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트 군인이자 금군교두 출신 임충, 천하장사 노지심, 쌍도끼 고수 이규 등 어느 한 명 허투루 볼 수 없을 정도다. 이 쟁쟁한 인물들의 두목은 송강인데 가무잡잡한 얼굴에 왜소한 체격으로 외모는 볼품이 없었지만, 남을 섬기는 리더십으로 주변에 사람을 끌어들이는 재주가 있었다. 덕으로 상대를 감복시키는 그의 카리스마에 수호지의 호걸들은 송강을 양산박의 서열 1위로 인정하고 죽을 때까지 충성을 바친다.
이 송강의 별명은 '급시우'(及時雨)다.
'때맞추어 내리는 비'라는 뜻인데, 평소 송강의 행적대로 도움이 필요할 때 딱 맞춰 적절하게 등장하는 요긴한 인물이라는 뜻이다. 농경사회에서 적절한 때에 내려주는 비는 한 해 경제를 좌우할 만큼 절대적인 존재였다. 지금은 급시우가 하늘에서 내리는 게 아니라 정부에서 나온다. 정책 하나하나가 사회에 태풍을 불러오기도 하고, 가뭄에 단비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지난해부터 이어진 전 세계 반도체 대란의 이슈는 지금도 끊이지 않고 여진을 일으키고 있다. 최근 미국 정부가 선포한 반도체 정보공개 요구도 그중 하나다. 반도체 병목현상의 원인을 찾겠다는 이유로 삼성전자, TSMC 등 글로벌 반도체 제조사에 재고, 수요 등 기업 내부정보를 제출하라는 것이다. 미국 정부 요청에 응한다는 것은 영업비밀을 고스란히 내놓는 것이나 진배없다.
백악관의 지난 1차 반도체 회의가 전해주는 메시지는 분명했다.
미국이 반도체를 국가안보의 관점에서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이 삼성전자를 비롯한 반도체 기업들을 압박하는 것은 당연한 순서였지만, 꼭 부정적인 영향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한국 정부가 미국을 상대로 한 경제외교에서 강력한 패 하나를 쥐게 된 셈이기 때문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가석방에 대해 이례적으로 청와대가 백신, 반도체 부문의 역할을 기대한다고 논평한 것도 이런 계산이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우리 정부의 활용능력이다. 우리 반도체 기업을 최대한 활용해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최대한 높게 만들어야 하는 게 정부의 역할이다.
하지만 미국의 억지 요구가 날아들고 있는데도 우리 정부의 대응은 굼떠 보인다. 이번에도 삼성전자를 쳐다보면서 '어떻게든 알아서 해봐'라며 등을 떠미는 듯한 분위기다. 반도체는 그간 민간에 맡겨두면 알아서 잘하는 사업이었지만 국가 전략물자라면 얘기가 다르다. 미국이 백악관을 앞세워 움직이고 있다. 우리 정부도 그에 걸맞은 파트너가 나서 상대해야 한다. 그간 민간에 맡겼던 반도체에 이번에는 정부가 '급시우'를 내려줄 때가 됐다. ahnman@fnnews.com 안승현 산업부 차장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