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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데타·직선제 주역 '빛과 그림자'…1노3김 시대 저물다[노태우 전 대통령 별세]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1.10.26 18:11

수정 2021.10.26 21:33

신군부시대 영원한 2인자 거쳐 6·29 선언후 13대 대통령 당선
여소야대 벼랑끝서 3당 합당 한국정치 흐름 바꾼 승부수로
올림픽·남북유엔가입 큰 성과 퇴임 후 비자금 등 과오도 뚜렷
제13대 대통령을 지낸 노태우 전 대통령이 26일 오후 지병 악화로 별세했다. 향년 89세. 고인은 1987년 6월 항쟁 직후 집권 민주정의당 대선 후보로서 '6·29 선언'을 발표해 대통령 직선제를 전격 수용한 뒤 같은 해 12월 13대 대선에서 당선됐다. 대통령 직선제 도입 후 첫 대통령이었다. 1992년 삼성전자를 시찰하는 노 전 대통령 뉴스1
제13대 대통령을 지낸 노태우 전 대통령이 26일 오후 지병 악화로 별세했다. 향년 89세. 고인은 1987년 6월 항쟁 직후 집권 민주정의당 대선 후보로서 '6·29 선언'을 발표해 대통령 직선제를 전격 수용한 뒤 같은 해 12월 13대 대선에서 당선됐다. 대통령 직선제 도입 후 첫 대통령이었다. 1992년 삼성전자를 시찰하는 노 전 대통령 뉴스1

쿠데타·직선제 주역 '빛과 그림자'…1노3김 시대 저물다[노태우 전 대통령 별세]

노태우 전 대통령은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가장 명암이 뚜렷했던 지도자로 불린다. 헌정 이래 첫 직선제 투표로 당선된 첫 대통령이자 북방외교 강화·남북기본합의서를 만든 사상 첫 대통령으로 불리지만 동시에 전두환 신군부의 주축이라는 낙인이 마지막까지 따라다녔던 점에서다. 고인의 별세로 대한민국 현대사를 관통했던 '1노 3김' 시대도 역사 속으로 막을 내리게 됐다.

■12·12주축서 정권 2인자로

노 전 대통령은 1932년 12월 경북 달성군에서 태어났다. 고교 졸업 후 육군사관학교에 진학한 고인은 전두환 전 대통령과는 육사 11기 동기다.


전 전 대통령의 하나회는 군권 장악과 정권찬탈을 위해 '12·12'쿠데타를 일으켰고 이후 5공화국의 주축세력이 된다. 노 전 대통령은 당시 쿠데타 거사일 절체절명의 순간에 휘하 9사단 병력을 출동시켜 쿠데타 성공의 결정적 역할도 했다.

이후 고인은 5공화국에서 전 전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탄탄대로를 걷는다. 보안사령관 근무 뒤 1981년 육군 대장으로 예편하면서 민주정의당에 입당했다. 이후 정무1장관을 거쳐 체육부장관, 내무부 장관, 서울올림픽대회 조직위원장 등을 거쳐 권력의 후계자로 발돋움하면서다. 1985년 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정의당 전국구 의원으로 선출되며 민정당 대표위원으로 집권여당 당권도 쥐게 된다.

■6·29선언으로 승부수 DJ·YS 단일화 실패로 대통령

1987년에는 6월 10일 잠실 체육관에서 대통령 후보로 선출 뒤 격화되는 시위에 6·29 선언이라는 승부수를 던졌다. 당시 전 전 대통령이 개헌 요구를 거부한 4·13호헌 조치를 발표해 민심이 들끓자 6·29선언으로 김대중 사면 복권 등 8개항의 유화조치 선언문이었다. 선언문에는 개헌과 대통령 직선제, 민주화 요구도 담겼다.

이후 야권의 정치 라이벌이던 DJ(김대중)·YS(김영삼)의 단일화 실패로 노태우 후보가 두 사람을 누르고 13대 대통령에 당선된다.

재집권에 성공했지만 집권 2개월 만에 총선에서 패배하며 여소야대 정국이 도래, 국정에 제동이 걸리자 또다시 승부수를 띄웠다. 1990년 김영삼의 통일민주당, 김종필의 공화당과 함께 3당합당을 선언한 것이다.

노태우정부 5년은 한국 사회가 권위주의 시대를 뒤로하고 경제, 사회 각 분야에서 민주화 요구가 분출하던 시대로 야당의 협조 없이는 신군부 세력 독자적으로 국정운영이 쉽지 않았던 점도 있다.

■재임 중 공산권 수교 강화, 남북기본합의서 마련

노 전 대통령의 재임 중 최대 업적은 중국, 러시아 등 공산권과의 수교가 꼽힌다. 1990년 12월에는 당시 미하일 고르바초프 러시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을 갖고 한·러 간의 국교를 회복시켰고 중국과도 국교를 수립, 북방외교의 기틀을 마련했다. 당시 수교국가가 공산권을 포함해 45개국이었다.

또 다른 성과는 북한과 함께 유엔 동시 가입이었다. 또 남북 고위급 회담을 열고 문화·체육의 교류를 하는 등 적극적인 대북 외교에 나섰다.

1991년 11월13일에는 남북 공동으로 '한반도 비핵화 선언'을 채택했다. 남북 고위급 회담에선 남북한 화해, 상호 불가침, 교류 협력을 골자로 남북기본합의서를 채택해 현재 남북 회담의 골간이 되고 있다.

■퇴임 이후 구속수감에 건강 악화로 투병의 연속

퇴임 뒤 삶은 구속 수감과 투병의 연속이었다.

1995년 국회 대정부질의에서 박계동 민주당 의원이 노 전 대통령의 '비자금 400억원설'을 폭로했고 이후 검찰 수사로 구속돼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수감됐다. 항소심을 통해 징역 15년에 2628억원의 추징금으로 감형됐다.

노 전 대통령은 또 12·12 쿠데타와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압, 비자금 사건 등으로 대법원으로부터 징역 17년을 선고 받았다. 이후 1997년 김영삼정부의 특별사면으로 전 전 대통령과 함께 석방됐다.

2002년 이후 전립선암 수술을 받는 등 건강이 악화되며 칩거와 투병을 이어왔다.
공식 활동은 2003년 노무현 전 대통령 취임식 참석이 마지막이었다.

2008년에는 희귀병 소뇌위축증 진단을 받아 투병했고, 수차례 폐렴 증세로 입원과 퇴원을 반복했다.


유족은 배우자 김옥숙 여사와 아들 재헌, 딸 소영씨가 있다.

cerju@fnnews.com 심형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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