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양=뉴스1) 공정식 기자 = 대구에서 2시간30분을 달려 찾아간 경북 영양군 영양읍 상원리 농업회사법인 (주)닭실재래닭연구소.
계란 출하를 앞둔 선별포장 작업실 벽면에 '위기는 반드시 극복한다'는 사훈이 붙어 있다.
"메타버스는 커녕 노선버스도 없는 오지에 뭐 볼 것 있다고 찾아오셨습니까, 허허허." 이몽희(60) 대표가 멋쩍은 웃음과 농담으로 취재진을 맞았다.
2017년 8월, 이른바 '살충제 계란' 파동으로 전국을 들썩이게 했던 농장주가 바로 이 대표다.
경북 영천에서 친환경 인증 산란계 농장을 운영하던 그에게 어느날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농장과 계란에서 인체에 유해한 디클로로디페닐트리클로로에탄(DDT) 성분이 검출됐다는 것.
그는 "DDT가 뭔지, 어떻게 생겼는지,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다. 농장을 샅샅이 뒤져 DDT를 포함해 어떤 종류의 살충제 병이라도 나오면 모든 책임을 지겠다"며 결백을 주장했다.
정부 조사 결과 농장 흙에서 DDT 성분이 나왔고, 농장 이전에 사용된 과수원에서 뿌린 DDT가 흙에 남은 것으로 추정됐다.
그는 "오명을 안고 농장을 운영하기 싫다. 내 잘못이 아니더라도 토양에서 살충제 성분이 검출된 사실을 속이고 싶지는 않다"며 농장을 폐쇄했다.
폐업하면서 그는 5000만원을 들여 농장 사육시설을 철거하고 폐기물도 전부 정리한 후 원래 땅으로 돌려놨다. '사회적 책임을 충실히 이행하겠다'던 다짐을 실천한 것이다.
이 대표와 닭의 인연은 1990년쯤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학에서 축산을 전공한 그에게 재래닭 복원을 연구하던 지도교수가 경북지역의 재래닭 사육농가 명단을 건네주면서 실태조사를 의뢰했다.
대학 졸업 후 사회생활을 준비하던 그는 이 명단을 토대로 경북 전체에 흩어진 재래닭 사육농가를 찾아다녔다. 그러면서 소규모 농가의 녹록하지 않은 현실과 반대로 사업의 가능성을 살펴보게 됐다.
이후 재래닭을 이용해 계란과 닭고기 생산에 도전하는 재력가와 연이 닿아 사업에 일부 관여했지만 실패를 맛봤다.
이 대표는 "재래닭 복원 연구를 돕기 위해 사육농가를 살펴보고, 재력가를 만나 새 사업에 관여했지만 내가 주인이 아니었던 탓인지 결국 중도하차하고 말았다"고 했다.
시간이 흘러 해외 주재원 생활을 지내고 건설과 개인사업 등을 거쳐 2008년 마음 속에 남아있던 결심을 굳히고 경북 영천에서 다시 재래닭 사업에 도전했다.
이 대표는 "세번째 도전이라 생각하고 2008년부터 7년 동안 농장 일에 죽도록 매달렸다.그때 경제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겪은 고생은 말로 다 하지 못할 정도"라고 했다.
모아둔 돈과 생활안정자금으로 영천에서 재래닭 농장을 시작한 그는 7년 고생 끝에 '닭을 어떤 환경에서 키울 것인가', '계란은 어디에 판매할 것인가', '소득은 어떻게 늘릴 것인가' 등 여러 분야에 눈을 뜨게 되고 자신감을 갖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재래 닭 사육을 위해 지인 등의 도움을 받아 규모를 키워나갔다. 공장형 사육이 아닌 방사형 농장에서 생산된 친환경 계란이 입소문을 타고 인기를 얻기 시작하면서 월 순수익이 1500만원에 이를 만큼 사업이 안정적으로 진행됐다.
2017년 8월 문제의 '살충제 계란'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 2년8개월 동안 부흥기를 맞이했다.
당시 농장에서는 8000여마리의 닭을 방사 형태로 사육해 하루 2000여개의 계란을 생산했고, 생산된 계란은 소비자생활협동조합을 통해 판매되는 등 친환경 농장의 표본으로 불렸다.
사업이 부흥하면서 그는 미래에 대한 투자와 동시에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기 위해 첫 발을 내디뎠다.
지인 5명과 출자해 만든 것이 지금 경북 영양에 있는 '재래닭연구소'다. '살충제 계란' 사건으로 영천 농장을 폐업하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미리 영양군에 부지를 준비한 덕분에 큰 화를 면했다.
이 대표는 "영천 농장에서 소득이 '0'원이 되면서 쫄딱 망했죠. 그 농장이 그대로 운영됐으면 지금 이곳 재래닭연구소 사업도 부담을 덜면서 순조롭게 진행됐을텐데…"라며 당시를 회상했다.
영양에 새로운 둥지를 틀 때는 "일반 산란계로 바꾸지 왜 재래닭에 또 도전하느냐"며 주변의 핀잔과 반대가 심했다고 한다.
그는 "돈만 있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은 하고 싶지 않았다"며 "남들이 안 하는 것, 어려운 것에 도전해 제대로 상품화하겠다는 오기가 생겼다"고 했다.
이 대표는 "땅이 오염되지 않는 곳에서 생산된 먹거리는 근본적으로 가치가 높아지고 땅의 가치도 올라갈 것"이라며 "내 잘못이 아니었지만 '살충제 계란' 사건 이후 많은 것을 배웠고 또 공부하고 있다"고 말했다.
경북 영양의 닭실재래닭연구소에는 양계장 8개동 가운데 7개동에서 1동(72평)당 1000마리의 닭이 있으며, 1개동은 국립축산과학원 가금연구소 실험사육용으로 사용된다.
재래닭의 순수혈통을 잇기 위해 순도선별, 후대점검, DNA검사 등을 거쳐 안전성이 확보되면 2만마리까지 늘릴 계획이다.
현재 주된 수입은 친환경 계란이다. 이곳에서 생산되는 계란은 이물질 제거, 선별, 포장을 거쳐 전국 유통망을 갖춘 유명 협동조합에 납품된다. 계란이 가장 많이 생산된다는 1~4월에도 일반계란 가격의 몇배에 달하는 높은 값이지만 물류창고나 매장 입고 즉시 재고가 남지 않을 정도로 불티나게 팔려나간다.
낙동강유역환경청 소유의 낙동강 수변지역에서 청송·영양축협이 무농약으로 생산하는 호밀·보리·옥수수를 이용한 친환경 조사료를 사육시설에 깔아주는 등 재래닭 사육 환경에 각별히 주의하고 있다.
또 성분검사를 통해 농약에 오염되지 않는 톱밥을 사용하며, 닭이 플라스틱 등 화학물질에 직접 접촉하지 않도록 하고 있다.
현재 재래닭 사육과 계란 생산을 위한 1만2000㎡ 규모의 생산시설을 구축해 회사를 운영하고 본격적인 재래닭 연구를 위한 실험동 건립에 사용될 1만5000㎡ 규모의 부지 조성도 마쳤다.
산 면적 8만2000평 가운데 10㎞에 산책로를 조성할 계획이며, 이미 1차로 7㎞ 길을 닦은 상태다. 산책로가 완성되면 생산자와 소비자가 서로 믿고 연결되도록 견학을 위한 볼거리와 체험거리를 제공할 계획이다.
시설허가 문제를 비롯한 각종 걸림돌과 때마다 찾아오는 위기를 극복하는 사이 5년 세월이 흘렀다.
이몽희 대표는 "닭실재래닭연구소는 13명의 주주가 적은 자본으로 안정적인 소득을 올릴 수 있는 사업 표본을 만들어 가고 있다"며 "실패하고 좌절하는 것은 나 하나로 충분하지 않겠느냐. 앞으로 안정되고 풍요로운 농촌을 만들어 나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귀농을 꿈꾸는 이들에게 "결코 쉽게 볼 것이 아니다. 귀농을 충동적으로 생각하거나 막연히 도전했다가 열에 아홉은 실패한다. '잘 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무너지는 것은 한순간"이라며 "농촌 수익에 대해 공부하고 장기적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충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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