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국제일반

아베노믹스가 남긴 엔低 공포.. '엔 = 안전자산' 흔들린다 [글로벌 리포트]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1.08.22 18:11

수정 2021.08.22 20:41

日경제 발목잡는 엔가치 하락
수출 환차익에 주가까지 이끌며
엔低 초창기에는 특효약이었지만
5년째 '1달러=100엔' 깨지지 않자
"경제 펀더멘털 약화" 불안감 확산
글로벌 투자금 美로 유출 가능성
일부에선 "위안화에 자리 내줄것"
당장 스마트폰·장비 수입비용 부담
엔高로 전환 필요성 뚜렷해졌지만
각종 지표 여전히 '엔低' 가리켜
아베노믹스가 남긴 엔低 공포.. '엔 = 안전자산' 흔들린다 [글로벌 리포트]
【파이낸셜뉴스 도쿄=조은효 특파원】 "뭔가 잘못됐다." "엔화 가치가 달러당 90엔을 가리키는 '엔고 시대'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최근 일본 외환시장이 '엔저 이상현상'으로 술렁이고 있다.

엔화 가치는 2016년 8월 23일 달러당 99엔을 끝으로 지난 5년간 단 한 번도 '1달러=100엔'선을 깨지 못한 채 저공비행했다. '이차원의 양적완화'로 요약되는 아베노믹스의 산물인 엔저의 초장기화다. 문제는 안전자산으로서 엔의 위상까지 흔들리고 있다는 점이다. 국제금융시장에 충격파가 가해지면 어김없이 일본을 피난처 삼아 들어왔던 자금 흐름이 최근 급격히 감소한 것이다.

미국과 이란 간 갈등이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던 2020년 1월 미국의 이란의 혁명 수비대 사령관 공습 살해 사건 당시나, 그 해 3월 코로나 펜데믹(대확산) 본격화, 올해 3월 미국 월가 아케고스캐피털의 긴급 자금 청산 등 온갖 국제경제 악재에도 엔·달러 환율은 극히 일시적으로 미세 조정을 받았을 뿐 100엔 밑으로 떨어지지 않았고, 이내 엔저를 향해 다시 돌진했다. 아베노믹스가 만든 엔저에 열렬히 반응했던 일본의 경제 전문가들조차 "이러다가 영영 엔고의 시대가 오지 않는 것 아니냐" "엔의 힘이 빠진 것은 일본 경제의 펀더멘털이 약화되고 있는 적신호다"라며 불안감을 숨기지 못하고 있다.

국제 외환시장에서 '미스터 엔'으로 불리며 1990년대 말 엔저(고환율)정책의 사령탑 노릇을 했던 사가키바라 에이스케 전 대장성 재무관(국제금융담당 차관)은 최근 "지금의 시대는 엔저보다 엔고가 일본 경제에 장점"이라고 변심을 토로했으나, 과거 그토록 경계했던 엔고의 시대는 다시 오지 않을 것(일본 시사잡지 다이아몬드 8월호)이라고 단언했다.

일본 중앙은행인 일본은행(BOJ) 구로다 하루히코 총재. 로이터 뉴스1
일본 중앙은행인 일본은행(BOJ) 구로다 하루히코 총재. 로이터 뉴스1
회복력을 잃은 만성적 엔저

박근혜 정권 때인 2015년 4월 28일. 당시 한국 외환당국엔 비상이 걸렸다. 달러를 기준으로 산출되는 원·엔 재정환율이 7년 2개월 만에 100엔 당 800원 대까지 진입한 것이다. 파죽지세로 진행된 엔저는 한국의 수출전선을 위협했다. 아베 신조 당시 총리와 그의 '아바타'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BOJ) 총재의 합작품이었다. 엔화 가치는 그 해 달러당 120엔까지 떨어졌다.
2012년 12월 아베 2기 정권 출범 직전까지 달러당 70엔이었던 엔이 수직 낙하한 것이다.

구로다 총재는 '초장기 엔저 시대'로 진입하기 직전인 2016년 3월 일본 도쿄 지요다구 팰리스호텔에서 열린 경제 간담회에서 "엔화가 약세가 되고, 주가가 상승하는 등 마이너스 금리 정책이 매우 강력한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중앙은행 총재가 금리로 고환율을 의도했으며, 성과가 나왔다고 자평한 것은 노골적으로 '시장에 개입했노라' 자인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대단히 이례적인 발언이었다.

구로다 하루히코 은행은행(BOJ)총재(왼쪽)와 아소 다로 일본 부총리 겸 재무상이 지난 2019년 G20 재무장관 중앙은행 총재 회의에 참석해 나란히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다. 로이터 뉴스1
구로다 하루히코 은행은행(BOJ)총재(왼쪽)와 아소 다로 일본 부총리 겸 재무상이 지난 2019년 G20 재무장관 중앙은행 총재 회의에 참석해 나란히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다. 로이터 뉴스1

엔저가 아베 집권 7년 8개월 간 효자 노릇을 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도요타 등 수출기업들은 장부에 찍히는 수출대금 환차익에 쾌재를 불렀으며, 도쿄증시는 엔저를 타고 유입된 외국인 투자자금에 환호했다.

그런데 최근 '엔화 가치가 떨어지면 일본주가가 상승한다'는 공식이 깨지고, 코로나 감염 확대로 인한 리스크 회피 국면에서도 과거와 같은 수준의 유의미한 수준의 엔고가 진행되지 않은 채 좀처럼 '엔저 박스권'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어 이를 문제로 받아들이는 시각이 늘고 있다.

공식이 흔들리면서 투자가들도, 정책당국도 혼란스럽기는 마찬가지다. 일본 재무성 차관 출신의 시노하라 나오유키 전 국제통화기금(IMF) 부총재는 "미국이 아무리 금융 완화를 한다고 해도, 미국의 장기 금리가 내려간다고 해도, 예전처럼 1달러 100엔 이하로 엔고가 되진 않을 것"이라며 "안전자산으로서의 엔의 성격이 잊혀진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까지 말했다.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 로이터 뉴스1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 로이터 뉴스1

힘 과시하는 美경제...불황터널에 갇힌 日

세계적 코로나 확산 위기에도 미국 경제와 미국 달러는 건재했을 뿐만 아니라 강한 회복력으로 "궁극의 안전통화는 달러다"라는 믿음을 재확인시켰다. 반면, 일본 경제는 여전히 어두운 터널에 갇힌 형국이다. 엔이 만성적으로 약세를 보일 수 밖에 없는 이유다.

조만간 발표될 2·4분기 미국 경제 성장률은 당초 예상(6.5%)보다 높은 7.3%에 이를 것이란 전망이 나오고 있다. 일본 경제는 3분기 연속 마이너스(-)성장을 기록하다가 2·4분기에 전분기 대비 0.3%성장으로, 간신히 턱걸이로 플러스로 전환했다. 코로나 확산 방지를 위한 긴급사태 선언 발령으로 개인소비가 크게 위축됐으며, 이로 인해 수십조원의 국내총생산(GDP) 증발 효과가 발생했다. 델타형 변이 코로나 확산으로 록 다운(봉쇄)요구까지 나오고 있어, 올 하반기 경제 성적표도 낙관하기 어렵다.

지난 10일 일보 도쿄 긴자 거리 모습. AP뉴시스
지난 10일 일보 도쿄 긴자 거리 모습. AP뉴시스
이런 상황에서는 미국의 테이퍼링(양적 완화 축소)이나 금리 인상에 일본은행이 보조를 맞추기 어렵다는 시각이 중론이다. 미·일 금리 정상화의 속도와 시기가 벌어질수록, 금리 역전 현상으로 인해 일본에 머물던 자금이 방향을 틀어 미국으로 흘러갈 수 밖에 없고, 이 과정에서 엔저는 더욱 가속화될 가능성이 높다. 도쿄의 한 금융전문가는 "국채 10년물 기준으로 미국과 일본의 금리차는 2020년 말 0.89%포인트에서 지난 6월 중순 1.45%포인트로 확대됐다"며 "미국경제가 빠른 회복세를 보일수록, 달러 강세 엔화의 상대적 약세는 상당기간 지속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일본 경제의 구조적 요인도 엔저의 원인으로 지목된다. 2013년 9월 미국 뉴욕 증권거래소에서 당시 아베 총리는 일본경제 설명회를 열어 "세계 경제 회복은 세 단어로 충분하다. 바이 마이 아베노믹스(Buy my Abenomics)!"를 강조했다. 아베 총리가 "바이 재팬"을 역설한 것과 달리, 일본기업과 금융사들은 "바이 아메리카"에 충실했다. 도요타 등 일본 기업들은 성장성이 높은 시장을 찾아, 해외 공장 증설에 열을 올렸고, 일본계 자금들도 해외 금융자산 투자를 위해 엔을 던지고 달러를 샀다.

문제는 '나가는 양' 만큼,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일본 경제산업성에 따르면 해외로 나간 일본기업들은 현지 법인에 약 40조엔(약 430조원) 이상의 내부 유보 잔액을 쌓아둔 채 일본으로 들고 오지 않았다. 지난 2012년 채 10조엔(107조원)도 되지 안았던 일본의 해외 직접투자는 2015년 17조8000억엔, 2018년 24조9000억엔, 2020년 19조6000억엔의 추이를 보였다. 함께 '엔 매도, 달러 매수' 압력이 커진 역설적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공교롭게도 아베노믹스 가동기와 일치한다.

엔저 장기화에도 일본의 물가(지난 7월)는 전년 동월대비 마이너스(-) 0.2%를 기록하며 구로다 총재의 '2%'인 물가목표 과녁을 한참 벗어났다. '고환율과 고물가'의 메커니즘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만성적 엔저에 이미 일본의 집권 자민당 내에서는 이러다가는 중국 위안화가 엔을 대체할 시대가 올지 모른다는 위기감까지 흘러나오고 있다. "안전 통화로서의 엔의 지위가 흔들리는 순간, 재정이나 균형에서 여러 문제가 일어날 수 있다"(자민당의 무라이 히데키 중의원 의원)는 것이다.

지난 19일 일본 도쿄 업무지구 닛케이 지수 전광판 앞으로 행인들의 모습이 비친다. 로이터 뉴스1
지난 19일 일본 도쿄 업무지구 닛케이 지수 전광판 앞으로 행인들의 모습이 비친다. 로이터 뉴스1
엔저 효용론 의구심 확산

만성적 엔저에 이미 볼멘 소리가 나오고 있다. 고환율로 인해 수입 물가가 상승, 석유·석탄 등 에너지 도입가격(연간 17조엔, 약 179조원), 원·부자재 도입 가격이 부담이다. 당장, 일본에서 내로라 할 만한 휴대폰 제품이 없다보니, 애플 아이폰, 삼성전자 갤럭시 등의 수입물가가 뛸 것이며, 5G등 정보기술(IT)장비 도입 비용도 커질 수 밖에 없다. 일본의 대표 커피 브랜드인 UCC는 국제 커피 가격 상승에 엔저로 인해 당장 20%정도 가격을 올려받겠다고 했다. 엔의 구매력 저하를 빗대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최근 "선진국 식탁에 오를 대게가 일본 국민들의 식탁에서는 너무 비싸서 먹을 수 없게 됐다"고 예로 들었다.

일본경제연구센터 오치아이 가쓰아키 특임연구원 등 연구팀은 '디지털 전환(DX)가속과 엔고의 메리트'(지난 3일 발표)란 보고서에서 달러 대비 엔화 가치가 10엔 떨어지면 일본 국내총생산(GDP)이 0.5% 감소한다는 분석 결과를 발표하고, 디지털 사회로 전환될수록 탈제조업 현상으로 엔저보다는 엔고의 장점이 더 커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런 우려에도 엔저는 상당기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여전히 일본 외환당국도 수출기업의 채산성 확보를 위해 엔고를 용인할 준비가 돼 있지 않다.
국제금융센터에 따르면 해외 투자은행들은 8월 현재 엔이 향후 1년 간 평균 110.11~111.57엔에서 움직일 것으로 내다봤다. 지난 달 초 엔화 가치는 1달러당 111.65엔(7월 2일)으로 연중 최저치를 기록한 뒤 현재 109엔 안팎에서 움직이고 있다.
뱅크오브아메리카메릴린치(BoA-ML)는 1년 뒤 116엔까지 하락할 것으로 봤으며, HSBC는 112엔, 노무라증권은 114엔을 전망했다.

ehcho@fnnews.com 조은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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