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80년 5월'은 현재 진행형이다. 40여년이 흘렀으나 피해자들은 그날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원인 모를 질병과 트라우마, 우울증 등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정신병원에 입원하거나 자살한 피해자들도 많다. 최근 이들에 대한 정신적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뉴스1광주전남본부는 5·18 피해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정신적 손해 배상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점검한다.
(광주=뉴스1) 박준배 기자,이수민 기자 = "사진 찍는다고 해서 머리도 자르고 염색도 했어요. 짠한 할아버지로 보이고 싶지 않아서…."
29일 오전 광주 북구 두암동의 한 요양병원 로비. 삐쩍 마른 5·18 민주유공자 김홍주씨(70)가 왼쪽 손목에 수액 바늘을 꽂고 반대편 손으로 수액 걸이를 밀며 취재진을 맞았다.
김씨는 사람이 없는 야외 벤치에서 인터뷰를 하자고 했다. 취재진이 조용한 실내가 좋겠다고 하자 1층 구석의 환자대기실로 안내했다.
3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한 직원이 김씨를 알아보고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인사를 건넸다. 병원 1층에서 발열 체크를 하며 취재진에게 무슨 일로 방문했냐고 물었던 직원이었다.
"어머 아버님, 어쩐 일로 기자를 만나세요?"
김씨는 그 직원에게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비밀이야, 비밀. 묻지 말어~."
김씨는 2019년 6월 간암 진단을 받은 뒤 3년째 입원 치료를 받고 있다 보니 병원 간호사부터 수납처 직원, 주차장 안내원까지 모르는 직원이 없다고 했다.
환자 대기실 구석에 자리를 잡고 마주 앉았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가 수십 년간 얘기했는데도 5·18을 안 믿는 사람들이 많잖아요. 5·18 얘길 하면 색안경을 끼고 보니 이제 아예 입을 닫고 말을 안 해요.“
김씨가 말을 이었다.
"근데 우리가 다 죽고 세상 떠나면 그걸 믿겠어요? 불행했던 삶, 죽기 전에라도 행복하게, 우리를 인정해줬으면 하는 거죠."
김씨가 어렵게 인터뷰에 나선 이유였다.
1980년 5월 김씨는 결혼한 지 1년이 채 되지 않은 새신랑이었다. 아내와 함께 북구 북동 옛 정덕유치원 근처에서 '하나 더 슈퍼마켓'이라는 가게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해 5월은 연일 계속되는 시위로 많은 시민이 금남로 거리를 지키던 때였다. 금남로5가와 가게가 가까워 김씨는 시위하는 모습을 자주 지켜봤다. 아내와 생업 탓에 직접 집회에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슈퍼에 있는 빵과 우유를 무료로 시위대에 제공하며 마음을 보탰다.
시위대가 슈퍼 앞을 지날 때, 학생들에게 간식을 건네줄 때 들었던 구호와 훌라 송이 어느 순간 김씨의 입에 붙었다. 그는 종종 집에서도 "전두환은 물러가라, 훌라 훌라" 노래를 흥얼거렸다.
당시 아내는 마른 체격에 유난히 몸이 약했다. 일교차가 큰 날씨 때문인지 감기까지 걸렸다. 김씨는 아내에게 조만간 한약을 지어주겠다고 약속했다.
5월19일, 아침부터 아내의 두통과 기침이 심해졌다. 하루라도 빨리 약을 지어 먹이고 싶었다. 부부는 가게 문을 닫고 함께 근처 양동시장에 있는 한약방에 가기로 했다.
김씨는 자전거 뒷좌석에 아내를 태우고 양동시장으로 향했다. 오전 10시쯤 금남로에 있는 수창국민학교(현 수창초등학교) 앞 육교를 지날 때였다.
그날도 육교 건너편에는 시위대가 가득했다. 학생들을 중심으로 "전두환은 물러가라, 훌라 훌라"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김씨는 훌라송에 맞춰 휘파람을 불었다.
그때 군인들이 발맞춰 걸어오는 군홧발 소리가 들렸다. '착, 착, 착.' 제일고등학교 골목에서 '앞에총' 자세를 한 군인 오십여 명의 모습이 보였다.
군인들은 잠시 자리에 멈춰 주위를 둘러보는가 싶더니 갑자기 시위대를 향해 달려들었다. 군인들은 학생과 시민을 가리지 않고 몽둥이를 휘둘렀다. 그중 네댓 명이 김씨와 아내를 향해 달려왔다.
"느닷없이 달려와서 패는 거예요. 진짜 깜짝 놀랐어요. 처음에 오자마자 발길질을 해대서 나랑 집사람이랑 둘 다 자전거 밑에 깔린 채 맞았죠."
군인들은 얼굴과 머리를 집중적으로 폭행했다. 김씨의 얼굴이 피범벅이 됐다.
아내가 "저흰 학생이 아니에요! 약 지으러 가는 길이예요"라고 소리쳤지만 군인들은 발길질을 멈추지 않았다. 계속된 폭행에 김씨는 의식을 잃었다. 그제야 군인들은 폭행을 멈추고 다른 시민을 향해 달려갔다.
다행히 정신을 잃지 않은 아내는 목에 두르고 있던 스카프를 풀어 피가 나는 김씨의 머리를 칭칭 감았다. 아내가 "여보, 여보"하며 김씨를 깨웠다. 두 사람은 군인들이 안 보는 틈을 타 골목 안쪽으로 뛰었다.
상처 때문에 멀리 도망갈 수 없었다. 골목에 있는 한 선술집으로 들어가 "도와달라"고 외쳤다.
놀란 선술집 아주머니가 "약이 없으니 이것이라도 바르라"며 된장을 내왔다. 머리에 두른 스카프를 벗기고 멍들고 찢긴 상처 위에 된장을 발랐다.
군인들에게 허리와 배를 맞은 아내는 선술집 방바닥에 드러누워 앓았다. 얻어맞은 몸이 후끈거리고 욱신거렸다. 김씨는 막걸리를 한 병 주문해 들이켰다.
"아픈 것도 아픈 건데, 이해할 수 없었죠. 왜 아무 잘못도 없이 군인에게 맞아야 하는지."
부부는 오후가 돼서야 몸을 추스를 수 있었다. 병원으로 갔지만 하도 많은 부상자 탓에 치료를 받을 수 없었다. 김씨는 아내를 집에 데려다주고 그대로 도청으로 향했다.
"화가 나서 간 거예요. 머리에 된장 바른 스카프를 그대로 두르고 갔죠. 너무 성질이 나서 싸우려고…. 카톨릭센터 앞에서 막 소리를 지르고 '전두환이 나와라!' 외쳤죠."
그날 이후 김씨는 밤낮없이 시위를 다녔다. 거리에는 대학생들도 있었지만 김씨처럼 억울하게 폭행당한 뒤 시위대에 합류한 사람들도 많았다.
5월21일 대인시장 옆 소방서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던 때였다. 갑자기 '두두두두' 총소리가 들렸다. 순간적으로 몸을 숙였다. 김씨 앞에 있던 반바지 차림의 남자가 '툭' 쓰러졌다.
남자의 다리에서 피가 뿜어나왔다. 김씨는 뒤돌아 무작정 도망쳤다.
"눈앞에서 사람이 총 맞는 모습을 보니 너무 놀랐어요. 무서웠고. 무조건 도망가야 했어요."
집에 도착해 가쁜 숨을 내쉬며 "군인들이 총도 쏜다"고 말하니 아내는 "죽을 뻔한 거 아니냐. 이제는 광주 사람들을 전부 죽이려나 보다. 다시는 시위에 나가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날 이후 군인들의 진압은 더욱 과격해졌다. 김씨는 걱정하는 아내의 만류 때문에 시위에 참여하진 못했지만 거리에 울려 퍼지는 '탕탕' 총소리에 치를 떨어야만 했다.
며칠 뒤 도청이 함락되고 열흘간의 항전이 끝났다. 금남로 거리는 피와 시체, 어머니들의 울음소리로 가득했다.
광주의 거리는 활기를 잃었다. 슈퍼를 열었지만 전 같지 않았다. 과거 자주 왔었던 손님이 잘 보이지 않아 지인에게 안부를 물으면 "죽었다"는 답변이 돌아오기 일쑤였다.
그날 이후 김씨의 몸은 갈수록 쇠약해졌다. 얼굴과 머리를 집중적으로 폭행당한 탓인지 몇 년이 지나자 후유증이 몰려왔다. 치아가 하나둘 부러지기 시작하더니 마흔도 되기 전에 전부 다 빠졌다. 청력도 나빠져 청각 장애 5급 판정을 받았다.
아내도 마찬가지였다. 그날 이후로 여섯 번의 유산을 겪어야만 했다. 아이가 쉽게 생기지도 않을뿐더러 생기더라도 임신 초기를 버티지 못했다. 병원에서는 당시 배와 허리를 맞아 자궁이 약한 것 같다고 했다.
오랜 노력 끝에 자녀를 두긴 했지만 허리에 무리가 가 일상생활에도 불편함을 겪어야 했다. 김씨 아내 역시 최근 갑상선에 이상이 발견돼 병원 입원 치료를 받고 있다.
김씨는 후유증과 트라우마에 정신과 약을 먹었으나 치료되지 않았다. 고생하는 아내를 볼 때마다 김씨는 오히려 미안함이 커졌다.
"나중에는 내가 괜히 감기 좀 걸린 걸로 약을 타러 가자고 해서, 아예 큰 병이 생겨 버린 것 아닌가 싶더라고요. 임신했다가 아이가 죽고 그때마다 아내가 우는 걸 보면 가슴이 찢어지죠."
5~6년이 지나고 당시 폭행당했던 사람들이 모여 5·18 진상규명의 목소리를 냈지만 김씨는 선뜻 나서지 못했다.
"이미 북한군의 소행이라고 언론에 여러 차례 보도된 탓에 타지역 사람들은 광주를 폭도들의 도시로 알고 있는 데다 무엇보다 '빨갱이'라는 손가락질이 두려웠어요."
김씨 부부는 1990년 5·18민주화운동 관련 상이등급 14급으로 1600만원의 보상금을 받았다. 보상금은 치아와 청력, 허리, 부인과 등 두 사람의 병원비로도 턱없이 부족했다.
5·18 피해자에 대한 정신적 피해 보상은 최근 이슈화되고 있지만 김씨와 아내는 이미 90년대부터 유산으로 인한 고통과 정신과 질병에 대한 보상이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명분뿐인 보상금이 무슨 보상이냐, 시간이 지나도 정신적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5·18이 아니었다면 아내가 유산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손가락질당할까 봐 고향을 말 못 하는 슬픔도 없었을 것 아니냐고 그때도 강하게 얘기했지만, 심사원들은 '아이고 알겠어요, 할아버지'라며 무심하게 넘기기만 했죠."
그는 40여 년이 지났지만 변한 건 없다는 게 서글프다고 했다.
"우리가 단체로 이야기하는데도 안 믿잖아요. 1990년에도, 2000년에도 우리는 진상규명 해달라, 정신적 피해를 보상해달라고 했어요. 42년 지났잖아요…. 변한 게 없어요. 그게 슬프죠."
김씨는 5·18을 왜곡하는 세력들이 있기에 정신적 보상은 반드시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국가가 지만원과 같이 5·18을 허위 사실로 날조하는 자들로부터의 상처를 보상해줘야 해요. 그들이 틀렸다는 것을 인정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보상이 필요하죠. 보상금이 나오면 뭘 하고 싶냐고요? 젊은 사람들한테 5·18을 가르쳐야죠. 우린 폭도가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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