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르포
日 YL히바리가오카 칼리지의 사회적응 실습현장
서점·식당 등 직업 연계 프로그램 운영
책 정리 등 업무 맡으며 세상 나갈 준비
오치 대표 "그들이 섬세한 능력 끌어내
취직하고 일상 살아가도록 하는게 목표"
日 YL히바리가오카 칼리지의 사회적응 실습현장
서점·식당 등 직업 연계 프로그램 운영
책 정리 등 업무 맡으며 세상 나갈 준비
오치 대표 "그들이 섬세한 능력 끌어내
취직하고 일상 살아가도록 하는게 목표"
【파이낸셜뉴스 도쿄=조은효 특파원】 "언제 가장 보람을 느끼냐고요? 단골 손님들이 저를 찾아 올 때요."
지난 13일 오후 일본 도쿄도(都)내 니시도쿄시의 한 서점. 오후 햇살이 길게 들어오는 이곳의 다른 한쪽은 수제 인형을 만드는 공방이기도 하며, 또 다른 쪽은 헌옷 등을 파는 잡화점이기도 하다. 인형들은 일본 도쿄 내 대형백화점과 도쿄도청 등에서 실제 판매되고 있다.
서점이기도 하며 공방, 잡화점인 이곳은 은둔형 외톨이(히키코모리) 교육·지원 단체인 YL히바리가오카 칼리지가 사회 적응을 위해 직업 연계 프로그램으로 운영하는 곳이다. YL히바리가오카 칼리지는 이곳 외에도 이 지역에 6곳 정도의 식당, 서점 등을 운영하고 있다. 세상으로 나가기 위한 일종의 실습장인 셈이다.
현장 도착 당시, 이곳에서 일하고 있는 이도가와 료코씨(35)는 문밖까지 나와서 점포를 나가는 손님을 향해 정중히 인사를 하고 있었다. 그는 고교 졸업 후 약 10년간 히키코모리 상태로 지냈다고 한다. "단기간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지만, 인간관계가 수월하지 않아 활동할 수 있는 곳이 없었고, 집에 있는 시간이 길어져만 갔었죠." 상태는 계속해 악화됐었고, 가족과도 사이가 멀어졌다.
한국 취재진을 보자 그는 밝은 표정으로 대뜸 "감사합니다" "사랑해요" 라고 정확한 한국어 발음으로 반겨줬다. '한국어는 어디서 배웠느냐'고 물으니, 오래 전, 한국 남자와 결혼한 부친의 회사 동료가 집에 와서 알려줬다고 했다. 긴 세월 스스로에게 갇혀 누구보다도 혹독한 시간을 보냈음에도, 어깨너머로 배운 한국어를 정확히 기억해 내면서, 취재 분위기를 화기애애하게 이끌어줬다. 그가 YL히바리가오카 칼리지에 오게 된 것은 약 5년 전쯤이다. "스태프들과 커뮤니케이션을 하게 되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게 됐다"고 했다. "가장 보람있는 순간이 언제냐"고 물으니, "단골 손님들이 저를 찾아줄 때요"라고 했다. 지역 어르신들이 "저 친구 때문에 온다"고 호응해 줄 정도다.
이곳에서 그는 손님을 맞이한다든가, 기부 받은 옷들을 정리하는 등의 일을 담당하고 있다. 당사자의 프라이버시를 고려해 '사진을 찍어도 되느냐'고 물으니 "정면 사진도 좋다"며 밝게 웃었다. 촬영에 응하는 동안도 한국 취재진을 향해 "드라마 커피프린스의 공유를 좋아하고, 영화 어린신부를 보고 문근영과 김래원을 좋아한다"고 말해, 되레 대화의 연결고리를 적극 만들어줬다.
현장 한쪽 사무실에서는 사에키 카나씨(35)가 컴퓨터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사에키씨에게도 누구와도 소통하지 못했던 고통의 시간이 있었다. 고교 2학년이 되어선 등교 거부를 하게 되었고, 중퇴 후 히키코모리로 지냈다. 그러던 중 2016년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게 됐고, 더욱 더 자신만의 깊은 침묵 속에 빠져들었다. 집 안은 엉망이었고, 세상과의 끈은 보이지 않았다. 시청 직원의 소개로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YL히바리가오카 칼리지를 등록해 다니기 시작했다. 5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은, 단체가 주최하는 행사의 사진, 동영상을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 SNS에 올리고, 기부 받은 책들을 분류 하는 등의 업무를 맡으며, 본격 세상으로 나갈 채비를 거의 마쳤다. 지난해 4월부터 올해 3월까지 1년간 일본에서 등교 거부를 한 초·중·고교생은 약 19만명으로 역대 최대치를 기록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학생도 415명으로 사상 최다였다.
YL히바리가오카 칼리지는 현재 설립된 지 약 5년이 됐다. 단체는 사회복지 전문가인 오치 유코 대표가 이끌고 있다. 수입이 없는 경우 입회비와 수강료는 0엔이다. 히키코모리들에게 일종의 학교이자, 사랑방과 같은 공간이다. 프로그램은 월요일 오전 9시부터 토요일 오후 3시50분까지 빼곡하다. 토요일까지 강좌를 만든 이유를 물으니, "체력을 만들어주기 위해서"라고 했다. 장기 칩거생활로 체력이 극도로 저하된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당일 칼리지 건물 1층에는 관심분야 강의 시작을 기다리는 수강생들이 다수 모여 있었다. 취재진의 방문 소식을 전해들은 일부는 마주치는 게 부담스러운 지 얼른 자리를 뜨기도 했다. 오치 대표는 "계속 칩거하는 사람들에게 1년간은 방문해서 점점 밖으로 관심을 갖도록 유도하고, 그런 뒤 1~2년간은 요리든, 펜글씨든, 성경 강독이든, 점포 관리든, 컴퓨터든 당사자들이 요청한 내용으로 강의를 준비한다"고 설명했다. "당신이 만들어달라고 한 것이니 꼭 참가해 주세요"라고 다시 요청을 한다는 것이다. 의무감의 부여다. 그는 "우리 단체는 어디까지나 '통과 지점'의 한 곳이다. 그들이 갖고 있는 '섬세한 능력'들을 끌어내서 기업에 취직하고, 일상을 살아가도록 하는 게 우리들의 최종 목표"라고 강조했다. ehcho@fnnews.com
[인터뷰] "당장의 ‘취업과 자립’ 보다, 당사자에 귀기울이는 정책이 더 필요" [숨어버린 사람들 (12) 日 히키코모리 현주소]
'히키코모리 백서 2021' 발간한
하야시 교코 히키코모리 UX회의 대표
"마음의 안정 확보 못하고 취업한다면
또다른 실패로 히키코모리 못 벗어나
아픔 공유하는 신뢰 관계 만남이 중요"
20년 긴 터널 빠져 나온 경험으로 조언
아동 히키코모리부터 85세 노인 히키코모리까지 일본 각지에서 '스스로 히키코모리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조사에 참여했다. 일본 정부의 히키코모리 추계상 잘 잡히지 않는 일반 주부 히키코모리의 존재까지 이 조사를 통해 본격 드러냈다.
조사와 백서 발간은 전직 히키코모리들의 모임인 '히키코모리 UX회의'(일반 사단법인) 주도로 이뤄졌다. 히키코모리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토대로 대규모 현황 조사와 이를 통해 백서가 발간된 것은 일본 정부는 물론이고, 민간단체로서는 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백서 발간은 일본 내에서도 큰 이목을 끌었다.
하야시 대표는 "지금까지 20여년 일본 정부의 히키코모리 정책은 '취업과 자립'에 초점을 둬왔는데, 그에 앞서 히키코모리 당사자들이 마음 편히 안심할 수 있는 곳이 확보돼야 한다"고 밝혔다. "자존감은 산산조각난 상태인데, 마음의 안정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당장 취업에 성공한다고 해도 대부분 금방 그만둬버리게 된다"고 설명했다. 이는 히키코모리들에게 또 다른 실패를 의미한다. 더욱 나락으로 떨어지는 느낌을 주게 된다. 백서에서도 회복과 악화가 반복적으로 이뤄지면서 생애 장기간에 걸쳐 히키코모리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는 "당사자 모임 등에 나가서 '나만의 문제가 아니구나'라는 것을 깨닫는다거나, 신뢰할 수 있는 사람과의 만남이 우선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당신은 가치가 있는 사람이다' '당신의 말은 틀리지 않다'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말을 해줄 수 있는 곳"이란 얘기다.
하야시 대표의 얘기는 사실, 그 자신의 경험에 기반한 것이다. 그 역시 기나긴 세월 히키코모리였다. 부친은 대기업 보험회사에 근무했으며, 모친은 1970년대였던 당시 초등학생인 그에게 피아노 교습을 시켜 장차 음대에 보내겠다는 꿈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여느 중산층 가정의 장녀들과 마찬가지로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듯 그 역시 모범생이었고 학교에서도 도쿄대, 교토대 등 국립대에 보내고 싶어할 정도로 학업 성적도 우수했다.
하지만 불행은 예기치 못한 곳에서 찾아왔다. 1980년대 당시 일본의 학교 교칙은 매우 엄격했다. 폭력을 수반한 교사들의 강압적 지도 방식, 입시 위주의 교육 방식에 강한 거부감이 일어났고, 당시로서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몸 상태가 극도로 악화됐다. 고교 2학년 때부터는 학교에 더 이상 갈 수 없는 상태가 됐고, 결국 중퇴하고 말았다.
그의 저서 '히키코모리의 진실'에서는 당시의 심경에 대해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가능한 한 좋은 대학에 가고, 가능한 한 좋은 회사에 취직한다는 것이 너무나도 당연했고, 그 외의 미래는 꿈꾸지 않았던 내게 내게 고교 중퇴는 미래를 잃는 것과 같았다." 1980년 초반에는 '등교 거부'라는 말도 없었을 뿐더러 히키코모리라는 용어가 알려지기도 전이었다. 누구에게도 이해받기 어려웠다.
16살 고교 중퇴 후 36살이 될 때까지 상태는 호전과 악화를 반복했다. 그러던 중 5명의 히키코모리였던 친구를 잃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그들 중 일부는 취직에 성공한 후에 자살을 택했다. 20년간의 어두운 터널을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신뢰할 수 있는 사람들과의 만남' '같은 아픔을 겪는 사람들과의 만남'이었다고 했다. 그 뒤 "'그냥 단지 목숨이 다하는 그날까지 살아가자'라고 생각하게 됐다"고 했다. 백서를 발간하게 된 이유에 대해 물었다.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어떻게든 세상에 전달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최근 은둔형 외톨이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한국 사회에 조언을 해달라고 했다.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듣지 않으면 그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알 수 없다"고 했다. 지난 2019년 6월 네모토 다쿠미 일본 후생노동상은 당시 하야시 대표가 이끄는 히키코모리 UX회의와 KHJ전국 히키코모리 가족 연합회와 면담 후 '당사자 중심의 정책'과 이들이 '안심하고 지낼 수 있는 곳'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장관 명의의 성명을 발표했으며, 이것이 정책 당국 중심에서 당사자 중심으로 일본의 히키코모리 정책이 변화된 계기가 됐다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특별취재팀 김도우 팀장 이환주 이진혁 기자 조은효 특파원>
ehcho@fnnews.com 조은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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