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 경상남도교육청이 지역 일선 학교에 보급한 노트북(스마트 단말기)에서 보안 취약점 등 문제점이 지적되자 해당 단말기를 전량 회수했지만 촉박한 일정에 검증되지 않은 업체를 통해 물량 밀어내기에만 급급한 정황이 드러나 재차 도마에 오를 소지가 높아 보인다.
앞서 경남교육청은 5월 말 학생들에게 지급한 스마트 단말기에서 게임 설치와 실행이 가능하다는 지적이 나오자 문제가 된 단말기를 모두 거둬들였다. 경남교육청은 당시 게임 설치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관리 프로그램을 설치한 후 일주일 안에 재배포하겠다는 계획을 밝힌 바 있다.
하지만 본지 취재 결과 경남교육청이 약속한 시점이 한참 지난 한 달여가 다 돼서야 단말기 재배포를 겨우 완료한 것으로 나타났다. 일주일이란 시간 안에 수만대에 이르는 단말기 재설치 작업을 완료해 재배포할 것이란 발상이 탁상공론이라는 지적도 이미 적지 않았다.
실제 경남교육청의 스마트 단말기 재배포 사업을 수행한 한 사업자의 경우 6월 초 당시에만 약 10만여대의 물량을 처리해야 한다고 언급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남교육청은 회수 단말기가 7만여대라고 밝혔는데 이 사업자가 언급한 물량은 여기에 향후 배포할 최초 지급 단말기 대수도 일부 포함된 것으로 추정된다. 무엇보다 경남교육청이 해당 사업자의 전문성보다는 얼마나 빨리 단말기 물량을 밀어낼 수 있는지에만 관심을 가진 것으로 판단되는 정황이 여럿 포착됐다.
▲경남교육청의 스마트 단말기 재배포 사업을 수행한 경남 창원의 한 사업장에서 작업을 기다리는 노트북과 작업을 끝낸 노트북이 사업장 한켠에 쌓여 있다. 적재된 노트북 뒤 술이 가득 찬 냉장고가 해당 사업장의 현주소를 잘 말해준다.
관련업계 제보에 따르면 경남교육청으로부터 작업 속도가 빠르다고 인정받은 이 사업자는 애초 창원의 한 비어 있는 술집에서 아르바이트생을 모집해 작업을 시작했다. 모집된 10여명의 아르바이트생은 술집 테이블에 50대 이상의 단말기를 펼쳐놓고 기존 프로그램 삭제 후 새로운 프로그램을 설치하는 등의 단순 업무를 수행했다. 이들 대부분은 컴퓨터 사용에 미숙한 일반인으로 작업 순서와 관련한 간단한 교육만 거친 후 바로 업무에 투입됐다.
이 사업자는 얼마 안 돼 아르바이트생 모집에 속도가 붙으면서 인근의 한 폐업 당구장으로 작업장을 옮겼다. 영업을 중단한 지 오래된 당구장이라 에어컨은 커녕 조명도 제대로 없는 환경이었지만 한 번에 작업할 수 있는 단말기 수는 100여대로 늘었다.
▲경남교육청의 스마트단말기 재배포 사업을 수행한 경남 창원의 한 폐업 당구장의 모습. 노트북이 늘어선 간이책상 위 천장에는 형광등이 다 떨어져 나가 있고 창문틀에는 '200 이하 마세이 금지' '당구대 앉지마세요' 등의 문구가 담긴 스티커가 여전히 붙어 있어 눈길을 끈다.
물량 소화 능력을 인정받자 이번에는 경남교육청에서 더 넓은 작업장을 제공해주겠다고 먼저 제안했다. 창원 내서중학교 내 폐쇄된 별관 교실로 기존 당구장 면적과 비슷한 교실 3개를 무상으로 대여해준 것. 덕분에 작업 속도는 3배 이상 늘었지만 여건은 여전히 열악했다. 오래된 건물로 몇 년간 왕래가 없던 곳이라 에어컨은 커녕 천장형 선풍기 몇 대만 있고 그마저도 고장난 선풍기가 여럿에 비가 오면 천장에 물이 새는 곳도 있었다고.
가장 큰 문제는 수백대의 단말기를 설치하는 과정에서 인터넷 공유기 한두대에 의지할 정도로 인프라가 취약하다보니 작업 속도는 더딜 수밖에 없는데도 담당자는 속도를 내라고 부추기면서 자연스레 날치기 작업으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유해사이트 차단 앱 등 일부 필수 보안 프로그램의 경우 인터넷 연결이 필요한데 설치가 더디다보니 이후 반드시 뒤따라야 할 검수 과정을 생략하고 설치 여부만 확인되면 통과시키는 식으로 출고가 이뤄졌다.
▲경남교육청이 스마트 단말기 재배포 작업을 위해 한 사업자에 대여해준 창원 내서중학교 내 폐쇄 별관 교실에서 아르바이트생들이 죽 늘어선 수십대의 노트북을 오가며 작업을 하고 있다.
수십명의 아르바이트생만 즐비한 상태에서 관리감독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은 탓에 일부 미숙한 아르바이트생이 작업 순서를 잊거나 실수를 해도 대충 넘어가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고 한다. 사업자는 인력 수급이 수월해지자 그나마 한 달 남짓 일한 기존 아르바이트생을 작업장 이전에 따른 교통비 미지급 등의 이유를 들어 그만두게 하는 ‘쪼개기’ 고용 행태까지 보였다.
이처럼 일당 지급 아르바이트생을 마구잡이로 모집하고 일관성 없는 작업 체계로 물량만 밀어내기에 급급한 사업자에게 경남교육청이 작업장까지 제공하면서 납품을 독촉해 재배포한 스마트 단말기에서 다시금 문제가 발생하지 않으리라 생각하는 게 오히려 이상할 정도다. 이 와중에도 경남교육청은 최근 물품 및 용역에 대한 통합계약으로 올 상반기 예산 128억원을 절감했다며 자화자찬하기에 바쁘다. 애초 스마트 단말기 보급 사업의 예산으로는 1578억원이 책정됐다.
▲경남교육청이 스마트 단말기 재배포 작업을 위해 한 사업자에 대여해준 창원 내서중학교 내 폐쇄 별관 교실 칠판에 주요 작업 순서가 적혀 있다. 최종적으로 노트북에 스티커를 부착하는 작업으로 이어지는 전체 과정에서 검수 등 전문적인 절차와 관련한 사항은 찾아보기 힘들다.
한편 경남교육청의 스마트 단말기 사업은 단말기 납품 및 유지보수 관리 전문기업 LG헬로비전과 경남 김해에 본사를 둔 단말기 운영 전문기업 BK시스템즈로 구성된 LG컨소시엄이 맡아 수행하고 있다.
내서중학교 작업장에서 근무한 아르바이트생의 경우 대부분은 근로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았지만 일부는 작성한 것으로 알려져 고용주의 실체도 머지않아 드러날 전망이다. 경남교육청은 향후 안평분교에 스마트 단말기 통합지원센터를 만들 예정이며 현재 단말기 작업장으로 쓰고 있는 내서중학교는 임시로 사용 중인 곳이라고 설명했다.
경남교육청 한 관계자는 이와 관련 “문제가 된 단말기에 대한 수정 보완 조치는 완료해 현재 재배포를 끝낸 상태로 애초 8월 말까지 진행하기로 한 전체 물량에 대한 추가 단말기 작업이 내서중학교에서 이뤄지고 있는 것은 맞다”면서 “우리로서도 생각치 못한 문제가 터지면서 다소 급하게 대응한 면이 없지 않지만 아직까지는 재배포한 단말기와 관련해 추가적인 오류는 보고된 바 없으며 앞으로는 세부적인 부분까지 잘 챙기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defrost@fnnews.com 노동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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