군 등 일부 왕자들이 피난을 가있던 강화도가 함락(陷落)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인조로서는 더 이상 남한산성에서 버틸 여력이 없었다. 인조는 청나라에서 제시한 11개의 굴욕적인 항복 조문을 모두 수용한 후 1637년 1월 30일 소현세자와 함께 서문으로 출성(出城)해 한강 동편 삼전도에서 '성하(城下)의 맹(盟)'의 예를 행했다. 청나라 황제 앞에 선 인조는 '일고두'(一叩頭), '재고두'(再叩頭), '삼고두'(三叩頭)의 호령에 따라 양 손을 땅에 댄 다음 이마가 땅에 닿을 듯 머리를 조아리는 행동을 3차례 했고, '기'(起)의 호령에 따라 일어섰다. 일설에 따르면, 땅에 머리를 박은 인조의 이마가 피로 흥건했다고 전해진다. 한민족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매우 치욕적인 순간이었다.

한 달이 채 안 되는 짧은 전쟁 이후 조선은 명나라와 단절하고 청나라에 철저히 복속(服屬)됐다.
청나라는 소현세자를 비롯해 많은 조선인들을 볼모로 잡아가기도 했다. 청나라와 조선의 군신 관계는 약 260년이 지난 1895년 청일 전쟁 때까지 지속된다.
돌아가는 현실을 냉정하게 보지 못하고 '탁상공론'(卓上空論)에 사로잡힌 대가는 너무나 혹독했던 것이다.

kschoi@fnnews.com 최경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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