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협약은 1905년 일본의 가쓰라 다로 총리와 미국의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 육군장관 간 묵계다. 한반도와 필리핀에 대한 지배권을 상호 인정한다는 구두 합의였다. 다만 이 밀약이 얼마간 촉진제가 됐을지 모르나, 일제에 강점된 근본 원인은 따로 있었다. 당시 대한제국은 스스로를 지킬 능력이 없었던 데다 국제정세에도 까막눈이었다.
가쓰라-태프트 밀약 체결 두달 뒤 미국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의 딸 앨리스 일행이 서울에 왔다. 고종은 밀약 체결을 까맣게 모른 채 이 '미국 공주'를 극진히 모셨다. 덕수궁에 재우고 홍릉에서 연회도 베풀었다. 을미사변 시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했던 고종이 막상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기자 미국이 구원의 동아줄인 양 매달린 셈이다.
그러나 버스 지난 뒤에 손 흔드는 격이었다. 헨리 키신저의 저서 속 비화를 보라. 고종의 구애에 루스벨트가 "한국인들 스스로 못하는 것을 다른 나라가 해주리라 기대하는 건 어불성설"이라고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니 말이다. 더욱이 당시 세계 최강은 미국이 아닌 대영제국이었다. 그래서 고종의 영국의 주적인 러시아 공관 피신(아관파천)은 최악의 선택이었다. 구미 열강은 물론 일제조차 영·일동맹을 맺는 등 대러 견제 스크럼을 짜고 있는 판에 제 발로 호구로 걸어들어간 꼴이어서다.
이런 역사적 맥락을 모르고 이 후보가 대한제국의 몰락을 미국 책임으로만 돌리는 건 단견이다. 동서고금을 통틀어 자강에 실패한 채 외세에만 기대어 국권을 유지한 나라는 없었다. 하긴 삼전도에서 청나라에 무릎을 꿇었던 조선 인조도 "나라는 스스로 기운 뒤에야, 외적이 와 무너뜨린다"고 한탄하지 않았나.
kby777@fnnews.com 구본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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