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칼럼

[구본영 칼럼] 지금은 항일 아닌 극일할 때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1.09.13 19:01

수정 2021.09.13 19:44

[구본영 칼럼] 지금은 항일 아닌 극일할 때
항일 시인 이육사는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로 시작하는 명시 '청포도'를 썼다. '샤인머스켓'은 이와 달리 껍질째 먹는, 씨 없는 청포도다. 추석을 앞두고 며칠 전 들른 청과물 시장에서 이 명품 포도의 인기는 대단했다. 처음엔 서구 개량종이거니 했는데, 알고 보니 일본에서 개발한 품종이어서 놀랐다.

더 놀라운 사실은 한국산 샤인머스켓의 세계 시장 진출이다.
2006년 일본서 종자를 들여온 이후 중국·베트남·미국·뉴질랜드 등 19개국에 수출하면서다. 그러자 올해 일본은 "값비싼 종자를 한국에 뺏겼다"며 종자의 해외 반출을 통제하는 종묘법을 개정했다. 그토록 일본을 앞서고 싶었던 이육사의 갈망이 실현된 셈이다.

"역사는 문재인정부를 해방 이후 75년 만에 일본을 넘어선 정부로 기록할 것." 지난 8일 국회 교섭단체 대표 연설에서 윤호중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는 이렇게 기염을 토했다. 대일 무역전에서 이겼다면서다. 그러나 그 근거로 든 "100대 핵심품목의 대일 수입의존도는 2017년 33.5%에서 2021년 24.9%로 낮아졌다"는 대목부터 미심쩍었다. 1~7월 사이 전체 대일 무역적자 폭은 더 커졌기 때문이다.

물론 대일 무역적자를 무조건 죄악시할 까닭도 없다. 일본산 중간재 수입을 억제하면 우리의 세계 수출물량도 같이 줄어들어서다. 지난 2년간 사실상 일제 불매운동을 유도했지만 일본에서도 한국산 수입을 줄이는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결국 양국이 같이 손해를 봤다. 그런데도 '무역전 승리' 운운하니, 지난 4년간 이렇다 할 업적이 없는 정부의 '정신승리법'으로 비치는 것이다.

한일 관계는 수교 이래 최악이다. 한국 대법원의 징용배상 판결을 기화로 아베 신조 전 총리가 반도체 핵심부품 수출을 제한하면서다. 이후 지난해 총선을 앞두고 국내에서 '죽창가' 소리는 요란했다. 하지만 한일 모두 신통한 결실은 없었다.

문 정부는 일본 정부가 출연한 10억엔(약 100억원)으로 설립된 화해·치유재단을 2018년 해산했다.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를 사문화한 셈이다. 이후 재단 지원금을 받지 않았던 위안부 몇 분이 세상을 떴다. 그 사이 공금 유용 혐의를 받는 윤미향 전 정의연 대표는 금배지를 달았으니, 할머니들에겐 이보다 허망한 일이 어디 있겠나.

일본 측이 이를 틈타 역사 왜곡에 나섰으니 더 문제다. 해산을 앞둔 스가 요시히데 내각이 최근 교과서에서 '종군 위안부' '강제 연행' 표현을 수정했다. 이로 인해 '고노 담화'가 무력화됐다. 문 정부의 위안부 합의 미이행을 빌미로 일본 국수주의 세력이 숙원을 푼 꼴이다.
광복 70여년 후 일제가 퇴각하고 없는 한반도에서 '뒷북 독립운동' 하듯 반일 몰이에 나선 대가치곤 허탈했다.

그래서 한국산 샤인머스켓이 올린 작은 개가의 함의는 자명하다.
일본군 아닌, 우리끼리 싸우기 일쑤인 '독립 후 항일'이란 정략적 과녁 대신에 이제 극일(克日)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삼성전자가 반도체 투자를 기점으로 협력자이자 경쟁자였던 일본의 소니를 마침내 제쳤듯이….

kby777@fnnews.com 구본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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