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다 그런 거에요. 마대에서부터 뒤에서 낸 이 물감들이, 마대의 형태에 따라서 이상한 형태, 꼬부라진 형태도 나오고, 좀 굵은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고, 가는 것도 있고, 굵은 것도 있고, 뭐 여러 가지 형태가 나오는데 사람의 얼굴도 똑같은 얼굴이 없잖아요. 자기가 자기의 얼굴을 가지고 나오는 거예요."
참호의 모래 주머니로 쓰이던 올이 굵은 마포(麻布) 뒷면에 물감을 두텁게 바르고 밀어넣는다. 배고픔과 전쟁을 상징하는 이 마포 캔버스에 물감이 밀착되다 못해 서로 엉킨다. 거친 마포를 비집고 나온 물감을 쓸어내리며 또 다른 궤적을 만들어냈다. 화면을 물감으로 칠하거나 덮는 행위로서 '회화'의 개념에서 한발 더 앞서 나가 배압법(背押法)으로 수십년간 수행하듯 작품을 만들어 낸 이는 '단색화의 선구자'라 불리는 하종현(87)이다.
1935년 경남 산청에서 태어나 미수의 나이가 된 그는 60갑자의 화업 인생 동안 늘 '회화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 화두를 머리에 담고 유화 작업을 해왔다.
장구한 세월 동안 그가 만들어낸 '접합(Conjunction)' 시리즈는 그 화두의 결과물이다. 지난 15일부터 서울 삼청동 국제갤러리 전관에서 진행중인 그의 개인전 'Ha Chong-Hyun(하종현)'은 그가 지금껏 꾸준히 진행해온 회화적 실험의 결과물을 망라하고 있다.
그의 작품 세계를 연대기적으로 살펴보자면 197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의 대표 연작 시리즈 '접합' 작업이 시작된 시기다. 하종현은 마포 캔버스의 뒷면에 물감을 바르고 천의 앞면으로 물감을 밀어넣는 '배압법'으로 노동집약적이고 독창적인 기법을 구축했다.
하종현 '접합 21-38'(2021년) / 국제갤러리 제공
이후 '접합'의 방식과 형태를 고수하되 색에 대한 동시대적 고민이 반영된 다채색의 '접합' 작업에 돌입하는데 최근까지 이를 진화시켜왔다. 지난해 작업한 신작 '접합 21-38'을 통해서는 캔버스 뒷면에서 만들어진 작가의 붓 터치와 함께 흰색이 섞인 청색의 그라데이션이 강조됐다. 기존 '접합' 연작에서 기왓장이나 백자를 연상시키는 한국적인 색상이 주로 사용됐다면 다채색의 '접합' 신작에서는 일상적인 밝은 색상이 도입돼 보다 현대적인 느낌을 준다. 하종현은 "다채색을 활용하는 시도를 통해 오랜 시간 내 작업을 정의내린 단색화라는 틀을 넘어 시대의 흐름을 담아내고자 했다"고 밝혔다.
하종현 '이후 접합 11-3'(2011년) / 국제갤러리 제공
'접합'에서 시작돼 또 다른 방향으로 뻗어내린 가지는 '이후 접합(Post-Conjunction)' 시리즈다. 이 연작은 기존 '접합' 연작의 주요 방법론이었던 배압법을 응용해 색과 형태뿐 아니라 화면을 대하는 태도와 방식 자체를 재해석하고 탐구한 작업이다. 기존의 '접합' 시리즈가 평면의 마대 캔버스에 물감의 질감을 더했다면 '이후 접합' 시리즈에서 하종현은 나무 합판조각을 사용해 조각적 요소를 더했다. 일정 크기의 얇은 직선 형태로 잘린 개별의 나무 조각을 일일이 먹이나 물감을 칠한 캔버스 천으로 감싼 뒤 화면에 순차적으로 나열했는데 캔버스 틀에 하나의 나무조각을 배치하고 가장자리에 유화물감을 약간 짠 다음 또 다른 나무조각을 붙여놓는 과정에서 물감이 눌리며 그 흔적이 나란히 배열된 나무조각 사이로 스며나온 모습을 포착했다. 이렇게 전반적인 회화의 화면을 구성한 후 때에 따라 스크래치를 더해 역동성을 주고 때론 그 위에 유화물감을 덧칠해 리듬감과 율동감을 살리기도 했다.
이번 전시에서는 1970년대부터 시작해 수십년간 이어 온 '접합'의 연작과 여기서 비롯된 다채색의 '접합', 또 2009년부터 2013년까지 작업해왔던 '이후 접합'을 비롯해 최근 1~2년 새 다시 시도한 '이후 접합' 시리즈까지 모두 전시장에서 만나볼 수 있다.
작품의 배치는 역순이다. 전시장 초입에서 그가 지난해까지 작업한 최근작을 살펴보고 2관과 3관을 향하며 말미에서 그의 초기작을 살펴볼 수 있다.
그의 작품을 처음으로 접한다면 동선을 바꿔 시간순으로 탐구해 볼 수도 있다. 전시는 다음달 13일까지 한달동안만 진행된다.
역동적이고 실험적인 '하종현 월드'를 들여다보고 싶다면 발걸음을 빨리 옮겨야 한다.
jhpark@fnnews.com 박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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