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서방이 제재하면 러시아가 보복하는 악순환 조짐이 보인다
·원유·가스 등 원자재 초강국에 대한 제재는 부작용이 크다
·일부 전문가는 우크라 중립지대화를 해법으로 제시한다
[파이낸셜뉴스] 우크라이나 사태가 보복의 악순환 수렁에 빠졌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8일(현지시간) 러시아산 석유·천연가스·석탄 수입을 금지했다. 지금까지 꺼낸 제재안 가운데 가장 세다. 러시아는 연간 예산의 40% 이상이 석유·가스 수출에서 나온다. 이걸 죄면 우크라이나 전비 조달에 차질이 빚어진다.
러시아는 즉각 반격에 나섰다. 알렉산데르 노박 에너지 담당 부총리는 국제유가가 배럴당 300달러에 이를 수 있다고 경고했다. 허풍이 아니다. 러시아는 미국·사우디아라비아와 함께 세계 3대 원유 생산국이다. 수출은 가장 많이 한다. 미국 투자은행 JP모건체이스는 지난 3일 국제유가 벤치마크인 브렌트유가 배럴당 185달러까지 치솟을 것으로 내다봤다. 앞서 지난달 22일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전 총리는 독일이 노르트 스트림 2 가스관 인가를 거부하자 "조만간 유럽이 천연가스 1000큐빅미터당 2000유로를 지불해야 하는 새로운 세상에 오신 것을 환영한다"고 비꼬았다.
유럽연합(EU)은 난처하다. 미국은 세계 최대 에너지 강국이다. 러시아산 석유·천연가스가 없어도 끄덕없다. 반면 EU는 러시아산에 대한 의존도가 천연가스 40%, 석유 27%, 석탄 47%에 이른다. 올라프 숄츠 독일 총리는 7일 성명에서 "유럽은 러시아산 에너지 공급을 일부러 제재 대상에서 제외해왔다"면서 "현재로선 다른 방식으로 이를 확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제재, 누가 과연 이길까
미국 등 서방은 제재를 폭포처럼 쏟아내고 있다. 비장의 카드로 러시아 금융사를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 결제망에서 쫓아냈다. 반도체, 통신 등 첨단 기술·제품 수출도 막았다. 맥도날드, 스타벅스, 펩시, 코카콜라, 피자헛, KFC, 페라리 같은 유명 회사들도 속속 발을 뺐다. 내내 아끼던 석유·가스 금수 카드도 꺼냈다.
이쯤되면 러시아가 두 손 번쩍 들 것 같은가? 천만에. 러시아는 천천히 보복의 칼을 갈고 있다. 국제 원자재 시장을 뒤흔드는 게 목표다. 기름값이 천정부지로 뛰면 미국 소비자들부터 들고 일어날 게 뻔하다. 8일 미국내 휘발유 가격은 갤런당 4.17달러를 기록했다. 금융위기 직전이던 2008년 7월의 4.11달러를 넘어섰다. 아직은 미국 안에서 러시아 응징을 지지하는 여론이 높다. 그러나 휘발류 값 고공행진이 이어지면 여론도 짜증을 낼 수밖에 없다. 정치인들은 물가에 약하다. 지지율을 갉아먹기 때문이다. 고물가는 러시아 편이다.
니켈 등 주요 원자재 값도 다락같이 올랐다. 니켈의 t당 가격은 7일 기준 약 4만3000달러(약 5300만원)로 전년비 130% 넘게 폭등했다. 니켈은 전기차 배터리를 만드는 데 필수재료다. 전기차 시장에도 여파가 불가피하다. 비슷한 일이 첨단 산업 곳곳에서 일어날 수 있다.
◇스태그플레이션 스멀스멀
우크라이나 사태는 고물가·저성장의 스태그플레이션을 몰고올 가능성도 크다. 세계 경제는 코로나 팬데믹으로 2년 이상 끙끙 앓았다. 이제 겨우 기지개를 켜려는 찰나 대형 악재가 터졌다.
원래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중앙은행)는 올 봄부터 금리를 본격적으로 올리려 했다. 꿈틀대는 물가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지금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딜레마에 빠졌다. 금리를 올리면 경기 회복세에 급브레이크를 거는 꼴이다. 그렇다고 가만 두면 수십년만에 처음 보는 고물가가 세계 경제를 혼돈에 빠뜨릴 수 있다. 스태그플레이션 역시 러시아 편이다.
◇현실적인 해법은 완충지대화
이웃 나라를 침공한 시베리아 곰은 매를 맞아도 싸다. 우리나라가 국제 제재에 동참한 것은 잘한 일이다. 한국은 세계 10위 경제국이다. 우리도 국제 분쟁에서 목소리를 내는 데 익숙해져야 한다.
다만 러시아에 대한 매질과는 별도로 현실적인 우크라이나 해법을 살펴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사태가 장기화하면 자칫 '피로스의 승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승자는 없고 패자만 있는, 상처뿐인 영광말이다.
미국 시카고대학의 존 메어샤이머(John Mearsheimer) 교수는 '우크라이나 완충지대'를 해법으로 제시한다. 친서방 정책을 펴되 나토엔 가입하지 않는 방식이다. 사실 메어샤이머 교수는 미국에선 별로 인기가 없다. 왜냐하면 2014년 크림반도 병합을 비롯해 우크라이나 사태 전반에 대한 책임이 미국 등 서방에 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그는 2008년 루마니아 수도 부쿠레슈티에서 열린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정상회담을 주목한다. 거기서 우크라이나와 그루지야를 장차 회원국으로 받아들인다는 원칙이 나왔다. 러시아는 즉각 신경을 곤두세웠다. 국경을 맞댄 우크라이나가 서방 군사동맹인 나토에 가입하는 걸 용납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미국과 서유럽은 나토 동진 정책을 밀어붙여 러시아를 자극했다는 게 메어샤이머 교수의 분석이다. 사실 나토 동진은 기세가 대단했다. 과거 소련 영향력 아래 있던 동유럽 국가들은 물론 연방에서 독립한 신흥국들이 앞다퉈 나토에 가입했다. 1999년에 체코·헝가리·폴란드, 2004년에 불가리아·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루마니아·슬로바키아·슬로베니아, 2009년에 알바니아·크로아티아, 2017년에 몬테네그로, 2020년에 북마케도니아가 신규 회원이 됐다. 러시아로선 앞마당을 거의 다 내준 격이다.
설상가상으로 2019년 취임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까지 나토와 EU 가입을 적극 추진했다. 러시아 가스관이 통과하는 우크라이나까지? 결국 푸틴은 폭발했다.
우크라이나 해법으로 참고할 만한 사례가 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가 터졌다. 코앞의 섬나라 쿠바가 소련 핵 미사일을 들여온다는 소식에 미국이 발칵 뒤집혔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쿠바를 상대로 해상봉쇄령을 내리는 등 강력 대응했다. 결국 소련은 쿠바에 미사일을 배치하려던 계획을 포기했다.
자기 앞마당에 철벽을 치는 건 강대국의 본능이다. 더구나 러시아는 원자재 슈퍼강국이다. 버티기에 들어가면 세계 경제는 엉망이 된다. 지난 7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3차 협상 과정에서 "우크라이나는 비(非) 나토 모델을 논의할 준비가 됐다”는 말이 흘러나왔다. 쿠바 위기를 역지사지하면 우크라이나 해법이 보인다.
paulk@fnnews.com 곽인찬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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