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문섭 '물에서 물로'
그의 캔버스엔 바다가 있다. 한 순간의 바다가 아닌 수많은 시간들이 쌓인 바다다. 그림이 그저 정해진 프레임 위에 붓질 자국이 굳어진 것이라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산이다. 수없이 짙고 옅으며, 푸르고 흰 그 화면 속에 잔잔하고 거친 파도가 끝없이 들이친다.
1969년 대한민국 미술전람회에서 테라코타 작품으로 수상한 뒤 한국을 대표하는 조각가로서 자리 매김해온 거장 심문섭이 노년이 되어 도달한 곳은 어린시절 자신을 품어준 동네, 경남 통영의 바다다.심문섭은 젊은 시절 테라코타를 시작으로 흙과 같은 자연물을 통해 물성을 탐구해왔다. 1970년대부터 '반(反)조각'을 주창해오며 전위적인 작업을 펼쳐왔다. 하나의 대상을 창조하는 데 목표를 두지 않고 나무와 돌, 흙, 철 등의 재료를 날 것을 제시해왔다. 완성된 작품을 좌대에 올려두는 대신 벽에 기대게 하거나 바닥에 눕히는 실험을 선보이며 주목받았다.
심문섭은 "내 작업의 모든 화두는 결국 '물성'과 '시간성'이었다"며 "재료 본연의 물성, 돌이 흙이 되고, 다시 흙이 철이 되는 시간의 흐름을 통해 물질의 순환을 보여주려했다"고 말했다. 심문섭은 "그렇기에 지금 물을 탐구하는 것은 당연하다"며 "조각가가 회화를 하니 무언가 다르게 보이는 것 같지만 사실 다르지 않다"고 말했다. 심문섭은 회화 작업에서도 스스로의 의도를 최소화하려 노력했다. 유성물감으로 밑칠을 한 캔버스 위에 수성 물감으로 붓질을 반복했다. 섞이기 힘든 그 두 물감들이 서로를 밀어내며 다양한 색의 스펙트럼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심문섭은 "수십번 밀리고 지워지고 또 그 과정에서 굳어지면서 내가 생각지 못한 어떤 질서들이 펼쳐진다"며 "바다도 그렇다. 시시각가 변하는 바다, 내 의지대로 되지 않는 바다인데 늦은 나이에 밀린 숙제를 하듯 회화작업에 흠뻑 함몰돼 있는 내 모습이 이 그림에 있다. 마치 잠수해서 물속에 허우적 거리고 있는 것 같은데 물 밖의 세계와 물 속에서 자맥질하며 보는 세계는 차원이 다르다"고 설명했다. 전시는 다음달 6일까지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
박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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