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퍼 '블랑 드 블랑 그랑 리저브', '그랑 아상블라주'
[파이낸셜뉴스] 동글동글 투박한 샴페인 병 속에 숨어있는 섬세한 향과 진한 맛에 반했다. 청사과, 흰꽃 등 가벼운 아로마에서 시작해 점차 서양배, 트로피컬 과일향까지 아로마 시트가 부채살처럼 펼쳐지며 장르를 오가는 한 편의 메들리를 들려준다. 그 부채살 꼭지점에는 진한 이스트 향과 버터리한 크로아상 향이 중심을 잡고 있다. 얼마 전 경험한 프랑스 상파뉴의 샴페인 하우스 '지퍼(Jeeper)'의 얘기다.
지난 8일 서울 강남의 한 식당에서 프랑스 상파뉴의 샴페인 하우스 '지퍼'의 샴페인 2종 '지퍼 블랑 드 블랑 그랑 리저브(Jeeper Blanc de Blancs Grande Reserve)'와 '지퍼 그랑 아상블라주(Jeeper Grand Assemblage)'을 만났다.
■'아로마 부채'가 쫙 펼쳐졌다..서늘한 향부터 열대과일 향까지 다 있네
지퍼 블랑 드 블랑 그랑 리저브를 먼저 열었다. 전용 샴페인 잔이 없어 일반 화이트 와인 잔을 사용했지만 오히려 이 와인의 장점이 더 도드라졌다. 샤르도네(Chardonnay) 100%로 만든 이 황금빛 샴페인이 뿜어내는 향기가 일반적인 수준을 훨씬 넘어선다는 얘기다. 잔에서는 담백하지만 묵직한 이스트 향과 버터를 듬뿍 넣은 크로아상 향이 먼저 올라온다.
입에 넣어보니 흰꽃 향 등 서늘한 아로마가 있지만 명확하지는 않다. 그러나 주된 아로마는 청사과다. 그 밑에는 약간의 트로피컬한 향도 깔려있다. 입속에서는 전용잔이 없어 눈으로 즐기지 못했던 기포가 본 모습을 보여준다. 입안 전체를 도포하듯 잘게 붙더니 퐁퐁 터진다. 좋은 샴페인에서 느낄 수 있는 잘게 부서진 기포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이번에는 열대 과실 향이 짙어지며 잘 익은 배 향이 주된 아로마를 이룬다. 청사과에서 배로 바뀌었다. 아이스 버킷이 준비가 안된 상태라 온도가 약간 올라가니 아로마 부채가 활짝 펴졌다. 그런데 그 꼭짓점에는 진한 이스트 향과 버터를 듬뿍 넣은 크로아상 향이 묵직하게 자리하고 있다. 마주앉은 시음자는 "여러가지 아로마가 차례대로 휘몰아쳐 마치 메들리 노래를 듣는 것 같다"고 표현했다. 실제로 흰꽃, 청사과부터 시작해 잘익은 배, 열대과일 아로마가 마치 릴레이 경주를 펼치듯 비강을 자극한다. 하지만 시작과 끝은 이스트 향과 크로아상 향이다.
이처럼 이스트 향과 크로아상 향이 입속에 계속 남는 것은 이 샴페인이 다른 샴페인보다 숙성 과정을 오래 가져가기 때문이다. 지퍼 블랑 드 블랑 그랑 리저브는 1차 오크 숙성을 2년간 진행한 후 병입을 하고 이후 병숙성을 5년이나 진행한다.
지퍼 샴페인의 인상적인 숙성 향은 병의 모양에서도 기인한다. 지퍼는 일반적인 샴페인 병과 달리 뭉툭하게 일자로 올라오다 병목 부분에서 갑자기 좁아지는 형태를 띠고 있다. 이는 병숙성 과정에서 산소접촉을 보다 넓게 만들고 쉬르 리(Sur lie) 과정을 극대화하기 위한 비법이다.
■발랄한 어린 소녀가 까르르 웃는듯..청사과 향과 쨍한 산도 매력적
지퍼 그랑 아상블라주를 열었다. 샤르도네 60%를 기반으로 피노 누아(Pinot Noir) 25%, 피노 뫼니에(Pinot Meunier) 15% 블렌딩 와인이다. 보다 짙은 황금빛 색깔을 띠는 잔에서는 이스트 향이나 크로아상 향이 진하게 올라오지는 않는다. 오히려 서늘한 아로마, 특히 청사과 향이 강하게 올라온다. 입에 넣어보니 아로마보다 먼저 쨍한 산도가 자극한다. 눈물샘을 자극할 정도로 강하다. 아로마는 잔에서 진동하던 청사과 향 그대로다. 쨍한 산도와 청사과 향, 마치 발랄한 어린 소녀가 까르르 웃는 듯 하다. 청사과 향이 그렇게 매력적일수가 없다.
바디감도 지퍼 블랑 드 블랑 그랑 리저브보다 가벼워졌다. 왜 샤르도네를 '화이트를 가장한 레드 와인', 피노 누아를 '레드를 가장한 화이트 와인'이라고 하는지 금방 알 수 있다. 아이스 버킷으로 와인의 온도가 내려가자 이번에는 이스트 향과 크로아상 향이 확 올라온다. 2년간 오크 숙성을 하고 4년간 2차 숙성 과정을 거친 것을 금방 티를 낸다. 이제 와인의 밸런스가 좀 잡혔다. 굉장히 발랄한 와인이다.
■보르도 특급 와이너리 '꼬 데스 뚜르넬'이 선택한 샴페인
샴페인 하우스 '지퍼'는 우리가 아는 군용 차량으로 유명한 오프로드 차량의 대명사 '지프(Jeep)'에서 유래한 샴페인이다. 지퍼는 1700년대 프랑스 상파뉴(Champagne)에서 샴페인을 만들던 가문으로 이 가문의 오너 구토르브(Goutorbe)가 2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군으로 참전했다가 연합군의 일원으로 중요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독일군에 포로가 돼 모진 고문으로 다리를 잃게 됐다. 그럼에도 연합군 작전 정보를 누설하지 않아 덕분에 연합군이 전황을 유리하게 이끌 수 있었다고 한다. 구토르브는 전쟁이 끝나자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거동이 불편해 농사를 지을 수 없었다. 그러자 미군이 이 프랑스 전쟁 영웅을 위해 군용 지프를 선물했고 구토르브는 이 지프를 타고 농장을 누비며 다시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됐다고 한다. 지프가 전쟁 영웅의 발이 돼 준 것이다. 구토르브는 이후 1949년 지프에 대한 고마움을 담아 샴페인 브랜드를 '지퍼(Jeeper)'라고 지었다.
샴페인 지퍼는 이후 2009년 프랑스 샴페인 하우스 뒤부아(Dubois)에 인수되며 품질이 높아지게 된다. 이 때부터 숙성기간을 더 길게 가져가고 샴페인 병 모습도 지금의 모습으로 바뀌게 됐다. 이어 2014년 프랑스 보르도 생떼스테프의 맹주로 불리는 '샤또 꼬 데스 뚜르넬(Chateau Cos d'Estournel)' 오너 레이비에(Reybier) 가문이 사들이며 지퍼의 명성이 한층 더 높아지게 됐다. 현재 뉴욕, 파리, 도쿄 등 미슐랭 레스토랑에 리스팅 된 와인으로 2019년에는 브리티시 에어라인 퍼스트 클래스 서비스 라운지의 목록에도 오를 만큼 유명세를 타고 있다.
kwkim@fnnews.com 김관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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