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은 매사 신중하다. 종종 답답해 보일 정도다. 하지만 재정 씀씀이만큼은 화끈하다. 문 대통령은 지난 2019년 5월 재정전략회의에서 "정부가 국가채무 비율을 40% 안팎에서 관리하는 근거가 뭐냐"고 물었다. 그 뒤 재정당국은 알아서 기었다. 코로나 위기가 터지자 재정은 말 그대로 둑이 터졌다. 정치권은 돈을 풀라고 아우성을 쳤다. 홍남기 경제부총리는 기꺼이 응했다. 40% 저지선은 싱겁게 무너졌다.
문 대통령은 지난주 국무회의에서 "임기가 끝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위기 극복 정부로서 역할을 다해야 할 운명"이라고 말했다. 동의한다. 나는 재정을 더 풀어서라도 민생을 구제하려는 문 대통령의 노력을 이해하고 지지한다. 그 과정에서 국채를 찍어야 한다면 그 또한 어쩔 수 없다.
한국은 재정건전성 신화에 빠져 있다. 국가채무 비율이 40%를 넘으면 큰일이라도 날까봐 벌벌 떤다.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사실 50%도 양호한 수준인데 말이다. 김동연 전 경제부총리는 "재정건전성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이해는 되지만, 일자리 문제나 양극화 수준을 감안할 때 이제는 사회안전망의 확충에 과감히 투자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대한민국 금기 깨기').
사실 우리 사회의 양극화는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두 패로 갈려 양쪽이 죽일 놈, 살릴 놈 싸우는 모습은 이제 신물이 난다. 코로나는 양극화 골을 더 깊게 팠다. 이 시각에서 보면 재정건전성 타령은 한가하다. 신선놀음에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르는 격이다. 재정을 풀어 양극화를 줄일 수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게 마땅하다.
단 조건이 있다. 한국판 베네수엘라 걱정을 하는 게 아니다. 자린고비 체질상 우린 흥청망청 쓰라고 해도 못 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정 폭주에 견제장치를 마련해 두는 것은 언제나 옳다. 포뮬러1에선 레이싱카가 시속 300㎞ 이상 '광속'으로 달린다. 이때 속도 못지않게 중요한 게 제동장치다. 브레이크가 잘 듣는다는 믿음이 있어야 드라이버는 마음껏 액셀을 밟는다.
지금 문 대통령은 액셀을 힘껏 밟고 있다. 국가채무 비율은 현 정부 출범 첫해인 2017년 36%에서 내년 50.2%로 수직상승한다. 기획재정부가 내놓은 중기전망에 따르면 2025년엔 60%에 육박한다. 그런데 브레이크가 보이지 않는다. 액셀을 밟는 이도, 구경하는 이도 불안 초조할 수밖에 없다.
재정에 요술은 없다. 빈 곳간을 채우려면 세금을 더 걷는 게 유일한 방안이다. 잔치가 끝나면 설거짓 거리가 쌓인다. 먹은 사람이 치우는 게 제일 공정하다. 좋든 싫든 문 대통령은 이명박·박근혜정부가 재정을 쫀쫀하게 관리한 덕을 봤다. 문 대통령이 후임자에게 넘길 가장 큰 선물은 증세다. 최소한 그 기반이라도 마련해야 뒷날 원망을 듣지 않는다. 임기 말 문 대통령의 용기 백배를 기대한다.
paulk@fnnews.com 곽인찬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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