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명확한 개념으로 유명한 나치 형법의 일부다. 중대재해처벌법 시행령을 보면서 제일 먼저 연상된 문구다. 기업의 군기(?)를 잡기 위해선 법치주의는 한낱 장식물로 취급해도 되는 것일까. 준법의지가 강한 경영책임자조차 누가 무엇을 어떻게 이행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규정을 만들어 놓고 준수를 강제하는 건 권위주의적 발상이자 실제 법 준수에는 무관심하다는 방증이다. 제재를 위해선 수범자의 인권과 실효성은 아랑곳하지 않는 포퓰리즘 입법의 민낯을 보는 것 같아 못내 씁쓸하다.
모호하고 불명확한 규정이 수두룩한 것은 물론이고 법령 상호 간에 그리고 다른 법과 상충되거나 모순되는 규정이 적지 않다. 수범자는 어느 장단에 맞춰 춤을 춰야 할지 헷갈릴 수밖에 없다. 단언컨대, 중대재해처벌법령에 규정되어 있는 안전조치의무를 준수할 수 있는 기업은 전 세계 어디에도 없을 것이다. 이런 내용의 법령이 버젓이 제정되는 건 법치주의 관점에서 수치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법에서 정의를 실현하고 실효성을 담보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구성요건을 정교하고 실효성 있게 규정하는 것이다. 이것을 엉성하게 규정한 채 엄벌에만 의존하는 것은 정의도 개혁도 아니다. 불의이자 개악일 뿐이다. 법정책의 기본은 예측가능성임에도 이를 도외시한 규정이 중대재해처벌법령 전반에 산재해 있다. '이에 준하여 안전보건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 '충실하게' '적정한' '안전보건관계법령' '실질적으로 지배·운영·관리' 등과 같은 표현은 지나치게 광범위하고 불명확하여 사람마다 달리 판단될 수밖에 없다. 전문가에게 물어봐도 제각각의 답변이 나올 것이다. '관심법'이 판칠 것은 불을 보듯 훤하다.
일찍이 몽테스키외는 '법의 정신'에서 법 위반에 따른 수치와 비난에 대한 두려움이 범죄를 막는 동기가 된다고 역설했다. 중대재해처벌법령처럼 현실적으로 준수할 수 없고 예측 가능성이 없는 법령을 위반했다고 수치와 비난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법규범과 집행기관에 대한 신뢰가 추락해서는 준법의식을 높일 수 없다. 몽테스키외는 형벌을 받고도 부끄럽지 않다고 생각하는 나라가 있다면, 그것은 폭정의 결과라고도 주장했다. 엉터리 법을 만들고 놓고 처벌하는 데 급급하면 수범자들이 법을 준수하기는커녕 법을 위반하고도 죄책감을 느끼지 않게 된다는 의미이다. 그러한 법은 예방효과도 거두지 못하고 범법자만 양산하게 될 뿐이다.
종전의 안전관계법보다 특별히 강하게 처벌할 규범적 근거도 없이 처벌수준만 높인 형벌의 심각한 불균형도 곳곳에서 발견된다. 누군가를 강하게 처벌하려면 그에 맞는 합당한 이유가 있어야 함에도 이를 무시하고 있는 것이다.
산업안전보건법에서는 하청에게 의무를 부과하면서 중대재해처벌법령에서는 원청에게 의무를 부과하고 있는 조항도 상당수 보인다. 이런 상태에서 어느 원청이 법을 온전히 준수할 수 있겠는가. 정부는 현실과 안전법리를 모르는 것인가. 알고서도 외면하는 것인가. 현실과 전문성을 무시한 이념과잉의 무리한 법정책이 어떠한 결과를 초래하는지는 '김용균법'(전부개정 산업안전보건법) 한 번으로 족하다. 역사는 반복되는가.
정진우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안전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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