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전쟁 직후인 1953년, 우리나라의 1인당 국민소득은 76달러에 불과한 세계 최빈국이었다. 이후 우리나라는 세계가 놀랄 정도로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뤄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안전, 건강복지, 사회적 약자 배려, 양질의 일자리, 상생협력 등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던 것은 사실이다.
이런 문제들이 우리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우리보다 앞서 경제성장을 실현한 나라도 마찬가지였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선진국에서는 정부와 공공기관이 적극 나섰다. 대표적으로 유럽연합(EU)은 2010년 공공의 사회책임 조달을 명문화했고, 영국은 2012년 사회적가치법(공공기관의 사회적 가치 실현에 관한 기본법안)을 제정해 공공기관의 핵심 운영원리를 사회적 가치 실현에 뒀다. 우리나라도 정부와 공공기관이 사회적 책무를 수행해야 하는 시대적 흐름에 예외일 수 없었다. 21대 국회 출범과 함께 제출한 1호 법안이 사회적가치법이었던 점에서 알 수 있듯이 공공기관의 사회적 책무에 대한 중요성은 갈수록 증가하고 있다.
그간 산업기술 연구개발(R&D)사업의 경우도 논문, 특허, 매출과 같은 기술의 우수성과 가시적인 경제성과에 중점을 뒀다. 하지만 시대적 소명에 따라 사회적 가치 실현을 위해 R&D 평가의 틀이 변화하고 있다. 우선 신규 R&D 기술개발 과제를 발굴하는 기획 단계에서 고용창출 효과 분석을 강화했다. 사회문제 중 하나인 실업률을 개선하기 위해서다. 또 사회안전망 확충을 위해 국민안전과 보건복지에 관한 과제를 발굴하는 등 사회적 가치 R&D 투자도 확대하고 있다.
사회적 가치 창출계획을 평가항목으로 반영하고, 사회적 경제기업에 대한 R&D 참여도 활성화하고 있다. 과제 종료 후 성과활용평가 단계에서는 사회적 가치 우수기업을 선정하고 있다. 경제적 파급효과가 떨어진다고 외면하는 것이 아니라, 국민안전과 생활개선에 중점을 둔 사회적 가치가 높은 제품이라면 실제로 활용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대표적 사례로 지난해 조달청에서 혁신제품으로 선정된 '소음중화시스템'의 경우 일상 속 소음을 사람이 인식하지 못하도록 주파수를 제어해 소음 환경 개선에 활용되고 있다.
눈부시게 기술이 발전했지만 우리 주변에는 평범한 일상이 너무 어려운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한다. 큰돈이 되는 것은 아닐지 모르지만 환경과 안전, 복지에 시급한 기술들이 산업기술 R&D로 착착 진행되고 있다.
휠체어에 의지했던 사람이 기술을 통해 두 발로 걷는 기적을 일군 것처럼, 일상의 가치를 높이는 R&D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기술에 사회적 가치를 더하다 보면, 어느 순간 우리 국격(國格)이 '선진국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정양호 한국산업기술평가관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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