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변의 역사 ⑭>
고려 문벌귀족 사회의 민낯
이자겸의 난 전말
고려 문벌귀족 사회의 민낯
이자겸의 난 전말
태조 왕건이 고려를 건국했을 때 중심 세력은 지방 호족(豪族)이었다. 이 호족 세력은 시간이 지나면서 '문벌귀족'(門閥貴族)으로 변모해갔는데, 이들은 왕실과의 혼인, 토지 독점, 관직 세습 등을 기반으로 고려 사회의 절대적인 지배계층으로 군림하게 된다. 그러나 너무나 막강한 권세를 소유한 부작용 때문이었을까. 문벌귀족 사회의 모순이 증폭되면서 고려는 연이어 큰 '사달'을 겪게 된다.
이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이자겸의 난'이다. 이자겸의 인주(현재 인천) 이씨 가문은 수십년 간 왕실과 가장 가까운 '외척'(外戚) 세력으로 존재했고, 급기야 이자겸 때에 이르러서는 왕권을 능가하고 위협하는 권세를 부리게 된다. 이른바 '고려판 국정 농단' 사건이었고, 자칫 왕조의 교체마저 불러올 수도 있었던 '대(大)정변'이었다.
'이자겸의 난'은 이후 고려 정국의 향방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다. 이를 계기로 귀족들 간의 갈등과 분열이 더욱 심화되면서, 고려는 정치·사회적으로 크게 흔들렸다. 더 나아가 고려 귀족 사회의 근간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무신정변'(武臣政變)을 촉발시키는 단초를 제공했다. 고려 귀족 사회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고려 중기 이후의 역사를 규정지었던 '이자겸의 난' 전말을 되돌아봤다.
■문벌귀족 사회와 인주이씨 권세
11세기 이후가 되면서 고려는 '문벌귀족' 사회로 진입하게 된다. 문벌귀족은 여러 세대에 걸쳐 고위 관직자를 배출하고 왕실의 외척이 된 자들을 말하는 것인데, 고려 성종(成宗, 제6대 왕) 때 중앙집권 체제가 확립되면서 새로운 지배계층으로 부상했다. 주로 지방 호족이나 개국공신의 후손들이 이에 속했다.
문벌귀족을 지탱한 것은 경제력과 권력 세습이었다. 우선 이들은 권력을 이용해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며 경제력을 확대했는데, 대표적으로 '과전'(科田)과 '공음전'(功蔭田)이 있었다. 과전은 관직·관품에 따라 18등급으로 나눠 차등있게 분급한 것이었고, 공음전은 5품 이상 고위 관리에게 지급한 토지로서 자손에게 세습이 가능한 영업전(永業田)이었다.
또한 음서(蔭敍)와 과거(科擧)를 통해 권력도 세습했다. 특히, 음서는 신라 시대의 사례를 따라 문벌귀족의 특권을 유지하기 위해 그 후손을 관리로 선발했던 제도다. 음서로 처음 임용되는 관직은 이속에서부터 정8품까지 이르렀고, 형식상 승진 제한에도 불구하고 과거를 통한 등용자처럼 5품 이상까지 승진하는 경우도 많았다. 고려 초기에는 직계 1촌인 친자에게만 특권을 부여했지만, 인종 대에 와서는 양자, 친손자, 외손자, 조카까지 특권이 확대됐다. 더 나아가 이들은 왕실과 중첩된 혼인 관계를 맺으며 외척 세력으로 군림하기도 했다.
이처럼 고려의 문벌귀족들은 신라의 성골, 진골처럼 각종 권력을 장악하며 화려한 귀족 문화를 꽃피웠다. 당시 대표적인 문벌귀족으로는 인주 이씨(이자겸), 안산 김씨(김은부), 경주 김씨(김부식), 해주 최씨(최충), 청주 이씨(이가도), 광양 김씨(김양감), 수주 최씨(최사위), 이천 서씨(서희), 남평 문씨(문공원), 파평 윤씨(윤관), 평산 박씨(박인량), 경주 최씨(최승로) 등이 있었다.
이 가운데 고려 초기 이래 가장 세력이 강했던 문벌귀족은 인주 이씨 가문이었다. 이 가문은 문종(文宗, 제11대 왕)부터 인종(仁宗, 제17대 왕)까지 무려 80여 년 간을 외척 세력으로 있으면서 강력한 권세를 떨쳤는데, 우선 이자겸의 증조할아버지인 이허겸이 그의 두 딸을 현종(顯宗, 제8대 왕)의 왕비로 만들면서 인주 이씨 세도정치(勢道政治)의 물꼬를 텄다. 이후 손자인 이자연 때에 이르러 인주 이씨 가문은 일약 '권문세가'(權門勢家)로 부상했다. 이자연은 왕실 외척에 더해 22세에 과거 장원급제라는 개인적 역량까지 더해진 화려한 인물이었다. 이를 기반으로 그의 세 딸을 문종의 왕비로 들여보냈는데, 세 딸 중 하나인 인예왕후의 혈통은 문종 이후 선종, 헌종, 인종 등까지 이어지게 된다.
다만, 인주 이씨 가문이 위기를 맞을 때도 있었다. 나이가 어리고 병약했던 헌종 때에 이자겸의 사촌인 이자의가 자신의 누이인 원신궁주와 선종 사이에서 낳은 한산후 왕균을 옹립하려다 왕의 숙부인 계림공(숙종)에 의해 진압된 것이다. 이후 계림공은 헌종에게 양위(讓位)를 받아 숙종으로 즉위했고, 원신궁주 및 한산후 등을 유배보내거나 외척 세력들을 멀리 하면서 왕권을 강화해나갔다.
하지만, 이 같은 모습은 오래가지 못했다. 숙종 이후 왕위에 오른 예종은 한편으로는 신진관료들을 등용해 기득권 세력을 견제하는 등 부분적으로 왕권 강화 노력은 이어가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다시금 인주 이씨 가문과 결연(結緣)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따라 이자겸은 자신의 딸을 예종의 왕비(문경황후)로 만드는데 성공하며 예전과 같은 권세를 회복했다.
그런데 예종의 죽음이 가까워지자 차기 대권을 놓고 이자겸 세력과 예종이 등용한 한안인 등 신진관료들 간의 대립이 크게 발생했다. 신진관료들은 외척 세력의 '발호'(跋扈)를 없애야 한다며 나이가 어린 태자 대신 예종의 동생 대방공(帶方公) 왕보에게 양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이자겸은 외손인 태자가 왕위를 이어야 한다고 예종을 끈질기게 설득했다. 결국, 이자겸의 주장이 받아 들여져 태자 왕해가 14세의 어린 나이에 인종으로 즉위했다. 인종이 왕위에 오른 후 이자겸은 그 공을 인정받아 협모안사공신(協謀安社功臣)이라는 호를 받았고, '수태사 중서령 소성후'(守太師中書令邵城侯)라는 최고위직에 올랐다.
■이자겸의 국정농단
1122년 인종의 즉위 직후 신진관료들의 우려대로 어린 왕은 사실상 허수아비로 전락했고, 이자겸 세력이 실권을 잡고 국정을 마음대로 주무르기 시작했다. 우선 이자겸 등은 신진관료 등 반대파 숙청에 나섰다. 그는 예종의 동생이자 인종의 작은 아버지인 대방공과 대원공이 문하시랑 한안인 등 신진관료들과 모의해 왕위를 '찬탈'(簒奪)하려 했다고 허위 주장을 펼쳤다. 이자겸 세력은 이참에 예종 때부터 문벌귀족에 대응해 떠오르는 세력인 신진관료들의 씨를 잘라버리려 했던 것이다.
이에 따라 대방공 및 한안인 등 많은 신진관료들이 숙청을 당했다. 이어 무인 출신으로 무시할 수 없는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동지추밀원사 최홍재 등을 제거했고, 그 공로를 인정받아 양절익명공신(亮節翼命功臣)을 제수받았으며 '중서령 영문하상서도성사 판이병부 서경유수사 조선국공 식읍팔천호 식실봉이천호'(亮節翼命功臣中書令領門下尙書都省事判吏兵部西京留守事朝鮮國公食邑八千戶食實封二千戶)라는 매우 긴 이름의 관직에 책봉됐다. 이 가운데 '판이병부사'가 핵심이었는데, 이는 문신 관료 및 무신 관료에 대한 인사권을 동시에 갖는 것이다.
나아가 이자겸은 주변 자제들과 친족들을 요직에 등용했다. 그리고 예종에 이어 인종에게도 자신의 셋째, 넷째 딸을 왕비로 들이게 했다. 막대한 경제적 부도 자연스레 따라왔다. 왕으로부터 일정한 지역을 '식읍'(食邑)으로 받았고, 많은 저택과 토지 등을 점유했다. 주변에는 아첨꾼들이 넘쳐나 무수한 뇌물이 이자겸의 집에 쌓였다.
이쯤 되자 이자겸은 높아진 권세만큼 교만도 하늘을 찔렀다. 자신의 집 이름에 왕실에서나 쓸 수 있는 '궁'(宮)이라는 칭호를 붙였고, 자신의 생일을 '인수절'(仁壽節)이라 하며 기념일로 정했다. 교만의 절정은 이자겸이 스스로를 '지군국사'(知軍國事)라고 일컬은 것이다. 이는 이자겸이 신하를 송나라로 보내 표문을 올리고 토산물을 바칠 때 사용한 용어인데, 자신이 나라의 모든 일을 맡고 있다는 뜻이었다. 사실상 스스로를 '왕'이라고 여긴 것이다. 심지어 인종에게 자신의 집에 와서 정식으로 지군국사에 책봉해 줄 것을 요청했고, 책봉식 시간까지 마음대로 정했다.
■제거 시도, 실패
인종은 비록 어린 나이였지만, 일찍이 이자겸 국정농단의 심각성과 그의 교만함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자겸의 권세에 눌려 상황을 관망하다가 지군국사 책봉 요구에서 결국 참았던 화가 폭발하고 말았다. 1126년, 18세가 된 인종은 은밀히 측근들을 불렀다. 이 자리에서 인종은 외할아버지이자 장인인 이자겸의 제거를 바라는 본인의 의중을 처음으로 드러냈다. 이에 내시지후 김찬, 내시녹사 안보린, 동지추밀원사 지녹연 등은 상장군 최탁, 오탁, 대장군 권수, 장군 고석 등과 모의해 이자겸 제거와 관련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 인종에게 보고했다. 신중한 인종은 김찬을 평장사 이수와 전평장사 김인존에게 보내 해당 계획에 대한 의견을 물어보게 했다. 그런데 이수와 김인존은 "그(이자겸)의 무리가 조정에 가득해 경솔히 움직일 수 없으니, 시기를 기다리도록 해야 한다"라며 사실상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하지만 인종은 끝내 뜻을 굽히지 않았고, 측근들에게 이자겸 제거 계획을 실행하라고 명했다. 명을 받은 인종의 측근들은 우선 초저녁에 군사들을 이끌고 궁궐로 진입해 이자겸의 최측근이었던 '척준경'의 동생 척준신과 아들인 내시 척순 등을 척살(刺殺)했다. 그런데 이 소식이 이자겸과 척준경에게 신속하게 전달됐다. 이자겸은 척준경 및 백관 등을 급히 소집해 대책을 논의했는데, 이 때 척준경이 상황이 긴급하다며 자리를 박차고 나간 후 곧장 군사들을 이끌고 궁궐 세번째 문인 신봉문(神鳳門) 쪽으로 쳐들어갔다. 척준경은 우리나라 역사상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자타공인 맹장 중의 맹장이었다.
예상보다 재빠른 척준경의 반격에 놀란 인종의 측근들은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못하고 궁궐 안에서 숨죽이고 있었다. 척준경은 전투에 쓰이는 기구를 보관하는 창고인 군기고(軍器庫)도 습격한 후 궁궐 남쪽 벽의 성문인 승평문(昇平門)을 포위했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을 직감한 인종은 직접 신봉문으로 와서 척준경 등에게 무장을 해제하고 해산할 것을 명했다. 그러나 자신의 혈족들이 살해당한 것을 확인한 척준경은 이성을 잃은 상태였고, 왕의 코앞까지 화살을 쏘게 했다. 그리고 이자겸은 합문지후 최학란과 도병마녹사 소억 등을 인종에게 보내 "난을 일으킨 자를 내주지 않으면 궁궐이 위험해 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미 이자겸과 척준경은 이 사건의 배후에 인종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인종은 측근들을 내놓으라는 이자겸의 요구를 묵살했고, 이에 이자겸은 척준경 등에게 궁궐을 공격하라고 명했다. 공격이 시작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척준경의 군사들에 의해 궁궐 동화문(東華門)에 큰 불이 났고, 짧은 시간에 번져 궁궐은 모두 불타버리고 말았다. 인종은 소수의 신하들만을 대동한 채 급히 다른 곳으로 피했다. 궁궐을 완전히 장악한 이자겸과 척준경은 거사를 주도한 상장군 최탁, 오탁 등을 그 자리에서 죽였다. 아울러 김찬과 지녹연 등은 멀리 유배를 보냈다.
거사 실패 직후 신변의 위협을 느낀 인종은 이자겸에게 양위 의사를 밝혔다. 이자겸을 제거하고 왕권을 드높이려 했던 인종은 되레 굴욕적으로 왕위를 빼앗기고 고려 왕조의 멸망마저 불러올 위기에 처했다. 인종은 조서를 내려 이자겸에게 양위할 것을 청했고, 이자겸도 처음에는 이를 받으려고 했다. 그런데 재종형제인 이수가 "주상께서 비록 조서를 내리더라도 이공(이자겸)이 어찌 감히 그 같은 일을 하겠나"라고 고함을 쳤다. 이 순간 이자겸은 마음을 돌리고 "신은 두 마음을 품지 않았으니 깊이 양찰(諒察)하소서"라며 눈물을 흘렸다. 이자겸 입장에서는 주변에 보는 눈들이 많으니 선뜻 왕위를 받기보단 일단 상황을 지켜보고 훗날을 도모할 생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인종은 한동안 이자겸에게 완전히 짓눌려 살게 됐다. 이자겸은 인종을 아예 자신의 집 서원에 연금했고, 국정을 전혀 살피지 못하게 했다. 오히려 이자겸이 모든 국정을 통할(統轄)했다. 심지어 이자겸은 이씨가 왕위에 오른다는 '십팔자도참설'(十八子圖讖說)을 믿고 두 차례에 걸쳐 왕을 독살하려고도 했다. 그러나 이자겸의 딸인 왕비가 기지(機智)를 발휘해 인종은 겨우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
■뜻밖의 간극
인종은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었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강단(剛斷)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자겸을 제거하고 왕정(王政)을 복고(復古)할 의지를 쉽사리 버리지 않았던 것이다. 인종은 다시금 최측근이었던 내의군기소감 최사전 등을 은밀히 불러 관련 계획을 논의했다.
논의 결과 인종은 이자겸과 척준경 사이의 틈을 노려보자는 결론에 도달했다. 당초 이자겸과 척준경의 관계는 매우 돈독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이자겸이 척준경을 도외시하는 모습을 나타냈다. 특히, 무슨 문제가 생기면 이자겸은 이에 대한 책임을 척준경에게 돌리는 일이 다반사였다. 이에 따라 이자겸을 향한 척준경의 불만은 날로 높아져 갔다. 척준경의 입장에서는 이자겸을 돕다가 자신의 동생과 아들까지 잃었는데, 돌아오는 것은 부당한 대우라고 생각했을 법하다.
이런 상황에서 인종은 최사전을 시켜 은밀히 척준경에게 교서(敎書)를 전달했다. 교서에는 "모두가 과인의 죄이다. 지난 일은 생각하지 말고 마음을 다해 보필해 후환이 없도록 하라"라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다시 말해 인종은 척준경에게 동생과 아들을 잃게 만들었던 지난 일은 잊어버리고, 종묘사직(宗廟社稷)을 위해 이자겸을 제거하는 큰 공을 세울 것을 간곡히 부탁한 것이다. 이로 인해 척준경의 마음은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뜻밖의 지점에서 척준경의 마음이 확실하게 돌이키게 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자겸의 아들인 이지언의 종과 척준경의 종 사이에서 다툼이 벌어졌는데, 이지언의 종이 "너의 주인(척준경)이 저위(군주가 조회하는 곳)에 활을 쏘고 궁궐을 불태웠으니 그 죄는 죽어 마땅하다"라는 극언을 했다. 자신의 종에게서 이 말을 전해 들은 척준경은 대노했고, 결국 이자겸에게서 완전히 등을 돌렸다. 이자겸은 오랜 시간 자신을 든든하게 보필해 준 맹장을 잃을 수 있다는 생각에 초조해졌고, 즉각 동생을 보내 화호(和好)를 청했다. 하지만 척준경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고향으로 돌아가 여생을 보내겠다고 선언했다. 이로써 이자겸과 척준경의 사이가 완전히 틀어지게 된 것을 직감한 인종은 김부식의 형인 지추밀원사 김부일을 척준경에게 보내 이자겸 제거를 독촉했다.
이 즈음 이자겸의 야심은 노골화되고 있었다. 인종이 연금에서 벗어나 복구된 궁궐로 돌아가자 이자겸은 다방면으로 인종을 감시했고, 자신의 사병인 숭덕부군(崇德府軍)을 무장시켜 여차하면 궁궐로 쳐들어가려고 했다. 더욱이 앞서 언급한 대로 '십팔자도참설'을 맹신한 나머지 인종 독살을 시도하기도 했다. 결국, 이자겸은 스스로 왕위에 오르려고 했던 것이다.
가뜩이나 왕의 간곡한 요청을 무시하지 못하고 있던 척준경은 이 같은 이자겸의 반역적인 행태를 더 이상 지켜볼 수 없었다. 마침내 척준경은 왕의 뜻에 따를 것이라는 의사를 전달했다. 이후 1126년 5월 20일에 이자겸의 숭덕부군이 궁궐을 침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인종은 손수 "짐이 해를 당해 왕조가 다른 성씨로 바뀐다면 짐의 죄만이 아니라 보필하는 대신도 수치스러운 일이니 대책을 잘 강구하라"라는 밀지를 써서 척준경에게 보냈다. 이를 받아 본 척준경은 상황의 급박함을 인지하고 제대로 무장도 하지 않은 소수의 장교 및 관노 등을 이끌고 궁궐로 진격했다. 순검도령 정유황도 일단의 군사들을 이끌고 궁궐로 향했다.
척준경 등의 군대가 궁궐로 진입하자 환관 조의가 이들을 안내했고, 궁궐 전각인 천복전(天福殿) 문에서 척준경을 기다리고 있던 인종을 호위해 밖으로 나가려고 했다. 그러자 이자겸의 군사들이 인종에게 활을 쏘려고 했는데, 이때 척준경이 크게 호통을 치면서 무위(無爲)에 그치고 말았다. 역사상 최고의 맹장 중 한 명으로 손꼽혔던 척준경의 기개(氣槪)는 실로 거칠 것이 없었다. 인종을 무사히 호위하는 것이 성공한 후 척준경은 승선 강후현에게 이자겸과 그의 처자식들을 체포하고 이자겸 추종세력을 척살하라고 명했다. 이에 따라 이자겸 일가는 팔관보(八關寶)에 갇혔고, 이자겸을 따르던 장군 강호와 고진수 등은 죽임을 당했다. 오랜 기간에 걸쳐서 일어났던 이자겸의 난이 마침내 진압되자 인종은 광화문(廣化門)으로 나가 "대역부도(大逆不道)의 화가 궁궐 안에서 일어났으나 충신·의사의 의거로 그 해를 제거했다"고 선언했다.
■왕정 복고, 모순 심화
정변 다음날 이자겸과 그의 처자식들, 심복 및 노비들이 모두 유배를 갔다. 그리고 인종의 비였던 이자겸의 두 딸은 폐비가 됐다. 이자겸은 전라도 영광으로 유배를 간 후 1126년 12월 그 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인물치고는 매우 쓸쓸한 최후를 맞았다. 반면, 이자겸을 몰아내는데 공을 세운 척준경, 최사전, 이수 등은 공신호와 높은 관작을 제수받았다. 특히 척준경은 일등 공신으로서 한동안 실권을 거머쥐었는데, 한 때 종1품 중서문하성의 수상직인 '문하시중'(門下侍中)에까지 올랐다가 스스로 그것보다 다소 낮은 정2품 문하시랑(門下侍郞)직을 받았다.
그러나 척준경의 권세도 오래가지 못했다. 척준경은 높은 자리에 오르면서 교만해졌고, 지나치게 발호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에 1127년 3월 좌정언 정지상 등이 "궁궐을 침범하고 불사른 것은 만세(萬世)의 죄"라면서 척준경을 탄핵했고, 인종은 그를 암타도(巖墮島)에 유배보냈다. 척준경은 그 이듬해에 고향인 곡주(谷州)로 옮겨졌고, 적지 않은 시간이 흐른 후 등창으로 숨졌다. 직후에 인종은 이자겸과 척준경 세력 및 그 자손들의 죄상을 낱낱이 기록해 담당 관청에 보관하도록 했다.
이렇게 이자겸과 척준경 등이 몰락하면서 고려는 형식적으로 나마 왕정을 복고했다. 다만, 왕권이 강화되거나 문벌귀족 사회의 모순이 일소(一掃)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인주 이씨를 대체하는 다양한 문벌귀족 및 신흥 세력이 등장했고, 그들 간의 갈등과 분열이 심화됐다. 대표적인 문벌귀족 세력으로는 경주 김씨(김부식), 경원 이씨(이수), 정안 임씨(임원애) 등이 있었다. 여기에 더해 척준경 탄핵을 주도한 정지상, 그리고 승려 묘청, 점성가 백수한 등을 중심으로 한 서경 출신 신진관료들이 급부상했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김부식 등의 개경 귀족과 정지상 등의 서경 귀족 간에 서경천도 및 금(金)나라 정벌 등을 놓고 정면충돌이 발생하게 된다. 이처럼 귀족들 사이에서의 연이은 갈등과 분열로 인해 고려는 정치·사회적으로 기강이 문란해지며 크게 흔들렸다. 민심 이반도 보다 뚜렷하게 나타났다. 아울러 이 와중에도 귀족들의 특권 독점과 '문치'(文治)주의가 성행했는데, 이는 추후 문신 귀족들에 대항한 무신들의 거사인 '무신정변'으로 이어져 고려 문벌귀족 사회는 끝내 붕괴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
kschoi@fnnews.com 최경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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