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 정치일반

[시선의 확장] 재일조선인 옆의 일본인

뉴스1

입력 2022.02.26 08:00

수정 2022.02.26 08:00

일본 조선학교의 일본인 체육교사 후지시로 코치. (출처=2006년 영화 '우리학교' 촬영 장면) © News1
일본 조선학교의 일본인 체육교사 후지시로 코치. (출처=2006년 영화 '우리학교' 촬영 장면) © News1


왼쪽 사진은 1인 도보행진 때 히로시마 평화공원의 한국인 위령비에서 하세가와 대표의 모습. 오른쪽 사진은 고교무상화 재판 현장에서 분노하는 하세가와 대표의 모습. (출처=하세가와 대표의 저서 '조선학교를 걷다'(왼쪽)와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사람들 몽당연필(오른쪽))© News1
왼쪽 사진은 1인 도보행진 때 히로시마 평화공원의 한국인 위령비에서 하세가와 대표의 모습. 오른쪽 사진은 고교무상화 재판 현장에서 분노하는 하세가와 대표의 모습. (출처=하세가와 대표의 저서 '조선학교를 걷다'(왼쪽)와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사람들 몽당연필(오른쪽))© News1


카지이 노보루의 경험을 적은 저서 '도립조선인학교의 일본인교사'(1950~1955) (출처=이와나미서점.) © News1
카지이 노보루의 경험을 적은 저서 '도립조선인학교의 일본인교사'(1950~1955) (출처=이와나미서점.) © News1


김명준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사람들 몽당연필 사무총장/영화 감독.© 뉴스1
김명준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사람들 몽당연필 사무총장/영화 감독.© 뉴스1


[편집자주][시선의 확장]은 흔히 '북한 업계'에서 잘 다루지 않는 북한 이야기를 전달하는 코너입니다. 각 분야 전문가들이 그간 주목 받지 못한 북한의 과학, 건축, 산업 디자인 관련 흥미로운 관점을 독자들에게 소개합니다.

(서울=뉴스1) 김명준 조선학교와 함께하는 사람들 몽당연필 사무총장/영화 <우리학교> 감독 = 일본의 유명 서점에 가면 베스트셀러 코너라든가 이달의 신간 코너에 '혐한' 정서를 담은 책들이 가득하다. 그만큼 혐한, 혐조선이 국민들 사이에 팽배한 것일까? 서점에 전시된 책만으로 평가하기에는 성급하지만 최근 10~15년 들어 이 경향이 강해진 건 부정할 수 없다. 한때는 주말마다 한류 거리인 신오쿠보에 혐한 시위가 정기적으로 열렸고 조선학교는 협박 전화와 혐오 시위 주동자들 때문에 스쿨버스에 붙어 있는 학교 이름조차 테이프로 가려야 했다.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일본 정부는 시중 은행에 지침을 내려 조선학교나 총련(재일조선인총연합) 소유 은행 계좌에 드나드는 자금을 철저히 조사한다. 조선학교에 기부라도 할라치면 은행에서 연락이 와 꼬치꼬치 캐묻는 탓에 자존심을 다칠 뿐 아니라 재차 기부할 용기까지 빼앗긴다. 몇 년 전에는 문부과학성이 지자체에 조선학교에 교육보조금을 중단할 것을 권고하기까지 했다.

이런 전방위적 압력과 차별 속에서도 그나마 숨통을 트이게 하는 사람들이 있다. 같은 일본 사람이면서도 다른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오늘은 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다.

2002년 가을, 처음 홋카이도 삿포로 시에 위치한 '홋카이도 조선초중고급학교’를 찾았을 때 다른 조선학교에는 없는 풍경에 놀랐다. 일본인이 조선학교에서 체육 교사를 하고 있었다.

조선학교는 학생 수 감소, 열악한 재정 탓에 음악, 미술, 체육 등의 과목에 계약직 외부 교사를 채용하는 경우가 있다. 그래서 영어 회화 선생님 중에는 미국인도, 영국인도 있다. 그래도 일본인이 채용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자식이 미국 사람이나 프랑스 사람과 결혼해도 아무 말 하지 않는 동포 어르신이 일본 사람과 결혼한다면 끝내 허락하지 않는 것과 같은 이치일지 모른다. 일제 강점기의 기억이 만든 터부일 것이다.

후지시로 선생님에게는 원칙이 있었다. 학교에 들어서는 순간부터는 '우리말'을 쓸 것. 그의 입장에선 그 '우리말'이 '일본말'일 것인데 우리말로 발음하는 그의 '우리말'은 '조선말'이었다. 나보다 몇 살 어린 후지시로가 나에게 "형님, 일본말로 000을 우리말로 어떻게 말합니까?"라고 물어올 때 대답을 해주고 돌아서서 깜짝 놀랄 때도 있었다. 후지시로는 수업을 당연히 '우리말'로 한다. 조선학교 선생님이니까 당연하다는 것이 후지시로의 원칙이다.

후지시로는 도쿄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축구로 장래를 설계했다. 가끔 옆 학교인 도쿄조선중고급학교 축구부와 연습 시합을 할 때가 있었다. 실력이 대단한 친구들이라 공식 체육대회에서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공식 체육대회에서 그들을 볼 수는 없었다. 의아했지만 조선학교에 대한 인상은 그게 다였다.

졸업 후 축구 지도자 양성 학교를 다니던 그는 홋카이도 조선학교 출신의 재일조선인과 친구가 되었다. 그의 모교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단기 코스로 조선학교 축구부 학생들을 지도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일주일 남짓한 그 시간 동안 아이들에게 반해버렸다. 후지시로의 인성에 학생들, 학부모들이 또 반했다. 학교에 상주하는 축구 코치가 없었기에 학부모들의 요구를 받아 교장이 축구 코치로 영입했다. 이후 체육 수업까지 하면서 10년을 넘게 조선학교 속에서 지냈다.

그를 만난 것은 2011년 동일본 대지진이 났을 때였다. 막 몽당연필이라는 시민단체를 만들고 활동하던 무렵이었다. 그쪽에서 먼저 연락이 왔다. 일본에서 1년 전에 고등학교 무상화 정책이 실시 되었는데 조선학교만 대상에서 제외되었고, 자신들은 이 부당한 차별을 없애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연대의 손길을 내밀었다. 구호 기금을 모아 일본을 방문했을 때 약 10여 명의 그들을 만났다. 거기서 함께 성명문을 만들고 그걸 한국에 돌아와 일본 대사관에 전했다. '고교무상화에서 조선학교 제외를 반대하는 연락회'(약칭 고교무상화 연락회)라는 이름의 단체였다. 그 대표가 하세가와 선생이었다. 일본 초등학교를 정년퇴직한 전 교사 출신이다.

내가 만난 일본 사람들 중에 조선학교와 재일조선인의 편에 서서 싸우는 일본 사람들은 대체로 60~70대였다. 70~80년대 일본에서 유행했던 풀뿌리 민주주의 시대에 청춘을 보낸 사람들이다. 베트남 전쟁에 반대하던 반전 운동 세력이자 공동체, 다양성을 추구하던 세대였다. 하세가와 선생도 그 시절 청춘을 보냈다.

그와 조선학교의 인연은 도쿄 어느 지역의 작은 조선학교에서 시작되었다. 현역 교사 시절 교류 프로그램으로 방문했던 그 학교의 매력에 빠져 버렸다고 한다. 그저 교류 차원의 만남이 조선학교가 무상화 문제로 어려움에 부딪히자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기 위한 투쟁으로 발전했다고 한다.

조선학교 고급부 학생들이 원고로 나선 '고교무상화 재판'이 다섯 개 지역에서 시작되어 1심 판결을 앞두고 있던 2017년 여름이었다. 그때부터 하세가와는 걷기 시작했다. 이미 70대가 넘은 하세가와 선생은 '조선학교에 무상화 적용하라'는 큰 깃발을 어깨에 걸고 후쿠오카에서 홋카이도까지 걸었다. 여름이 시작되는 6월 20일부터 한겨울인 12월 22일까지, 1100킬로미터, 156만 보의 여행이었다.

그는 조선학교를 향해 걸었다. 걸어서 어느 조선학교를 방문하고 거기서 하룻밤을 자고 나면 다시 걸어서 다음 조선학교를 향해 갔다. 그렇게 67개의 조선학교를 모두 방문했다. 걷는 동안 그의 모습을 발견한 일본 사람들이 때로는 욕을 하고 때로는 응원을 했다. 길에서 있었던 일, 학교에 도착해 아이들과 선생님들의 따뜻한 환영을 받으며 느꼈던 감동을 SNS로 전했다. 패소 판결 선고가 있었던 현장에, 길에서의 모습 그대로 메가폰을 들고 재판정을 향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억울함이 절망으로 변한 동포들에게 그의 분노에 찬 고함 소리는 다시 일어설 용기를 싹 틔워 주었다. 그는 조선학교의 문제가 재일조선인의 민족교육 문제만이 아니라고 한다. 무너질 대로 무너진 일본의 양심을 세우는 일이라고 한다. 자신의 문제라고 한다.

이 외에도 내가 만난 일본인 친구들이 무수하다. 조선 학생들이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걸 때 한가운데에 있던 인권 변호사들이 그랬고, 아이들의 인권이 짓밟히는 현실을 참지 못해 나선 일본 어머니들이 그랬고, 일본의 전쟁 범죄를 용서할 수 없는 일본 여성들이 그랬다. 스쿨존이 없는 학교가 있을 수 있냐며 조선사람 대신 교육청에 찾아가 항의하던 일본 노인이 있었다. 학자가 있고 학생이 있다. 오사카, 히로시마, 야마구치, 아이치 등 전국 어디나 조선학교가 있는 곳이라면 예외 없이 그런 일본 사람이 있다. 이들은 혐오주의자들이 거리에서 욕설을 남발할 때 그들을 둘러싸고 그 증오의 목소리가 일반 시민들에게 닿지 않도록 더 큰 목소리로 평화를 외치는 사람들이다.

70년 전에도 그런 일본인들은 있었다.

1949년 조선학교가 폐쇄되었을 때 도쿄조선인학교(현 도쿄조선중고급학교)는 '도립조선인학교'가 되었다. 조선인 학생은 그대로 둔 채 일본 교과서, 일본인 교사로 바꾸고 일본국이 지정하는 교육을 했다. 학생과 학부모의 저항이 있었고 도립조선인학교 시절이 끝난 55년까지 6년 동안 바람 잘 날이 없었다. 그 시절 높은 월급 때문에 이 학교에 자원했던 일본인 교사 카이지 노보루가 있었다. 그 일이 카지이 선생의 삶을 바꾸어 버렸다. 무엇보다 조선 학생들의 민족교육에 대한 열정이 그를 이끌었고 일제 강점기에 대한 죄의식이 저변에 있었다. 이후 재일조선인의 인권, 교육권을 위해 평생을 바쳤다.

많은 사람들이 혐오주의자와 가혹한 차별을 하는 정부에 둘러싸여 신음하는 재일조선인들을 걱정한다. 70여 년이 넘는 세월을 남의 나라, 그것도 식민지 종주국에서 민족교육을 지켜낸 그들을 이제는 올 곳이 역사에 새겨야 한다고 외친다. 이 새김에 한 문장을 더 넣어야 한다고 나는 주장한다. 재일조선인의 어깨를 걸고 함께 그 길을 걸었던 수많은 일본인들 역시 이 역사의 한 페이지에 새겨 넣어야 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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