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국제일반

디지털화 외치면서 종이로 회의하는 일본…DX 절벽까지 단 3년 [글로벌 리포트]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2.06.12 18:18

수정 2022.06.13 17:35

코로나가 흔든 아날로그 공화국
작년 디지털청 출범했지만 표류 위기
팩스·도장 등 구시대 행정서 탈피 못해
한국판 주민등록증 보급도 정책 엇박자
경제산업성, 늦어지는 디지털화 경고
2025년 기점으로 연 120조 손실 예고
그 누구보다 절실한 곳은 기업들
후지쯔 ·파나소닉 등 구조조정 움직임
전문가 "모노즈쿠리 정신 버려야 산다"
일본사회에서는 여전히 도장과 종이 등 아날로그 방식이 널리 사용되고 있다. 사진은 도쿄 시내의 한 공장에서 도장인 '한꼬' 제작을 위해 같은 크기로 절단된 상아. 로이터뉴스1
일본사회에서는 여전히 도장과 종이 등 아날로그 방식이 널리 사용되고 있다. 사진은 도쿄 시내의 한 공장에서 도장인 '한꼬' 제작을 위해 같은 크기로 절단된 상아. 로이터뉴스1
디지털화 외치면서 종이로 회의하는 일본…DX 절벽까지 단 3년 [글로벌 리포트]
【파이낸셜뉴스 도쿄=조은효 특파원】 일본이 코로나19 대응과정에서 노출된 '팩스와 도장의 나라'에서 탈피하겠다며 최근 디지털 전환에 절치부심이나, 변화를 향한 시행착오가 만만치 않다. "일본은 디지털화에서 패전했다"(히라이 다쿠야 전 디지털청 장관)는 반성적 자기 고백을 발판으로 '디지털 행정'은 정부의 목표가 됐고, 첨단 실리콘밸리 경제를 쫓은 '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DX)'이 일본 기업의 최신 트렌드가 됐으나, '오래된 구조와의 결별'은 진통의 연속이다.

방법론과 인재 확보, 인식의 전환이 과제다. "'디지털화를 하겠습니다'라고 종이로 통지가 왔다"는 촌철살인의 풍자시(센류, 5·7·5구의 짧은시)가 회자되듯, 디지털 전환으로 가는 과도기적 혼란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미 일본 경제산업성은 DX전환이 지체될 경우, 오는 2025년을 기점으로 매년 12조엔(약 120조원)가량 손실이 발생한다는 시산 결과를 발표(2018년)하고, 이를 일컬어 '2025년 절벽'이라고 칭했다.
이제 시간은 불과 3년도 남지 않았다. 일단, 위기감도, 서두름도 엿보인다. 세계 3대 경제대국 일본은 과연 DX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에 안착할 수 있을까.

■日정부..."종이신앙 버려야"

최근 일본 정부 내에선 디지털 행정과 관련 몇 가지 주목할 만한 사건들이 있었다. 지난해 9월 설립된 디지털청의 '넘버 2'로 영입된 학자 출신 이시쿠라 요코 디지털감(차관급)이 지난 4월, 조직 출범 8개월 만에 물러난 것이다. 컨디션 불량을 사유로 댔지만, 경제산업성과의 주도권 다툼이 한몫했다는 후문이다. 그에 앞서 민간 출신 직원 10여명이 '줄사표'를 낸 것이 알려지면서, 일본 관가에 새 바람을 불어넣겠다던 디지털청의 '출사표'가 무색해졌다. 민간에서 온 직원들은 "상하간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다", "종이에 대한 신앙이 생각 이상이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 각 부처에서 파견나온 공무원들이 중심이 되면서, 기존의 수직적·경직적 의사결정 구조가 디지털청에서도 반복된 것이다.

운영상 혼란은 정책 혼란으로 이어졌다. 일본 정부는 한국의 주민등록증과 같은 '마이넘버 카드'의 전국민 보급을 목표로 가입·교부시 약 20만원의 포인트를 지급하고 있는데, 디지털청이 이 카드에 건강보험증 기능을 붙이겠다며, 초진료·재진료·조제료에 약 100~200원씩 추가 비용을 내도록 제도를 설계한 것이다. 한쪽에선 국민들에게 돈을 줘가며 정책 사용 장려에 나섰는데, 다른 한쪽에선 그 정책을 사용하는 사람들에게 돈을 더 내라고 하니, 한 마디로 정책 엇박자였다.

일본 전국 1700여개 행정 시스템을 통합(표준화)하는 문제도 당초엔 2025년까지 완료하겠다고 발표했으나, 인력부족, 시스템 연결 등의 문제로 이미 목표 시점이 1년 연기됐다. 최근 만난 일본 DX업체 한 대표는 "디지털청을 설립하자면서 종이 뭉치로 된 회의 자료를 내놓는 나라"라며 "디지털 전환을 위해선 시간이 꽤 걸릴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디지털화의 기운을 전국으로 확산시키겠다며 매년 10월 첫번째 일요일과 월요일 이틀을 '디지털의 날'로까지 제정까지 했으나, 행정개혁이 더 시급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긍정적 신호라면, 기시다 후미오 총리가 지난 3일 '디지털 임시 행정 조사회'에서 디지털 전환을 가로 막는 4000여개 낡은 규제를 향후 3년간 없애도록 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올해 디지털 관련 예산은 총 1조 2798억엔으로 역대 최대 규모다. 최근 일본 공공기관 관계자는 "재택근무 체제를 장려하면서, 명함에 사무실 전화번호나 팩스번호도 없애라고 했다"면서 "코로나 사태 이후, 이 역시도 나름 드라마틱한 변화라면 변화"라고 했다. 변화의 바람은 불고는 있으나, '결정적 리더십'이 보이지 않는다는 게 핵심이다.

■日기업..."모노즈쿠리 경제와 결별해야"

사실, 기업은 정부보다 한층 더 절박하고, 그 혼란상도 더 커보인다. '1227사.' 일본 금융청 전자정보공개시스템상 유가증권보고서(2021년 4월~2022년 3월)에 DX를 게재한 기업들의 개수다. 불과 2020년도에는 320개사 밖에 없었으나 1년여 만에 4배 이상으로 증가했다. IT기업들 뿐만 아니라 금융, 건설기계, 화학, 식품, 물류, 농업 등 온갖 업종들이 DX전환을 전면에 내걸었다. '제조업의 DX', '금융DX', '스마트 농업', 'DX에 의한 업무혁신' 등 각종 DX 컨설팅 업계도 붐이다.

후지쯔는 지난 4월 말 수익이 견고하기로 손꼽힌 스캐너 사업을 약 8000억원에 매각했다. '종이 프로세스', '하드웨어'와 결별, 서둘러 소프트웨어를 축으로 DX기업으로 구조조정을 마무리하겠다는 것이다. 나름 "디지털 전환에 대한 진심도를 보였다"는 평가가 나왔다. 파나소닉홀딩스는 미국 디지털 솔류션 제공기업인 블루욘더를 약 8조원에 인수하기로 했다. 지난해부터 최근까지 잇따라 전산 사고를 낸 일본의 대형 은행인 미즈호은행은 구글과 제휴, DX에 대응하겠다고 했다.

DX유행기, 기업들이 당장 직면하는 문제는 인재난이다. 일본 경제산업성에 따르면 일본 내 IT 인재는 지난 2018년 기준으로 103만명에 그치는데, 이 역시도 90%가 웹·앱을 개발하는 종래형 IT 인력들이다. 인공지능(AI), 사물인터넷(IoT)등을 전문으로 하는 '첨단 IT 인재'는 10% 수준이다. 대략 2030년에는 최대 79만명의 DX인재가 부족한 것으로 예상된다. 일부 기업들은 당장 급한대로 해외로 눈을 돌리고 있다.

'일본판 당근마켓'으로 불리는 온라인 기업 메루카리는 최근 인도에서 핀테크 등의 기술을 담당할 IT 거점을 설립한다고 발표했다. 일본 최대 온라인 상거래 사이트인 라쿠텐도 인도 현지 직원이 1000명이 넘는다.

앞다퉈 달려나가고는 있으나, 그 다음의 문제는 "어떤 DX냐"는 궁극의 논의에 직면하게 된다. 단순한 업무처리 영역의 디지털화를 말하는 것인지, DX를 통한 사업구조 전환을 의미하는 것인지 내부적으로 헷갈리기 시작하면서 결국, 디지털화 수준에서 주저앉게 된다는 것이다. 머뭇거림은 곧 책임소지와 연결된다. "차라리 손 마사요시(손정의)같은 사람이 앞장서서 윽박지르면 모를까..." 경영진이 실패 가능성이 큰 DX전환에 책임지겠다고 나서지 않는 한, 밑에서 적극 나서기란 어렵다는 것이다.

디지털화를 결합한 새 비즈니스의 창출은 오래된 구조와의 결별을 의미한다. 일본의 경제전문가들은 '모노즈쿠리 정신(최고 품질의 제품을 생산해야 한다는 장신정신)'을 버려야 산다는 내부의 경고음을 울리고 있으나, 산업구조 전환은 쉽지 않아 보인다.
이미 일본은 글로벌 DX경쟁에서 뒤쳐진 상태다. 일본 전체 시총을 다 합쳐도 미국 GAFA(구글·애플·페이스북·아마존) 4개사 시총에도 미치지 못한다.
자본주의의 대전환기, 전통의 모노즈쿠리 정신을 강조하면 할수록, 실리콘밸리 경제와의 격차는 더욱 벌어질 수 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ehcho@fnnews.com 조은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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