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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친부 경근당과 옥첩당’ 등 관아건축 8건, 보물됐다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1.12.23 09:20

수정 2021.12.23 09:20

종친부 경근당과 옥첩당 /사진=문화재청
종친부 경근당과 옥첩당 /사진=문화재청

[파이낸셜뉴스] 조선 후기 중앙 관아건축물의 형태를 짐작할 수 있는 관아건축 8건이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됐다. 특히 읍치에 파견된 지방관의 집무 공관인 동헌이 처음 보물로 지정됐다.

문화재청은 서울시 유형문화재 ‘종친부 경근당과 옥첩당’,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대구 경상감영 선화당(宣化堂)’ 등 8건의 관아(官衙)건축 문화재를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했다.

이번에 지정되는 관아 문화재는 서울 1건, 대구 1건, 경기도 3건, 강원도 2건, 경남도 1건이며, 행정체제상으로는 중앙 관아가 1건, 지방 관아로 감영과 동헌 3건, 객사 2건이며, 남한산성의 병영 관아 2건이다. 현재 국보와 보물로 지정되어 있는 관아건축은 총 5건으로, 모두 객사 건물이다.


관아건축이란 왕조시대 관원들이 모여 나랏일을 다스리기 위해 지은 건축물로, 중앙집중의 행정체제가 마련된 조선 시대의 지방 행정도시에는 동헌을 중심으로 관아건축이 전국적으로 건립되어 그 수효가 상당했지만 현재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도시지역에 집중되어 있던 관아건축은 수차례의 전쟁으로 파괴됐고 근대도시로의 변화과정에서는 급격히 소멸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대구 경상감영 선화당 /사진=문화재청
대구 경상감영 선화당 /사진=문화재청

그나마 현존하는 관아의 대부분은 지방에 있고, 일제강점기 이후부터는 대부분의 지역에서 학교 등으로 전용되면서 상당 부분 변형되어 사용되었고 한성부에 있던 관아들은 현재 3개동만 남은 상황이다. 이렇게 남아있는 관아건축이 적다보니 그동안 다른 건축유형에 비해 연구와 관심이 일부 소홀했던 원인이 되기도 했다.

관아건축은 본래 관원이 나랏일을 보는 곳인 만큼 궁궐건축이나, 사찰건축과는 달리 화려하지 않으나, 비교적 높은 기단과 익공식 공포, 팔작지붕 등을 사용해 일반민가와 달리 단아하면서도 위엄 있게 지어졌다.

이번 관아건축 문화재의 보물 지정은 △조선 시대 중앙관아 건물 중 원위치에 보존되고 있는 종친부 건물이 지정돼 조선 후기 중앙 관아건축물의 형태를 짐작할 수 있다는 점, △지방관아 중 관찰사가 파견되어 근무하던 감영의 정당(正堂)인 선화당과 읍치에 파견된 지방관의 집무 공관인 동헌이 처음 보물로 지정됐다는 점, △전란 속 역사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였고 후대에까지 교훈의 공간으로서 역할 했던 남한산성 내의 병영 관아건물이 지정되었다는 점 등이 눈여겨 볼만하다.

남한산성 수어장대 /사진=문화재청
남한산성 수어장대 /사진=문화재청

‘종친부 경근당과 옥첩당’은 조선 시대 관공서 중 최고 등급인 정1품아문의 하나인 종친부 건물로, 관아건축이면서 궁궐건축의 격식을 갖춘 건물이다. 흥선대원군 집권 당시 왕권강화의 일환으로 종친부의 권한과 조직을 확대하면서 종친부 건물이 대규모로 늘어날 당시 중건(1866)됐다.

경근당과 옥첩당은 고종대 302칸에 달했던 종친부 건축군의 중심 전각으로서 19세기 중앙 관아 건축의 배치와 구성, 연결방식을 잘 보존하고 있는 사례로 역사적 가치가 높다. 또한, 1981년 경근당과 옥첩당은 다른 곳으로 이전되었다가 2013년 다시 원위치로 이전되었지만, 당초의 모습을 최대한 유지하며 많은 부재를 재사용했다는 점이 건축물의 진정성을 입증하는 충분한 근거가 되었다.

‘대구 경상감영 선화당’은 조선시대 지방관아 중 최상위 관직자였던 종2품 관찰사가 파견된 감영(監營) 중 경상도 감영의 정당(正堂)으로, 1807년에 중건된 이후 몇 차례의 수리를 거치면서 다소 규모의 변화가 보이나 대체로 건립 당시의 건축형태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남한산성 연무관 /사진=문화재청
남한산성 연무관 /사진=문화재청

‘남한산성 수어장대’는 남한산성 서쪽의 청량산 정상에 성의 안팎을 모두 굽어 볼 수 있는 군사적 요충에 위치하며, 남한산성의 축조 때부터 성내를 지휘하는 장대 역할을 하고 있었다. 1751년(영조 27년) 중층의 장대를 건축하고, 안에는 무망루, 밖에는 서장대라 편액하였고 현재의 건물은 1836년(헌종 1년) 개건된 것이며, 이 때 지금의 ‘수어장대’란 현판을 써서 달았다.

‘남한산성 연무관’은 남한산성을 수축(修築)하던 시기인 1625년(인조 3년)에 창건되어, 그 직후 1626년에 창설된 중앙 군영인 수어청의 중심 건물로, 1795년(정조 19년) 수어청의 본영이자 광주유수의 집무처로 사용됐다. 창건 이래 세 번에 걸친 중수의 기록을 상량묵서와 상량문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으며, 편액에 있는 연기(年紀)는 1762년(영조 38년)의 것이다.

안성 객사 정청 /사진=문화재청
안성 객사 정청 /사진=문화재청

‘안성 객사 정청’은 안성 객사 내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를 모시고 대궐을 향해 망궐례를 행하는 공간으로, 많은 축소와 변형을 겪은 동·서 익헌 건물을 제외한 정청(正廳)만 보물로 지정된다. 안성 객사는 1363년(공민왕 12년) 이전에 건립된 이후 조선 후기에 지붕기와를 바꿨고, 근대기인 1931년, 1995년 2차에 걸쳐 이건했다.

‘강릉 칠사당’은 강릉대도호부 관아 구역 내에 있으며, 조선 시대 지방 수령의 집무처로 사용되어 온 건물로, 칠사당이라는 명칭은 조선시대 수령의 주요 업무가 칠사(七事)로 규정됐던 데서 연유하여 명명한 것으로 보인다. 칠사란 농사, 호구, 교육, 병무, 세금, 재판, 풍속을 말한다.

거제 기성관 /사진=문화재청
거제 기성관 /사진=문화재청

‘원주 강원감영 선화당’은 조선 시대 강원도 감영의 정당(正堂)으로서 중앙에서 파견된 관찰사가 정무를 보던 공간이다.
특히, 강원감영 선화당은 정문인 포정문도 원형으로 남아있어 조선 시대 감영의 구성 중 핵심적인 공간인 진입공간의 위계를 보존하고 있는 유일한 감영이다.

‘거제 기성관’은 거제현과 거제도호부의 객관으로서 1665년(현종 6년) 창건 이래, 1726년(영조 2년), 1801년(순조 1년), 1892년(고종 29년)의 중수를 거쳐 1909년경까지 기능을 유지했다.
1974년의 해체수리 시에 종도리 아래에서 창건 시의 상량묵서와 함께, 3건의 상량문이 발견됐다.

yccho@fnnews.com 조용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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