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 지금이야 연륙도가 됐지만 대부도는 시화방조제가 들어서기 전만 해도 염전이 많은 조용한 섬이었다.
특히 염전은 송신만에 많았다.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쌀보다 소금이 흔하고 소금만큼 바지락도 흔했다. 대부도에서는 다 같이 푸짐하게먹을 수 있도록 음식을 마련했다. 특히 커다란 솥에 끓이는 칼국수가 일품이었다.
여기에 지척에 널린 바지락을 함께 넣어 먹었다. 이것이 대부도가 육지와 연결되면서 외지인들에게 입소문으로 퍼져나가면서 유명해졌다. 오늘날에는 바지락 칼국수거리까지도 만들어졌다.
지금이야 밀가루가 흔하고 저렴하지만 예전에는 밀가루 음식이 매우 귀했다. 조선 후기, 대부도에는 이름난 효자가 있었다. 부친이 별세하자 그는 꼬박 3년의 시묘살이를 했다고 한다.
시묘살이를 하는 동안 그는 간신히 생명만 이을 정도만 곡기를 취했는데 그의 뛰어난 초행은 마침내 조정에까지 알려지면서 효자문과 밀가루를 상으로 받았다.
집안 형편이 좋지 못했던 그는 조정에서 받은 밀을 적게 사용하면서도 풍미는 충분히 즐기고, 온가족이 배불리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국수를 생각했다.
이후 그는 홀로 남은 어머니의 장수를 빌며 밀로 만든 국수와 영양이 풍부한 바지락을 함께 끓여 자주 드시게 했고, 그 정성 탓에 어머니는 오랫동안 장수했다고 전해진다.
대부도 바지락칼국수는 대야만한 그릇에 몇 인분씩 한꺼번에 담겨져 나오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렇게 나온 바지락칼국수는 각자 자기 양만큼 국자로 퍼서 먹는데, 이런 방식은 대부도가 처음이라고 한다.
당일에 깐 바지락을 푹푹 떠서 넣고 살짝 천일염으로 간을 해 통째로 넓은 그릇에 떠 놓고 밀 냄새를 얼굴 한 가득 쐬어가며 여러 사람이 함께 먹는다. 세월이 지나면서 대부도 바지락칼국수가 서로 덜어주며 국물까지 나눠 먹는 칼국수 문화를 만들어냈다.
대부도는 오이도와 시화방조제로 연결되어 있어 자동차로 통행이 가능하다. 하루 두 번 바닷물이 빠지면 맛조개, 소라, 동죽, 고둥 등을 직접 잡아 볼 수 있는 체험 여행지로도 이름이 높다. 탄도, 불도, 선감도, 육도 등 6개의 형제섬과 어우러지면서 낙조 때면 장관을 이룬다.
yccho@fnnews.com 조용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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