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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로 망가졌던 내 인생 닮지 않기를… 딸은 현명하게 이겨냈다 [Guideposts]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1.11.23 16:56

수정 2021.11.23 17:14

알코올의존증 극복한 캐럴 웨이스
알코올중독 치유 프로그램을 통해 다행히 금주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술을 마시면서 딸에게 미쳤을지도 모를 해악이 걱정됐다
"엄마의 절박함에서 깨달았어요"
딸은 자신의 삶을 구할 선택을 했다
알코올의존증에 시달리던 캐럴 웨이스(왼쪽)는 '익명의 알코올중독자 협회' 치유 프로그램을 통해 금주(禁酒)에 성공했다. 그의 딸 매기는 "엄마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어떻게 금주하는지 지켜보며 자랐기 때문에 술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었다"면서 "금주에는 많은 기적과 삶에 대한 절박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알코올의존증에 시달리던 캐럴 웨이스(왼쪽)는 '익명의 알코올중독자 협회' 치유 프로그램을 통해 금주(禁酒)에 성공했다. 그의 딸 매기는 "엄마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어떻게 금주하는지 지켜보며 자랐기 때문에 술의 유혹을 이겨낼 수 있었다"면서 "금주에는 많은 기적과 삶에 대한 절박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뱃속을 조이는 느낌이 점점 더 심해졌다. 10대 딸 매기를 친구 집에 데려다주는 중이었다. 고등학교 반 친구 몇 명에 연극 동아리 아이들과 하룻밤 보내는 거였는데, 여자애들도 있었고 남자애들도 있었다. 걱정스러웠다. 필요 이상으로 그랬던 거 같다.
딸을 믿었다. 내 경험에서 딸이 교훈을 얻었기를 바랐다. 하지만 딸이 몸을 돌려서 손을 흔드는데 이렇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얘야, 기억하렴. 술은 안 돼."

"엄마, 몇 번이나 얘기해야 해요? 내 친구들이랑 나는 안 마신다고요!"

대답하는 딸은 짜증이 나 있었다.

딸을 믿고 싶었다. 매기는 열여섯 살이었다. 내가 진짜 술을 처음 마신 바로 그 나이였다. 나의 부모님은 둘 다 하루도 빠짐없이 술을 마셨는데 결혼 생활에 문제를 일으키고 가족에게 끊임없는 공포를 심어주기에 충분할 정도였다. 알코올중독 부모는 대개 두 종류의 자식을 키운다. 금주가 아니면 문제투성이 술꾼. 나는 후자였다. 매기도 그럴까봐 속을 태웠다.

대학교 때 나는 심각한 파티꾼이 되어 대규모 맥주 파티에 드나들며 술을 엄청나게 마셨다. 그러고는 취한 상태로 운전해서 귀가했다. 게다가 술을 마시면 운전을 더 잘한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모든 것'을 더 잘한다고 생각했다. 술은 내가 정말 갖고 싶어 했던 자신감을 주었다. 적어도 잠깐은 공포를 떨쳐냈다. 20대는 훨씬 더 끔찍했다. 내가 벌이는 일에 마약까지 보탰다. 나 자신에게 하는 짓이 점점 더 염려스러웠다. 그렇지만 멈추고 싶지는 않았다.

그렇게 통제 불능한 몇 년을 보내는 사이에 매기의 아빠를 만났는데 그도 나만큼 술을 마셨다. 필라델피아에서 요리사로 일하는 날 보러 그가 처음 왔을 때, 내게 알코올 의존증이 있는 것 같다고 털어놓았다.

"날 믿어. 나는 알코올중독자들이 어떻게 생겼는지 알아. 그런데 당신은 그렇지 않아."

그와 함께 살겠다고 매사추세츠주로 이사했다. 당시 나는 서른다섯 살이었고 우리는 결혼했다. 그즈음엔 매일 술을 마셨다. 나 자신과 약속하기 시작했지만, 약속은 점점 더 지키기 어려워 보였다.

그러다가 임신했다. 9개월 내내 술을 마시지 않고 버틸 수 있으리라 확신했다. 하지만 틀렸다.

매기의 유아기까지 끈질기게 술을 마셨다. 어느 밤에는 다섯 살 매기와 단둘이 집에 있었는데 와인을 너무 많이 마시는 바람에 침대 옆 마루에 토해놓고 기절했다. 머릿속에서 울리는 수치심의 목소리를 따라 일어났다. 음주로도 잠재울 수 없는 소리였다.

두 달 후, 마흔두 살에 결국 항복했다. '익명의 알코올중독자 협회(AA)'에 가서 치료를 시작했다. 한 번에 하루씩 술을 마시지 않았다. 여전히 술을 마시던 남편은 내가 금주하고 넉 달 후에 집을 나갔다. 갑자기 혼자 딸을 키우며 금주 초기에 대처하게 됐다. 때로는 내가 손쓸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고 느꼈다. AA 모임의 지지 덕분에 계속 앞으로 나갈 수 있었다.

학교 방학 기간이나 도우미를 찾지 못했을 땐 매기를 모임에 데려갈 수밖에 없었다. 딸의 크레용, 색칠 놀이책, 간식을 챙겼다. 내가 속한 홈 그룹(서로 도움이 되고 우정을 나누는 AA의 치료 그룹)은 무대가 딸린 교회의 큰 강당에서 모였다. 매기는 무대에 올라 작은 침낭을 펴고 그 안에 들어갔다. 딸이 같이 있으니 내게 관심이 집중되었다. 하지만 아이가 그런 환경에서 시간을 보내는 게 심란했다. 이것이 옳은 선택이기를 하나님께 기도드렸다.

회복기에 있는 여느 알코올중독 부모와 마찬가지로, 내가 술을 마시면서 아이에게 미쳤을지도 모를 해악이 걱정됐다.

매기가 열 살 때 한번은 우리 모녀만을 위해 케이프 코드에 있는 오두막집을 며칠 빌렸다. 식료품을 한 보따리 샀는데 와인처럼 보이지만 실상 와인은 아닌 병이 하나 껴 있었다. 매기는 그 병을 보자 기겁했다. 울면서 밖으로 뛰쳐나가서는 뒷마당에 있는 나무 뒤에 숨었는데, 내가 배수구에 병의 내용물을 다 따라 버리고 술이 아님을 확인시켜 줄 때까지 그랬다. 나는 내 팔쪽으로 아이를 당겨 한참 동안 꼭 끌어안았다.

내가 음주를 시작한 나이, 즉 매기가 고등학교에 갈 때가 되자 거의 병적으로 염려하기 시작했다. 악순환이 계속될 거고, 또래 집단의 압력과 다른 10대 아이들처럼 친구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할 딸의 마음이 걱정됐다. 파티 다음 날 친구 집에 매기를 데리러 갈 때쯤에는 안절부절하지 못했다. 딸이 술을 마셨으면 어쩌지? 내가 물어보면 진실을 말해 줄까?

집으로 오다가 맥도날드에 들렀다. 우리는 칸막이 자리에 앉았다.

"엄마, 날 힘들게 하는 일이 있어요. 아마 엄마도 좋아하지 않을 거예요."

파티에서 음주가 있었고 친구 몇 명은 마약까지 해 봤다고 했다.

"어젯밤 술이 든 무언가를 마셔 봤어요. 하지만 그게 뭔지 알았을 때 내버렸어요."

숨을 내쉬고, 깊은 감사 기도를 올렸다.

"말해 줘서 고맙구나."

"첫 모금을 마시고 나서, 엄마가 데려갔던 모든 모임과 엄마와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금주하는지 지켜보면서 자랐던 걸 떠올렸어요. 엄마가 무엇을 헤쳐나가야 했는지도 생각했고요. 덕분에 내가 삶에서 무엇을 원하고 무엇을 원하지 않는지 깨달았죠."

매기는 테이블을 가로질러 손을 뻗어서 내 손을 잡았다.


"그래서 고마워요, 엄마."

금주(禁酒)에는 많은 기적이 있다. 어떤 기적들은 내게도 일어났다.
하지만 내가 필요에 의해 절박함으로 했던 일 덕분에 딸이 자기 삶을 구할 선택을 했다는 사실을 듣는 것처럼 의미심장한 건 없었다.

글·사진=가이드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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