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80년 5월'은 현재 진행형이다. 40여년이 흘렀으나 피해자들은 그날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원인 모를 질병과 트라우마, 우울증 등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정신병원에 입원하거나 자살한 피해자들도 많다. 최근 이들에 대한 정신적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뉴스1광주전남본부는 5·18 피해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정신적 손해 배상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점검한다.
(광주=뉴스1) 박준배 기자,이수민 기자 = 높이 338m, 물고기를 닮았다는 산, 물고기가 용이 돼 올랐다는 산 '어등산'이 눈 앞에 펼쳐진다.
어등산자락으로 시원하게 뚫린 무진대로를 지나 좁은 골목길로 들어선다. 광주 광산구 운수동. 광주 상무지구에서 차로 20분, 금남로 옛 전남도청 앞에서는 40여 분 걸리는 한적한 동네다.
광주 보문고등학교 근처 황량한 논길 가운데 기와집이 있다. 5·18 피해자 이종헌씨(68)가 태어나고 평생을 살아온 집이다.
13일 오후 대문 앞에서 이씨에게 '도착했다'는 문자메시지를 남겼다. 집 앞 텃밭에 고추와 고구마가 싱그런 잎을 틔우고 있었다.
'끼이익'거리는 소리와 함께 초록색 대문이 열렸다.
한껏 상기된 볼과 빨갛게 충혈된 눈, 이씨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른손에는 소주병이 들려있다.
짧게 인사를 나누고 방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선다. 그가 긴 한숨과 함께 의자에 기대앉아 눈을 감았다.
"5·18 때 이야기를 해야 한다면서요. 벌써부터 속이 타고 열불이 나 술 한잔했어요, 하…."
1980년 5월, 군 제대 후 집안 농사일을 돕던 스물여섯살 이씨는 일자리를 찾아야 했다. 한 달 전인 4월5일 식목일에 선보고 결혼을 한 터라 가장으로서 부담과 고민이 컸다.
5월19일 월요일이었다. 친누나가 충장로 상가에 있는 전자제품 매장 '태성사'에 취직자리를 알아봐 놓았다며 면접을 보라고 했다.
정장을 꺼내 입고 머리에 기름도 발랐다. 일자리를 구할 수 있다는 생각에 들떴다.
"누나가 오후 1시까지 가게로 가 사장을 만나보라고 해 설레는 마음으로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갔죠."
금남로 버스공용터미널(현 롯데백화점) 정류장에서 내렸다. 거리에는 학생과 군인들이 투석전을 벌이고 있었다.
학생들은 '계엄 철폐' 구호를 외치며 군인들을 향해 돌을 던졌다. 군인들은 방패로 막은 채 한 걸음씩 시위대 방향으로 전진했다. 돌을 던지고 도망가고, 또 던지고 도망가고…. 이씨는 그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봤다.
그때 군인들이 학생들을 향해 우르르 달려갔다. 군인들은 선두에 선 학생 몇 명을 붙잡아 군홧발로 짓밟고 개머리판으로 내리찍었다.
또래 학생들이 맞는 모습을 보자 순간 화가 치밀어 올랐으나 참았다. 태성사 사장을 만나기로 한 시간까지 10분도 남지 않았다. 이씨는 화를 억누르며 태성사로 향했다.
충장로 상가에 도착해 보니 셔터 문이 내려져 있었다. 가게 앞에는 '국가 사태로 인한 잠정 휴업'이라는 종이가 붙어있었다.
"그때는 상황이 그랬으니까, 장사를 할 수가 없었던 거죠. 근데 휴대폰도 없으니까 면접이 취소됐다는 걸 몰랐던 거예요."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터미널로 가던 중 금남로5가 앞 '밀밭회관'이라는 2층 술집을 들렀다. 이씨의 학교 후배가 일하던 곳이었다. 1층에서 문을 두드리자 후배가 나와 그를 반갑게 맞아줬다.
영업을 하지 않는 1층을 지나 2층 홀로 올라가니 밀밭회관 종업원들이 모여 술을 마시고 있었다. 종업원들은 2층 창가에 앉아 거리에서 학생과 군인들이 투석전을 벌이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무리에 끼어 술을 한두 잔 기울이고 있을 때였다. 바깥 거리에 있던 군인이 2층 창가에 있던 종업원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더니 1층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문 열어, 문 열어, 이 XX들아!"
숨을 죽이고 한참을 버텼지만 군인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종업원 중 하나가 "우리는 지은 죄가 없으니 문을 열고 회식 겸 술을 마시고 있었다고 설명하자"고 했다. 다른 직원들도 동의했다.
문을 열자 군인들은 2층으로 빠르게 올라와 종업원들을 전부 무릎 꿇게 했다. 그들은 "뭐가 재미있다고 쳐다봐, 왜 쳐다봐!"라며 발길질을 시작했다.
그때 한 군인이 "이 XX들 간첩 놈들 아냐? 숨어서 지시하고 있던 거 아냐?"라고 의혹을 제기했다. 그중 가장 계급이 높은 군인이 가게 주인을 불러냈다.
군인은 "전부 일하는 종업원들이 맞느냐"며 "직원이 아닌 사람을 찍어보라"고 했다.
가게 주인은 매장 직원들의 얼굴을 하나씩 확인하더니 종헌씨를 손으로 가리켰다.
"그때 사람들은 지갑에 군 제대증을 꽂고 다녔어요. 그걸 보여주면서 간첩 아니라고 말해도 믿지 않았어요. 개머리판이고, 곤봉이고 뭐 닥치는 대로 때리더라고요."
이씨 후배가 군인들의 바짓가랑이를 잡으며 "간첩이 아닙니다, 제 아는 형님입니다"라고 해명했지만 군인들은 듣지 않았다.
군인들은 이씨에게 "팬티만 빼고 나머지는 다 벗으라"고 명령했다. 벗긴 옷으로 이씨의 손을 뒤로 묶었다.
이씨는 그곳부터 도청 앞 관광호텔 자리까지 팬티 차림으로 끌려갔다. 군인들은 가는 길에 이유없이 이씨의 머리를 치거나, 낄낄거리며 놀려댔다.
"너무 수치스러웠죠. 면접 보려고 시내에 나온 한 집안의 가장을, 그렇게 길거리에서 팬티만 입혀 폭행하고 조롱하고…. 내가 간첩이 아니란 걸 분명히 알았을 건데."
도청 앞에는 군용차들이 일렬로 세워져 있었다. 차량 옆에는 이씨처럼 끌려온 시민들이 가득했다.
군인들은 잡혀 온 사람들을 향해 "엎드려", "누워", "앉아" 등 구령에 맞춰 기합을 주기 시작했다. 1시간가량 기합을 받은 뒤 군용 트럭 위로 올라탔다. 트럭 1대마다 머리를 박고 엎드려 뻗쳐 자세를 한 시민들이 10여명 정도 됐다.
해가 질 무렵, 차량에 시동이 걸렸다. 이씨와 시민들을 실은 차는 31사단으로 향했다.
"제가 31사단에서 제대했으니까 어느 정도는 다 알죠. 옛날에 민방위 훈련장으로 썼던 곳인데 거기에 군용 텐트를 치고 우리를 다 밀어 넣었어요."
그때부터 더한 지옥이 시작됐다. 군인들은 끌려온 시민들을 한 명씩 사무실로 불러 조사를 시작했다. 폭력과 욕설이 난무했다.
취조를 받지 않을 때는 텐트 안에서 엎드려뻗쳐 자세로 버텨야 했다. 취조를 받으러 가서는 자신들이 원하는 말이 나올 때까지 폭행했다.
이튿날에는 전남도 경찰이 조사를 했다. 그들은 "왜 데모를 했냐", "누구와 모략했냐", "불량 이북 단체 소속 아니냐"고 따져 물었다. 아니라고 자초지종을 설명하면 변명을 한다고 무차별적으로 몽둥이를 휘둘렀다.
21일 오후 5~6시쯤이었다. 텐트에서 엎드려 뻗쳐 자세로 대기하고 있는데 군인 하나가 들어 오더니 몇몇의 이름을 불렀다. 이씨의 이름도 있었다.
서로 얼굴을 확인해보니 '31사단' 출신들이었다. 군인들은 한 명씩 손등에 도장을 찍어준 뒤 이들을 한꺼번에 각화동 한 길거리에 내려줬다.
"나중에 알고 보니 '시위와는 관련이 없다는 뜻'의 도장이래요. 아무래도 31사단 출신의 사람들은 신원이 확인이 되니 보내준 거죠. 집까지 막 뛰어서 가는데 '살았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어요."
집에 도착해 보니 현관에 온가족이 모여 있었다. 가족들 모두 눈이 새빨갛게 충혈돼 있었다.
가족들은 결혼한 지 한달도 안된 아들이 행방불명돼 죽은 줄로만 알았다고 했다.
이씨 아내는 전남대병원과 기독병원, 조선대병원에 있는 모든 중증환자의 얼굴을 확인하고 오는 길이었고 아버지는 상무관에 시체를 찾으러 다녀왔다고 했다.
다음날 날이 밝고 송정리에 위치한 한 병원에 갔다. 곤봉에 맞은 것 때문에 머리에 6바늘을 꿰맸지만 가족들은 이씨가 살아있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다고 했다.
그러나 이후 이씨의 성격은 180도 변했다. 항쟁 기간이 끝난 뒤에도 시위에 연루됐거나 잡혀간 전적이 있는 사람들은 형사들이 삼청교육대로 잡아간다는 소문이 돌았다. 이씨는 두려움에 한동안 실어증을 앓았다.
"한 마디로 정신이 이상한 놈같이 변한 거예요. 매일 폭탄주를 마시고, 담배 피우고, 몇년을 방탕하게 지냈어요. 부모나 아내가 잔소리하는 게 싫고, 그냥 집에만 박혀 있었죠."
잠이 들면 금남로 시내에서 정장으로 몸이 묶인 채 팬티 차림으로 끌려다니는 꿈을 꿨다. 팬티 차림의 자신은 바닥에 엎어져 도망가려고 발버둥 쳤고 공수부대원들이 그를 쫓는 꿈이었다.
"저녁에 잠을 못 자요, 그 꿈이 무서워서. 근데 잠을 못 자서 힘드니까 또 자려고 술을 마시고…. 악순환이죠. 요즘도 가끔 그 꿈을 꿔요."
이씨는 80년 이후 42년간 "'허송세월'을 보냈다"고 했다. 지금은 그나마 병원 치료를 받아 안정을 찾았고, 가끔 꿈을 꾸는 수준이지만 이마저도 최근이다. 그전까지는 고통 때문에 아내와 자녀를 등한시했다.
이씨는 80년 5월 이후 집 밖으로 잘 나가지도 않고, 5·18 관련 단체나 주위 사람들과도 어울리지 않았다. 국가에서 보상금을 준다는 사실도 몰랐다. 그는 1990년대에 시작한 5·18유공자 보상금 지급을 모르고 있다가 아내의 친구들이 알려주면서 2017년 마지막 선정 때 신청했다.
이씨는 오랜 시간이 흘러 병원 치료 기록 등이 대부분 파기돼 '기타 무급' 판정으로 870만원의 보상금을 받았다.
그는 그 보상금으로 사회에 재기하려고 했으나 얼마 안가 '당뇨' 판정을 받으면서 치료비로 써야 했다.
이씨는 정신적 손해배상금을 받으면 그 돈을 고스란히 정신과 치료에 써 늦게나마 사회에 나가겠다고 했다. 직장을 구하진 못하더라도 취미 생활을 하거나, 가족들과 여가를 보내고 싶다는 것이다.
"오늘도 보세요. 술 마시고, 지치잖아요. 5·18 얘기만 하면 식은땀이 나고 숨이 안 쉬어져요. 정신과 약을 먹으면 너무 세서 며칠 동안 통나무처럼 힘이 없어요. 약이나 술로 연명하는 것 말고, 상담을 받고 이야기하는 '치료'를 받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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