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전국

"그때 동료 운전기사들 불러 모으지만 않았어도…죽음이 내 탓 같아"

뉴스1

입력 2022.04.23 10:00

수정 2022.04.23 10:00

22일 광주 북구 풍향동의 한 식당에서 만난 장훈명씨(69)가 80년 5월을 회상하고 있다. 그는 5·18 당시 민주기사 타격대를 만들어 20일 차량 시위를 주도했던 인물이다. 2022.4.23/뉴스1
22일 광주 북구 풍향동의 한 식당에서 만난 장훈명씨(69)가 80년 5월을 회상하고 있다. 그는 5·18 당시 민주기사 타격대를 만들어 20일 차량 시위를 주도했던 인물이다. 2022.4.23/뉴스1


장훈명씨가 1980년 5월20일 먼저 떠나 보낸 '민주기사' 동지들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2022.4.23/뉴스1
장훈명씨가 1980년 5월20일 먼저 떠나 보낸 '민주기사' 동지들을 떠올리며 눈물을 흘리고 있다. 2022.4.23/뉴스1


장훈명씨가 자신이 그린 작품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장씨는 5·18 정신적 손해배상금을 받으면 당시 사진으로 남아있지 않은 '민주기사들의 결집'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데 쓰고 싶다고 했다. 2022.4.23/뉴스1
장훈명씨가 자신이 그린 작품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장씨는 5·18 정신적 손해배상금을 받으면 당시 사진으로 남아있지 않은 '민주기사들의 결집'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데 쓰고 싶다고 했다. 2022.4.23/뉴스1


[편집자주]'80년 5월'은 현재 진행형이다. 40여년이 흘렀으나 피해자들은 그날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원인 모를 질병과 트라우마, 우울증 등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정신병원에 입원하거나 자살한 피해자들도 많다. 최근 이들에 대한 정신적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뉴스1광주전남본부는 5·18 피해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정신적 손해 배상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점검한다.

(광주=뉴스1) 박준배 기자,이수민 기자 = "그때 동료 운전기사들 불러 모으지만 않았어도…."

광주 북구 풍향동의 한 건물 2층에서 백숙 등 닭 요리 식당을 운영하는 오월 유공자 장훈명씨(69). 그는 40여년이 지난 지금도 '죄책감'을 먼저 떠올렸다.

장씨는 1980년 5월20일, 무등경기장에서 전남도청까지 차량 시위를 벌인 이른바 '민주기사 타격대'를 주도한 인물이다.

22일 오후 자신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만난 장씨는 그때를 떠올리면 미안함이 가장 크다고 했다.

"'민주기사 타격대'로 너무 많은 사람이 죽었잖아요. 자식을 먼저 떠나보낸 오월 어머니를 볼 때면 죄송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어요."

장씨의 2층 식당으로 올라가는 계단에는 나무 조각과 갓 그려 물감이 마르지 않은 그림이 가득했다. 식당 내부엔 아크릴 물감과 붓, 물통 등이 놓여 있고 벽면에는 호랑이, 해바라기, 웃고 있는 아이들 그림 등 미술 작품이 빼곡히 걸려 있었다.

장씨는 '평화롭게 살려고 붓을 들었다'고 했다.

"그림을 그리면서 이제는 평화롭게 살려고 노력하는 거죠. 문득 그 당시의 기억이 떠오르면 분노를 참아야 하니까…."

장씨가 식당을 한 바퀴 둘러보며 걸려 있는 작품을 하나하나 오랫동안 바라봤다. 입구에 걸린 해바라기 그림을 유심히 보던 그가 열려있는 물감의 뚜껑을 닫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1980년 5월, 스물여덟 살의 장씨는 택시 운전 일을 하는 평범한 청년이었다.

5월18일 이전부터 광주 곳곳에서는 시위가 벌어졌지만 하루 20시간씩 일을 하던 시절이라 시국에는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전두환이 누구인지, 12·12사태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5월19일 오후 서구 광천동 쪽을 지날 때였다. 두 청년이 장씨의 택시를 잡아 세우더니 뒷좌석에 재빠르게 올라탔다. 그들은 "빨리 화순으로 가 달라"고 했다.

서로 꼭 붙어 가쁜 숨을 내쉬는 두 사람을 룸미러로 바라봤다. 한 명은 온몸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었다. 장씨는 그들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붕대를 감지 않은 청년이 "저는 경찰이고 동생은 송원대 학생이다. 동생이 시위에 참여하다가 군인들에게 특정됐다. 잡혀가면 죽음뿐이니 환자로 위장해 광주에서 벗어나려고 한다"고 했다.

장씨는 두 사람을 얼른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기 위해 빠른 속도로 차를 몰았다. 당시 군인들은 화순으로 넘어가는 길목인 동구 지원동 근처에 검문소를 차렸는데 환자를 태운 택시라고 하니 쉽게 통과시켰다.

청년들은 화순으로 향하는 내내 장씨에게 광주 상황을 말해줬다. 그들은 "경찰도 시민을 도와줄 수 없고 모든 실권이 군인들에게 있다"며 "학생들이 시위에 참여하다가 맞아 죽고 잡혀가 고문을 받는 일도 허다하다"고 전했다.

"가는 동안 그런 말을 들으니까 머리가 쭈뼛쭈뼛 서고 갑자기 몸에 열이 확 오르더라고요. 청년들을 내려주고 광주로 돌아가는 길에 생각해보니 '남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 바로 광주역으로 갔죠."

광주역은 유동 인구가 많아 손님을 쉽게 태울 수 있어 택시기사들의 '집결지'였다. 그곳에서 기사들은 함께 승객을 기다리고 담배를 피우며 안면을 트고 지냈다.

역 앞에 도착한 장씨가 자신의 차 문을 열고 '빵' 클랙슨을 울렸다. 모든 기사가 장씨를 바라봤다. 그는 학생들에게서 들은 상황을 전했다.

"동료 운전기사들에게 얘길 한 거죠. '광주가 난리다. 여러분도 시내 돌아다니면 알지 않냐. 시위하던 학생들이 군인들의 총칼에 찔리고 심지어 길 가던 아줌마도 이유 없이 구타를 당하고 있다, 우리가 운전기사 시위대를 만들어 군인들을 막자' 이런 얘기였는데, 다른 운전기사들이 하나둘 동의하기 시작했죠."

몇십 분간 서로 얘기를 주고받으면서 근처에 있던 택시 운전기사들이 모두 시위에 나서기로 했다. 기사들은 곧바로 금남로 3가로 이동해 학생 시위대에 합류했고, 그날 저녁 내내 함께 구호를 외쳤다.

기사들은 다음날인 20일 오후 6시 무등경기장에 다시 모였다. 시위를 주도한 장씨가 경기장 앞에 도착했을 땐 수많은 운전기사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택시 기사들이 무등경기장에 모인 이유는 버스 기사들을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며칠째 이어진 계엄군과 시민군의 대치로 금남로에 있는 공용 버스터미널(현 롯데백화점 자리)은 버스 진입이 어려웠다. 외지에서 온 고속버스나 시내버스는 모두 무등경기장을 터미널·차고지로 사용했다.

장씨를 비롯한 몇몇 택시 기사들이 운행을 준비하던 버스에 올라타 버스 기사들을 설득했다. 잠시 뒤 버스 기사들도 "함께 군인들을 차로 밀어 버리자"며 시위에 합류했다.

기사들은 도로로 나갔다. 맨 앞에 버스 40여대가 섰고 택시 200여대가 뒤따랐다. 경적을 울리며 차량 창문을 열고 "시민 여러분 함께 갑시다"고 외쳤다.

"인도까지 사람이 꽉 찼어요, 주위를 보니까 빈틈이 없었죠. 흩어졌던 광주 민심이 하나로 모인 것 같아 뿌듯했어요."

금남로에 도착해 계엄군과 대치할 때도 기사들은 겁내지 않았다. 장씨는 "택시 200여대가 차량 시위를 하면서 '함께'라는 생각이 있어 무섭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택시 기사들은 차 안에서 "전두환은 물러가라", "군인들은 광주에서 나가라"고 외쳤다.

그때 '피웅' 소리를 내며 무언가 날아왔다. 뿌연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매캐한 냄새가 났다. 최루탄이었다.

거리에 있던 학생과 시민들은 금남로 4가 원각사 근처까지 후퇴했지만 기사들은 택시를 두고 도망칠 수 없었다. 시위 차량이 너무 많아 차량끼리 다닥다닥 붙어있어 차 문을 열고 나올 수도 없었다.

계엄군은 차마다 달려들어 몽둥이로 앞 유리를 쳤다. 박달나무에 송곳을 박은 몽둥이에 택시 유리는 와장창 깨졌다.

장씨의 차창 유리도 박살 났다. 계엄군은 깨진 차창 사이로 장씨를 끌어낸 뒤 사정없이 매질을 했다. 장씨가 입고 있던 아이보리색 모시옷이 시뻘겋게 핏물로 물들었다.

"맞으면서 주위를 보니 다른 기사들도 하나같이 두들겨 맞고 있었죠. 이러다간 죽겠다는 생각과 그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동시에 들었어요."

계속되는 폭행에 정신을 잃기 직전 시민 대여섯 명이 달려들어 군인을 밀쳐냈다. 시민들은 장씨를 들쳐 업고 카톨릭센터(현 5·18민주화운동기록관) 골목으로 숨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동지들을 데리고 가야 하는데' 생각이 들면서도 나도 쓰러져 버렸죠."

장씨를 골목으로 숨겨준 시민들은 그보다 한참 나이가 많아 보였다. 40대로 보이는 한 아저씨가 "당신들은 할 일을 다 했으니 얼른 집으로 가라. 이후로는 우리가 하겠다"며 장씨를 집으로 돌려보냈다.

집으로 돌아와 보니 손과 몸 곳곳에 깨진 유리가 박혀있었다. 동네 한 의원으로 가 치료를 받았지만 손에 깊이 박힌 유리조각은 빼지 못했다. 유리 조각은 2년여쯤 뒤에 큰 병원에서 빼냈다.

며칠이 지나서야 버리고 온 택시가 생각났다. 23일 장씨는 차를 찾으러 금남로로 갔다. 이미 택시는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파손된 상태였다.

그날 이후로 안 보이는 기사들도 많았다. 계엄군에게 잡혀가 고문을 받고 죽었을지 모른다고 장씨는 말했다.

"제 보물이었던 자동차와 동지들을 모두 하루아침에 잃어버린 거예요. 그 상실감이 분노가 됐고 그때부터 민주투사의 길로 뛰어들었죠."

장씨는 당시 시위에 참여한 기사들을 모아 먼저 간 동지들을 기리고 기억하는 '민주기사동지회'를 창립했다. 매년 5월20일이 되면 '민주기사의날' 행사를 열고 무등경기장에 모여 차량 시위를 재현했다. 이후에는 오월 3단체 중 하나인 5·18구속부상자회의 부회장을 맡기도 했다.

약 1시간30여분간 인터뷰하던 장씨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런데요, 참 웃긴 게…. 처음에는 진상규명과 피해 보상을 위해 열정적으로 싸웠는데 시간이 흐를수록 열정이 사라지더라고요. 아무리 해도 안 변하니까, 욕만 먹으니까. 나중에는 열정은 없고 분노, 소외감, 쓸쓸함, 외로움만 남았어요."

10년이면 될 줄 알았던 5·18 진상규명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멀어졌다. 계속 오월 이야기를 해야만 했고 그럴수록 '바깥' 사람들은 5·18을 손가락질하고 차별했다.

당시 군인에게 폭행당한 기억과 차별에 대한 트라우마가 겹쳐 정신과 약을 먹어야 했다. 국가폭력 희생자를 위한 트라우마센터가 생긴 뒤에는 일주일에 한 번 그곳에 가 시간을 보냈다. 센터에 있을 때면 잠시 나아졌으나 근본적인 해결은 되지 않았다.

손가락질하는 사람들 때문에 위축되다가도 어떤 날은 분노가 치밀어 오르곤 했다. 병원에서는 '분노 조절 장애'라고 진단했다. 우울증 약에 분노 조절 약을 추가로 먹었다. 하지만 약으로도 해결되지 않았다.

장씨는 "순간적으로 마음이 불처럼 뜨거워지고 분노가 솟아 포크레인을 끌고 가 5·18 학살자들을 전부 죽여 버릴까 생각한 적 있다"며 "그것을 참는 것이 가장 큰 어려움"이라고 했다.

장씨는 2년 전 극단적 선택을 시도하기도 했다. 가해자인 전두환과 노태우가 뻔뻔하게 살고 있는 모습에 화가 났고 지지부진한 전씨의 재판을 지켜보며 몸과 마음은 더 피폐해졌다.

위치 추적을 피하기 위해 광주 동구 법원 뒤쪽 아파트 단지에 휴대전화를 버리고 무등산 깊은 곳으로 차를 몰았다. 차량에 번개탄을 피웠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아 산일을 하던 일꾼에게 발견돼 병원으로 옮겨져 11시간30분 만에 깨어났다.

"의식을 되찾고 처음 든 생각은 슬픔이었어요. '마음대로 죽지도 못하는구나'하는 생각 때문에…."

장씨는 1990년 국가로부터 5·18민주유공자 장애 14급을 판정받고 3800만원의 보상금을 받았다. 보상금을 고스란히 오월 단체 활동비에 썼다. 국가에서 오월 단체에 지원을 해주지 않으니 단체 유지를 위해 어쩔 수 없었다.

인터뷰 말미에 장씨에게 "5·18 정신적 손해배상금을 받는다면 어디에 쓰고 싶냐"고 물었다.

장씨는 "이제 와 보상을 받아서 뭣하냐. 국가에 바라는 것도, 기대도 없다"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주방에서 설거지를 하던 장씨의 아내가 "여보, 그러지 말고, 평소에 나한테 했던 말들을 좀 해봐"라며 "남편이 하도 당한 것이 많으니 괜히 5·18로는 아무것도 안 받으려고 한다"고 거들었다.

장씨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사실 하고 싶은 게 두 가지 있다"고 했다. 하나는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오월 회원을 돕는 것이다.

"오월 회원 중에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많아요. 그런데도 남들은 '연금' 받는 줄 알고 손가락질하죠. 우리 연금 안 나와요. 당시에 그냥 길 가다가 맞은 사람이든 투쟁한 사람이든 역사에 기록해주고 그들을 보상하거나 도와주길 바라죠."

장씨 주변에 있는 유공자 중에는 휴대전화 요금도 내지 못하는 이들도 있다.
기초생활수급자도 있다. 식당을 운영하는 장씨도 생활이 넉넉하진 않지만 여러 차례 대신 휴대전화 요금을 내주기도 했다.


"2년간 지속된 코로나19로 남은 건 빚뿐이고 매달 대출금도 갚지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어려운 동지들보다는 조금 나으니까, 돕고 살려고 하는 거죠."

두 번째 바람은 '정신적 건강'과 '5·18의 미래'를 위해 쓰고 싶다고 했다.

"5·18 당시 자료 사진은 많은데 택시 기사들이 무등경기장에서 결집하고 출발하는 사진은 없어요. 그림 실력을 늘려서 제가 그걸 그려보고 싶어요. 트라우마를 그나마 그림으로 극복하는데, 그림을 그려서 미래 세대에게 전해주고 싶은 게 두 번째 소망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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