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80년 5월'은 현재 진행형이다. 40여년이 흘렀으나 피해자들은 그날의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원인 모를 질병과 트라우마, 우울증 등으로 고통받는 이들이 부지기수다. 정신병원에 입원하거나 자살한 피해자들도 많다. 최근 이들에 대한 정신적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뉴스1광주전남본부는 5·18 피해자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정신적 손해 배상의 필요성과 당위성을 점검한다.
(광주=뉴스1) 박준배 기자,이수민 기자 = '띵동띵동'
3일 오후 3시 광주 서구 농성동의 한 주택 앞, 초인종을 눌렀다. 아무런 인기척이 없다. 다시 '띵동'. 그래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사전에 인터뷰 약속을 정하고 왔는데….'
집 주소를 확인했다. 틀리지 않았다. 휴대전화를 꺼내 5·18유공자 김태수씨(67)에게 전화를 걸었다. 몇 번의 연결음 후 떨리는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넘어왔다.
"갑자기 몸이 너무 안 좋아서 병원에 잠깐 왔어요. 죄송해요. 한시간 쯤 뒤에 뵐게요."
근처 카페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한참이 지난 뒤 깔끔한 정장 차림의 한 남성이 말을 걸어왔다. 옷깃에 달린 '5·18 기념배지'가 눈에 띄었다. 180㎝가 조금 안돼 보이는 큰 키에 높은 콧대. 김씨의 첫인상은 깔끔하고 나이에 비해 젊어 보이는 아저씨였다.
카페에서 나와 집을 향해 함께 골목을 걸었다. 김씨의 걸음걸이가 조금 이상했다. 오른 다리를 절뚝거렸다. 김씨가 몇 걸음 못가 벽을 짚고 멈춰섰다. 주먹을 쥐어 다리를 톡톡 치고 몇번 앉았다 일어났다 했다.
"5·18 때 총 맞아서 잘 못 걸어요. 방금도 진통제를 맞고 왔는데… 죽겄네요."
'끼익' 집 문을 열자 퀴퀴한 곰팡내가 났다. 신발장 앞으로 엄지손톱만 한 바퀴벌레 한 마리가 쓱 지나갔다. 불어터진 짜장면과 굴러다니는 비닐봉지…. 방 곳곳에 글자 연습을 한 흔적도 보였다. 어린 자녀가 있느냐고 물었다.
"딸이 38살인데, 지적장애가 있어서요. 하하. 정돈이 안 됐네요."
김씨가 멋쩍게 웃으며 쓰레기를 방 한구석으로 몰아넣었다. 그는 오른쪽 다리를 펴고 방 한켠에 있던 침대에 기대앉아 42년 전 '그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1980년 5월, 스물다섯 살의 김씨는 광주 동구 지산동에 있는 한 가구공장에서 자개농 기술자이자 인력 관리자로 일했다.
눈썰미와 손기술이 좋아 당시 월급 180만원을 받는, 대한민국에서 손가락에 꼽을 정도의 실력자였다.
5월17일이었다. 김씨는 '청자' 담배를 사려고 큰길로 나섰다. 당시 김씨가 일하던 공장은 광주지방법원 뒤편 외진 곳에 있었다. 근처엔 구멍가게가 없어 큰길까지 나가야 했다.
그때 수십 대의 군용 차량이 군인 수백 명을 태우고 가는 모습을 목격했다. 김씨는 군용 차량을 따라갔다.
"아니, 신기하잖아요. 동네에 전쟁이 난 것도 아니고 군인들이 우르르 가니까. 무슨 일인가 싶어 따라간 거죠."
차량은 금남로 전남도청 앞에 멈춰섰다. 대학생들이 서로 어깨 동무를 하고 '전두환 물러가라' 시위를 하고 있었다. 김씨는 그제야 군인들이 이동한 이유를 알았다. 시위대 근처에서 군인들을 바라보다 합류했다.
"전두환이 누군지도 몰랐지만 배운 학생들이 하는 시위이니 맞는 말이겠거니 했죠. 학생들 무리에 끼어서 함께 으쌰 으쌰 구호를 외쳤죠."
어디선가 '파사삭' 소리가 났다. 바닥에 수십 개의 최루탄 가스가 뿌려졌다. 김씨의 몸도 최루탄에 범벅됐다. 이대로 있으면 죽겠거니 싶었다. 김씨는 기숙사를 향해 달렸다.
다음날이었다. 무서웠지만 전날 시위대와 함께했던 기억이 잊히지 않았다. 계속 호기심과 관심이 갔다. 시내로 다시 나갔다. 웬 여자가 차량에서 방송을 하고 있었다.
"그게 전춘심 여사예요. 노동청 앞에서 '사람들이 많이 다쳤으니 후송해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자원을 했습니다."
광주가톨릭센터(현 5·18민주화운동기록관)로 갔다. 시민군 관계자가 '여객 버스'를 한 대 내줬다. 버스 기사를 하다가 시민군에 합류했다는 또래 남성이 운전을 맡았고, 김씨는 다친 사람을 업고 와 차량에 태우기로 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시내 곳곳을 돌아다니며 부상당한 사람들을 후송했다.
20일 광주역 발포 때도 7~8명의 부상자를 후송했고 21일 옛 전남도청 앞 집단 발포 때는 수십명의 시민들을 병원에 옮겼다.
하루에도 여러 차례 병원들을 오가다 보니 의료진과도 친분이 생겼다.
21일 오후 적십자병원 간호사의 부탁으로 서구 농성동 옛 국군 광주통합병원에서 링거 30박스를 옮겨주기로 했다.
"병원 직원도 아닌데 이렇게 봉사하시는 거예요?"
통합병원 간호사가 먼저 말을 걸었다. 주변에 있던 의사와 간호사들도 김씨에게 고맙다고 했다.
"운전도 기사가 했고, 나는 그냥 짐만 좀 옮겨준 건데 배운 양반들이 막 칭찬을 하니까 몸둘 바를 몰랐죠. 그냥 뿌듯했어요."
그날 이른 저녁, 피곤한 몸을 이끌고 광주교도소 앞에 버스를 댔다. 잠시 쉬다가 도청으로 복귀할 생각이었다. 운전 기사와 김씨, 그리고 학생 시민군 한 명이 차안에 있었다.
갑자기 '두두두두' 총소리가 났다. '탕' 소리와 함께 운전석에 앉았던 버스 기사의 머리가 뒤로 젖혀졌다. 피가 튀었다. 버스 의자들이 총에 맞아 박살 났다. 의자 시트를 뚫은 총알이 김씨의 오른쪽 허벅지에 박혔다. 김씨도 그대로 쓰러졌다.
차에서는 허연 연기가 피어올랐고 잠시 뒤 군인들이 우르르 버스 안으로 들어왔다. 군인들은 의자와 시트를 들춰보며 버스 안을 샅샅이 살폈다.
"다리를 끌며 버스 맨 뒷자리 쪽으로 숨었어요. 그때 군인 한명이 나를 발견했는데, 군홧발을 잡으며 작은 목소리로 '살려주세요' 했죠. 그랬더니 그 군인이 못 본 체 해줬고 군인들은 그대로 떠났죠. 나중에 보니 광주교도소를 방어하던 3공수여단이 총을 쏜 거였죠."
다음날인 22일, 또 다른 군인들이 버스에 타 생존자를 살폈다. 함께 있던 기사와 학생은 죽은 듯했고 김씨는 피를 많이 흘려 반죽음 상태였다. 군인들은 의식이 붙어있던 김씨를 차에 태워 광주교도소로 끌고 갔다.
"거기가 교도소 앞이잖아요, 군인들은 우리 버스가 교도소를 습격하려고 대기하는 차인 줄 알았던 거죠. 방금까지 피를 흘리고 죽다 살아난 저에게 '교도소를 습격하려고 했지 않냐', '왜 거기에 차를 댔냐'고 강도 높은 취조를 했어요."
취조 중 갖고 있던 물건들을 다 내놓으라고 했다. 김씨는 바구니에 지갑을 넣었다. 지갑 속에서 회사 직원들의 '당직 일정표'가 나왔다. 김씨가 직원 관리 업무도 했기 때문에 갖고 있던 당직표였지만 이게 오히려 화근이 됐다.
당시 김씨는 당직표를 짤 때 직원 이름 옆에 오전, 오후, 종일 근무를 표기했다. 표시는 오전조가 'Δ', 오후조가 '□', 종일조가 '○' 모양이었다.
군인들은 당직표가 간첩 명단이고, 표기된 것이 투입된 지역이라며 김씨를 무자비하게 폭행했다. 드럼통에 물을 붓고 머리를 여러 차례 넣었다 빼며 물고문했다. 김씨는 그럴 때마다 "죄지은 것이 없다. 부상자를 후송했을 뿐이다"고 호소했다.
23일 아침 김씨의 다리가 이상했다. 전날까지만 해도 피가 흐르거나 퉁퉁 붓는 수준이었는데 아침에 눈을 뜨니 진물과 함께 감각이 없어졌다.
"군인들도 제 다리를 보더니 '아차' 싶은 표정을 짓더라구요. 한 지휘관급 군인이 군용차에 태워 저를 국군통합병원으로 이송했죠."
병원에서 진료를 받고 로비에 앉아있을 때였다. 한 남성이 자신에게 다가와 "김태수씨! 어디 아프세요?"라고 안부를 물었다. 얼마 전 링거를 옮길 때 인사했던 의사였다. 자초지종을 얘기하니 의료진들이 몰려왔다.
그들은 김씨와 함께있던 군인에게 "김태수씨는 선량한 사람이다. 시위대가 아니고, 후송만 도왔던 사람이다"고 증언도 해줬다. 덕분에 김씨는 다시 교도소로 돌아가지 않았다. 병원에서 파편 제거 수술을 받고 4개월 뒤 퇴원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왔지만 자개 일은 할 수 없었다. 업무 특성상 앉아서 일을 해야 하는데 의자에 앉는 것이 영 불편했다.
"일을 그만두고 어영부영 술을 마시며 매일 집에서 보내게 됐어요. 돈이 좀 생기면 진통제를 사러 나가는 것이 유일한 외출이었구요."
눈을 감기만 해도 구타당했던 악몽이 떠올랐다. 샤워를 하려고 해도 물고문을 당하는 것만 같았다. 진통제를 사러 병원에 갈 때면 늘 경찰들이 뒤를 따라왔다. 더더욱 집 밖에 나가지 않았다.
계속 술만 마시니 친구들은 언젠가 태수가 '이상한 짓거리를 할지 모른다'고 정신병원에 데리고 갔다. 81년 나주에 있는 정신병원에 다니기 시작해 6년간 치료를 받았다.
치료를 받고 몸과 정신이 좀 나아지자 연애도 할 수 있었다. 김씨는 "아내와 함께할 때 유일하게 세상이 행복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몇 년 뒤 또다시 역경이 시작됐다.
1985년 부부에게 찾아온 축복은 절망이 됐다. 딸이 지적장애 2급을 안고 태어났다. 김씨는 다시 술독에 빠졌다.
"정신과 약을 먹는데 애가 울고 그러니까 저도 예민해지는 거예요. 애가 울면 미칠 것 같았어요. 술이랑 약을 같이 막 먹었죠."
그럼에도 아내는 따뜻한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함께 통닭집을 운영했다. 고된 일이지만 아내는 퇴근 후에도 씩씩했다. 정신질환을 앓는 김씨와 지적장애 딸의 곁을 꿋꿋하게 지키며 김씨 대신 '가장' 역할을 해냈다.
그런 아내에게 뭐라도 보탬이 되고 싶었다. 1990년, 국가가 5·18 피해자들을 대상으로 보상금 신청을 받을 때 김씨도 나섰다. 장애 5급으로 분류돼 1억5000만원을 받았다. 총을 맞았고, 병원에 오래 입원해 다른 5·18 피해자들보다 보상금이 더 많았다. 가족들이 함께 살 '집'을 마련했다.
그 집이 지금 김씨가 살고있는 이 주택이다. 집 안 곳곳에 지난 30년간 김씨 가족이 꾸려온 살림이 남아 있다. 그러나 아내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화장대 위엔 흔한 화장품 하나 없었고, 집 안은 정돈되지 않았다.
잘 청소되지 않은 집에선 인터뷰 내내 바퀴벌레가 안방 바닥을 기어 다녔다.
계속해서 아내 이야기를 '과거형'으로 말하는 김씨에게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그래서 아내 분은 지금 어디 계세요?"
김씨가 고개를 떨궜다. 그가 조용히 흐느꼈다.
"암이 생겨서, 내장도 안좋고 결핵도 있고…. 큰 병원 가자고 했는데 '우리 형편을 생각하라'고 안 가더니…. 6년 전에 죽었어요."
흐느끼던 김씨가 잠시 뒤 숨을 고르더니 휴대전화 화면 속 딸의 모습을 보여줬다. 낮 시간에 주간보호센터의 도움을 받는다고 했다. 휴대전화 속 김씨의 서른여덟 살 딸은 순수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예쁘게 생겼는데요?"
"에휴, 근데 나는 맨날 얘한테 그래요. 약 먹고 확 죽어버릴래? 같이 확 떨어져서 죽을까? 아내도 보고 싶고…. 둘이 살기 너무 힘드니까."
김씨는 5·18 정신적 손해배상금을 받으면 딸을 위해 쓰고 싶다고 했다. 아팠던 아내를 치료해주지 못했고, 그로 인해 아내가 죽었다는 죄책감으로 살아왔다. 딸만은 제대로 보살피고 싶다고 했다.
"죽을래? 죽을까? 맨날 묻는데, 그 이유가… 혹시나 내가 죽으면 얘 혼자서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요. 돈만 있어도 그런 소리 안하죠. 전북 김제에 가면 그런 병원이 있대요, 지적장애 성인들을 돌보고 치료해주는. 거기 병원비가 꽤 비싸다던데, 그래도 거기서 치료 한번 받게 해주는 게 꿈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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