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랬던 뻘밭이 이제 거꾸로 러시아 기갑부대를 괴롭히는 작은 변수가 됐다. 기동력이 떨어진 탱크와 장갑차 등이 우크라이나군의 휴대용 재블린 미사일의 손쉬운 표적이 되면서다. 물론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의 속전속결 의지를 좌절시킨 결정적 요인은 애국심으로 뭉친 우크라이나인들의 결사 항전이었다.
침공 1개월을 넘기자 푸틴도 초조해진 탓일까. 러시아군의 공세는 갈수록 야만적이다. 민간인 구역이나 피란민까지 포격하는 건 예사다. 최신 전략무기인 극초음속 미사일까지 동원했다. 최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러시아가 무차별 살상이 가능한 생화학무기 사용을 고려 중인 징후를 우려했을 정도다.
애초 유럽이 러시아산 천연가스·원유 의존도가 높다는 게 푸틴이 믿는 구석이었다. 그래서 대러 경제제재 스크럼을 짜긴 어렵다고 봤다. 하지만 착각이었다. 나토에 속하지 않은 유럽연합(EU) 회원국들까지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 결제망에서 러시아 은행을 배제하는 금융제재에 동참했으니….
특히 경제대국 독일은 가스와 석탄의 절반, 원유의 약 3분의 1을 러시아에 기대는 형편이었다. 탈원전으로 돌아선 앙겔라 메르켈 전 총리가 러시아와 독일을 잇는 해저 가스 파이프라인인 노르트스트림2 건설에 합의하면서 대러 에너지 종속은 더 심해졌다.
그러나 푸틴의 소비에트제국 부활 야심이 드러나자 독일도 달라졌다. 올라프 숄츠 총리는 노르트스트림2 사업 중단을 선언했다. 우크라이나에 달랑 헬멧 5000개를 보내며 러시아의 눈치를 보더니 결국 스팅어미사일까지 제공했다. 특히 "올해부터 국방예산을 국내총생산(GDP)의 2%가 넘도록 하겠다"며 재무장 가속페달을 밟았다.
전통의 군사강국 독일의 뒷북 대응을 보고 "먼 길을 가려면 부드러운 말(言)과 큰 몽둥이를 들어라"라는 서아프리카 속담이 생각났다. 거친 언사로 이웃 부족을 자극하지 말되 언제 적으로 돌변할지 모르니 자위 능력도 갖춰둬야 한다는 함의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전 미국 대통령의 '큰 몽둥이 정책'도 이를 원용한 외교술이었다.
미국 등 서방 대 중·러 간 신냉전이 한반도로 번지고 있다. 이참에 김정은 정권은 핵보유국 지위를 굳힐 참이다. 북한은 최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발사를 포함해 올 들어서만 12차례 미사일 도발을 감행했다.
돌이켜 보면 문재인 정부는 5년 내내 중국의 환심을 얻는 데 주력했다. "중국은 큰 봉우리, 한국은 작은 나라"라고 몸을 낮추면서다. 심지어 사드 추가배치, 미국의 미사일방어체계 편입, 한미일 군사동맹 참여 등을 하지 않는 '3불 약속'까지 했다.
그런데도 정작 중국은 북한의 핵무장을 나 몰라라 하고 있다. 유엔 안보리가 북한 ICBM 발사를 규탄하는 성명을 내려 했으나 러시아와 함께 반대했다. 말로만 평화 타령을 하느라 우리 스스로를 지킬 '작은 몽둥이'만 내려놓은 꼴이다. 윤석열 당선인의 새 정부는 자위력 부족이라는 우크라이나의 비극의 본질부터 직시할 일이다.
kby777@fnnews.com 구본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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