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변의 역사 ⑲>
군정 장기집권의 서막
박정희, 김종필의 5.16 전말
군정 장기집권의 서막
박정희, 김종필의 5.16 전말
1961년 5월 16일 새벽, 육군 소장 박정희와 김종필 예비역 중령 등 육군사관학교 8기생들이 중심이 된 일단의 군 병력이 한강대교를 도강해 서울 중심부로 진입, 주요 시설을 장악했다. 그리고 4.19 혁명 이후 각계각층에서 분출한 국민들의 정치·사회적 요구를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고 '자중지란'(自中之亂)에 빠졌던 민주당 장면 정권을 축출(逐出)한 후 대한민국의 새로운 권력으로 떠올랐다. 역사는 이를 '5.16 쿠데타'라고 부른다.
5.16 쿠데타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현재 극명하게 나뉜다. 한편에서는 5.16 쿠데타를 헌정질서를 유린하고 민주주의를 훼손한 사건이며 이후 기나긴 군사독재정권의 암흑기(暗黑期)를 여는 서막으로 평가하고 있다.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5.16 쿠데타를 극심한 혼란과 공산주의의 위협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고 이후 눈부신 경제 발전의 길을 여는 첫 단추로 평가하고 있다. 후자의 관점은 용어에 있어서도 5.16 쿠데타가 아닌 '5.16 혁명'으로 부른다.
다만 역사적 평가는 엇갈려도 5.16 쿠데타가 한국 현대사의 물줄기를 크게 뒤바꾼 정변이었다는 점에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5.16 쿠데타 이후 박정희 정권의 주도 하에 한국의 정치, 사회, 경제적 상황은 이전과 달라진 모습을 나타낸다. 정치, 사회적으로는 군부 권위주의적인 색채를 띈 보수화 경향이 짙어졌고, 경제적으로는 급속한 성장 일변도의 경향이 두드러졌던 것이다. 이처럼 한국 현대사를 논할 때 가장 첫 손에 꼽히는 정변인 '5.16 쿠데타' 전말을 되돌아봤다.
■혁명 후 혼란상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이 1960년 4.19 혁명으로 붕괴된 후 우리나라에는 허정 과도정부를 거쳐 민주당의 장면 정권이 들어섰다. 뒤이어 자유당 정권 시절에 억눌렸던 정치·사회적 요구가 곳곳에서 분출하기 시작했다. 특히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학생 운동이 본격적으로 나타났는데, 여기에서 제시된 화두는 '통일'(統一) 문제였다. 대표적으로 4.19 혁명 1주년인 1961년에 대학생과 고등학생 대표까지 참여한 민족통일 학생연맹은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라는 구호를 내세우며 남북학생회담의 개최를 주장하기도 했다. 또한 노동조합 결성 등 노동 운동도 본격적으로 수면 위로 떠올랐고, 이는 추후 좌파 성향의 사회 운동으로 나아갔다.
이러한 과도기(過渡期) 속에서 장면 정권은 대처에 골머리를 앓게 된다. 당초 장면 정권은 권위적이고 억압적이었던 자유당 정권과 차별화를 하려 했다. 하지만 이 시기 장면 정권은 자유당 정권과 크게 다를 바 없는 대처를 선택했다. 학생 운동 및 노동 운동 등에서 나온 요구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반공법 및 데모규제법을 앞세워 국가보안 체제를 강화하려고 했던 것이다. 물론 당시 정치·사회적 요구들이 일부 급진적인 성격도 띄고 있었던 만큼 장면 정권의 대처는 어느 정도 불가피한 측면도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대처는 결과적으로 더 큰 반발과 혼란을 불러왔다.
아울러 민주당 내부 분열의 심화는 혼란상을 더욱 가중시켰다. 당시 민주당 내에서는 장면을 중심으로 한 신(新)파와 윤보선, 김도연 등을 중심으로 한 구(舊)파가 정치 권력을 놓고 끊임없이 대립하고 있었다. (참고로 신파는 학자와 법조인 출신이 많았고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성향을 띈 반면 구파는 부유층이 많았고 비교적 보수적인 성향을 띄었다.) 현재 우리나라 정치 체제의 핵심은 대통령 중심제이지만, 당시에는 의원내각제였다. 이에 따라 정치 권력의 핵심인 국무총리를 차지하기 위한 투쟁이 신파와 구파 사이에 벌어졌다.
대통령에 선출된 윤보선은 국무총리로 구파였던 김도연을 지명했지만, 국회의 인준(認准)을 얻는데 실패했다. 이후 신파였던 장면이 국회의 인준을 얻어 국무총리가 됐다. 장면은 내각을 구성하려 했지만 구파는 협조를 거부했고, 결국 신파 위주로 내각이 구성됐다. 이에 구파는 반발, 신민당(新民黨)을 창당하며 떨어져 나갔다. 분당이 된 후 국회 의석 구조는 민주당 134석, 신민당 60석이었다. 4.19 혁명 직후인 1960년 7월 29일에 실시된 제5대 국회의원 선거 이후 압도적인 다수 의석을 기반으로 했던 민주당 정권은 안정적인 국정 운영을 하지 못하고 끊임없는 권력 투쟁 및 내부 분열 등에 시달리며 쇠퇴의 늪으로 빠져들고 있었다.
■쿠데타 움직임
군부는 한국전쟁 이후 반공(反共)을 의식한 미국의 지원 등으로 급격히 성장해 있었다. 주요 군 간부들은 미국 등에서 체계적인 교육을 받아 엘리트 집단화 됐고, 이승만 정권 하에서 군부는 어느 정도 정치화하는 모습도 보였다. 이와 함께 군부 내 인사 적체 및 부정부패가 심화하기도 했다.
그런데 4.19 혁명 후 정치·사회적 혼란과 더불어 군부에서도 심상치 않은 움직임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는 박정희 당시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과 김종필, 김형욱, 길재호 등 육군사관학교 8기생들 주도의 '정군운동'(整軍運動)으로 표면화됐다. 정군운동의 명분은 군부 내에서도 자행됐던 3.15 부정선거의 잔재와 각종 부정부패를 뿌리 뽑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울러 정군운동의 이면에는 승승장구하는 선배 군인들과 달리 승진 등에서 지지부진했던 후배 군인들의 불만도 작용했다. 이들은 송요찬 육군참모총장 퇴진 요구 등이 담긴 정군 연판장(連判狀)을 군부 내에 돌렸고, 정군 운동을 비판하는 군부 인사들의 성명을 대놓고 성토하기도 했다. 그 결과 정군운동은 송요찬 총장 및 백선엽 대장, 그리고 일부 중장과 소장의 퇴진을 이끌어내는 등 부분적으로 성공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더 이상의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정군운동 주도 세력들은 당시 현석호 국방부 장관을 찾아가 더 강력한 정군운동 추진을 건의하려 했지만 만나지도 못했고, 최영희 연합참모총장(현재 합참의장) 집무실에 몰려가 자진 사퇴를 요구하기도 했지만 되레 역풍을 맞았다. 장면 정권과 군 수뇌부는 이들의 행동을 군의 지휘계통을 무시하는 '하극상'(下剋上)으로 규정했고, 이후 강력한 탄압이 뒤따랐다. 더욱이 군부의 안정을 원했던 미국도 정군운동이 확산되는 것을 경계하는 모습을 보였다. 결국 정군운동 주도 세력들은 대거 '징계위원회'에 회부돼 김종필, 석정선 등 핵심 인물들이 군복을 벗게 됐다. 정군파의 리더격이었던 박정희도 강제 예편(豫編)을 당할 위기에 처했지만, 오랜 기간 친분을 쌓아온 장도영 당시 육군참모총장의 도움으로 대구 2군 부사령관으로 좌천됨으로써 군에서 간신히 생존할 수 있었다.
이처럼 상황이 뜻대로 돌아가지 않자 정군운동 주도 세력들은 보다 과감하면서도 위험한 계획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바로 민주당 장면 정권을 축출하기 위한 '쿠데타'였다. 이들은 1960년 9월에 서울 명동에 위치한 요정인 '충무장'에 모여 쿠데타를 결의(충무장 결의)했고, 이후 각자의 직책과 인맥을 총동원해 쿠데타 세력을 규합해 나갔다. 정군파의 쿠데타 계획의 핵심은 장면 정권의 '비둘기 작전'을 역이용하는 것이었다. 비둘기 작전은 장면 정권이 드높아진 사회 운동의 열기를 물리력을 동원해 제압하기 위해 수립한 작전을 말한다. 정군파는 비둘기 작전이 시행되면 시위 진압을 명분으로 자연스레 서울 요충지들을 점령한 후 권력을 장악하려고 했다. 이에 따라 정군파는 시위 진압에 동원될 서울 근교 부대의 장교들을 집중적으로 포섭해 나갔고, 그 결과 국방부, 육군본부, 육군 제1공수단, 육군 제33사단, 제34사단 등의 장교들을 대거 끌어들이는데 성공했다.
한편, 정군파의 쿠데타 모의와 별도로 해병대에서도 쿠데타 모의가 진행되고 있었다. 이를 주도한 것은 해군 준장이자 해병 제1여단장이었던 김윤근이었다. 정군파는 해병대의 단독 쿠데타 모의 소식을 접하고 이들을 포섭하기 위해 노력했다. 특히 박정희는 자신의 신경군관학교(만주국 육군군관학교) 인맥을 적극 활용했는데, 당시 해병대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던 신경군관학교 1기 출신인 김동하를 고리로 김윤근(신경군관학교 6기)과 접촉해 함께 쿠데타를 결행하기로 뜻을 모았다.
■5.16 쿠데타
군부 내에서 쿠데타 움직임이 가속화될 즈음 1961년 정치권 등에서는 이른바 '3, 4월 위기설'이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군부 내 정보기관과 주한미군은 정군파의 쿠데타 모의를 사전에 어느 정도 감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박정희의 존재는 장면의 귀에까지 들어왔다. 박정희는 이미 남조선노동당(남로당) 전력 등으로 정보기관의 주요 감시 대상이기도 했다. 이에 장면과 현석호 등은 몇 차례에 걸쳐 장도영을 불러 박정희와 군부 내 쿠데타 움직임에 대해 캐물었다. 그런데 장도영은 쿠데타 움직임을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박정희는 그럴 위인이 아니다"라는 거짓 보고를 올리며 안심시켰다. 이 때 장도영은 정군파에게 포섭됐거나 아니면 이도 저도 아닌 기회주의적인 위치에 머무르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정군파는 쿠데타 세력 규합을 완료한 후 구체적인 쿠데타 거사일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앞서 언급한 대로 정군파는 장면 정권의 '비둘기 작전'을 역이용하기로 계획한 만큼 혁명 1주기 시위가 예상되는 1961년 4월 19일을 거사일로 잡았다. 쿠데타가 용이하게 진행되게 하기 위해 시위가 보다 급진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게 만들기 위한 공작도 꾸몄다. 하지만, 정군파가 예상했던 것과 달리 4월 19일에 별다른 시위가 일어나지 않았다. 이에 정군파는 거사일을 그해 5월 12일로 다시 잡았다. 그런데 이 계획도 군부 내 정보기관에 감지돼 취소됐고, 결국 5월 16일이 최종적인 거사일로 확정됐다.
이처럼 우여곡절 끝에 운명의 날이 밝았다. 총 3600명이 동원된 쿠데타 군은 당일 새벽에 작전을 개시했다. 선봉에 선 것은 김윤근이 지휘하는 해병 제1여단이었다. 뒤이어 박치옥 대령이 지휘하는 공수부대가 출동해 해병대와 합류, 서울 중심부로 진입하는 통로인 한강대교로 진격했다. 아울러 제6군단 4개 포병대는 육군본부를 향해 진격했다. 한강대교에 도착한 해병대와 공수부대는 그곳을 방어하고 있던 헌병 제7중대와 맞닥뜨렸다. 헌병대가 통과를 순순히 허락하지 않자 쿠데타 군이 선제 공격을 가하면서 양측 사이에 교전이 벌어졌다. 숫자와 기세 면에서 우세했던 쿠데타 군은 헌병대를 가볍게 제압했고, 서울 중심부로 진입하는데 성공했다. 육군본부를 향해 진격했던 제6군단 포병대도 목표 달성에 성공했다. 이후 쿠데타 군은 부대를 효율적으로 나눠 서울 요충지들을 점령해 나가기 시작했다. 우선 쿠데타 군의 주력 부대는 서울시청, 해병대는 치안국과 서울시 경찰국, 공수부대는 중앙 방송국 및 장면 숙소인 반도호텔 등을 각각 점령했다.
그런데 이 당시 쿠데타 진압을 진두지휘해야 했던 장면과 윤보선 등은 제대로 된 대처를 하지 못해 쿠데타 성공의 빌미를 제공했다. 장면은 쿠데타 소식을 접하자 미 대사관 및 대사관 숙소로 몸을 피하려 했고, 여기서 신원불상자라는 이유로 거절되자 혜화동의 깔멜수녀원으로 피신했다. 장면은 수녀원에서 미국에게 쿠데타 무력 진압을 요청했지만, 미국은 장면 정권이 알아서 처리하라는 식의 애매한 반응을 보였다. 윤보선은 1군 사령관이었던 이한림이 쿠데타 진압을 강하게 주장하자 서울 시내에서 아군끼리 내전(內戰)이 벌어질 수도 있다는 등의 이유를 들며 반대했다. 추후 윤보선은 박정희 등과 만난 자리에서 "올 것이 왔다"는 의아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전세는 점차 쿠데타 군에게 유리해졌다. 별다른 저항이 일어나지 않는 사이 쿠데타 군은 서울 전역과 부산, 광주, 대전 등 지방의 주요 도시들을 장악했다. 마침내 새벽 5시 쿠데타 군은 '군사혁명위원회' 조직 및 행정·입법·사법 3권의 통합 장악, 그리고 김종필 주도의 6개 항으로 구성된 '혁명 공약'을 방송을 통해 발표하기에 이른다. 혁명 공약의 주요 내용들을 보면 반공체제 강화, 미국 등 우방과의 유대 공고화, 사회 부패 일소 및 청신한 기풍 진작, 국가자주경제재건 총력, 통일을 위해 공산주의에 대항할 수 있는 실력 배양, 혁명 과업 성취 후 양심적 정치인에 정권 이양 등이 있었다. 아울러 막강한 권력을 행사하게 될 군사혁명위원회의 위원장은 장도영이 맡게 됐다. 이후 군사혁명위원회는 '국가재건최고회의'로 명칭이 변경된다. 이 때 박정희는 부의장을 맡으면서 서서히 권력의 정점에 나아갈 채비를 한다.
한편, 장면은 쿠데타가 일어난 지 이틀이 지난 후에야 수녀원에서 나왔고, 서울 중앙청으로 이동해 임시각의를 주재한 뒤 내각 총사퇴 결의 및 군사혁명위원회에 정권 이양 등을 발표했다. 쿠데타 발생 직후 애매한 태도를 보였던 미국도 쿠데타 및 군정(軍政)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이로써 4.19 혁명으로 탄생한 장면 정권은 이렇다 할 업적을 내놓지 못한 채 출범 9개월 만에 무너졌다.
■군사정권 출현
5.16 쿠데타 이후 정국의 무게추는 국가재건최고회의와 그 정점에 있는 두 사람에게로 쏠렸다. 앞서 언급한 대로 국가재건최고회의는 행정, 입법 등을 장악한 초법적인 기구였고, 의장은 장도영, 부의장은 박정희였다. 특히 장도영은 이미 육군참모총장을 맡고 있는 상태에서 임시정부의 내각 수반과 국방부 장관까지 차지하면서 겉으로 보기에 군부와 정부를 완벽히 장악한 듯이 보였다. 그러나 장도영은 쿠데타 발생 21일 만에 국방부 장관에서 해임됐고, 이로부터 한 달 뒤에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에서도 물러나게 된다. 이후에는 중앙정보부에 의해 '반혁명 내란음모 혐의'로 기소되면서 완전히 몰락했다. 기실 쿠데타 직후부터 실권자는 박정희와 김종필 등이었고, 장도영은 잠시 이용할 만한 허수아비에 불과했던 것이다.
반혁명 사건 이후 박정희는 공식적으로 최고 권력의 자리에 올라섰다. 그리고 박정희를 중심으로 한 5.16 주체 세력은 반공법, 정치활동정화법 제정 및 사회악 일소 등을 내세우며 본격적으로 정치·사회 변혁에 착수했다. 이를 통해 부정한 공직자와 조직폭력배 등을 대거 몰아내면서 한 때 국민들의 높은 지지를 받기도 했다. 이처럼 정치·사회의 변혁이 나타나는 가운데 5.16 주체 세력은 김종필을 초대 부장으로 하는 국내 최초의 정보기관인 '중앙정보부'를 창설하기도 했다. 이후 중앙정보부는 각종 정보정치 및 공작정치를 펼치며 박정희 정권의 장기 집권을 든든하게 뒷받침했다. 아울러 이 시기에 5.16 주체 세력은 장면 정권에서 설계한 초안 등을 기반으로 수출 주도 산업화 등 경제개발 계획도 본격적으로 추진하려고 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5.16 주체 세력이 당초 약속했던 '민정 이양'(民政 移讓)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커져 갔다. 미국도 이 같은 요구를 적극적으로 했다. 박정희와 5.16 주체 세력은 처음부터 민정 이양을 할 마음은 없었던 것으로 보이고 일부 군 지휘관들의 의견을 수용해 '군정 4년 연장안'을 국민투표에 부치려고도 했지만, 전방위적인 압력으로 인해 결국 민정 이양 계획을 발표했다. 우선 국민투표를 통해 헌법을 개정해 대통령제로 권력 구조를 바꾸고, 선거 제도는 제1공화국의 직접선거제로 하기로 했다. 이를 기반으로 1963년 10월 15일에 제5대 대통령 선거를 실시하기로 확정했다.
그런데 민정 이양 분위기가 무르익어감에도 불구하고 박정희와 5.16 주체 세력은 순순히 물러서려 하지 않았다. 박정희는 군인으로 돌아가겠다는 약속을 번복하고 민정에 참여할 의사를 밝혔다. 이에 앞서 박정희의 든든한 우군이었던 중앙정보부는 이미 물불을 가리지 않고 박정희의 대통령 선거 출마를 위한 사전 준비 작업에 착수한 상태였다. 특히 중앙정보부는 증권 파동, 워커힐 사건, 새나라 자동차 사건, 파친코 사건 등 극히 부정한 방법이 동원된 4대 의혹 사건을 일으키면서 까지 박정희의 정당인 민주공화당 창당 자금 마련에 나섰다. 이후 박정희와 5.16 주체 세력은 공화당을 창당했고, 박정희는 육군대장으로 예편한 후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박정희는 1963년 10월 대통령 선거에서 자립, 자조, 민족 등 민족적 민주주의를 주창하며 당시 윤보선 민정당 후보와 맞붙었다. 선거 결과는 박정희의 15만표 차 신승(辛勝)이었다. 그해 12월 17일에 박정희가 제5대 대통령으로 취임하며 제3공화국이 출범했고, 이후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로 이어지는 32년 간의 군사정권 시대가 열리게 된다.
kschoi@fnnews.com 최경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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