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이낸셜뉴스] 미국과 무역전쟁으로 첨단 반도체 대국의 꿈이 꺾였던 중국이 중저가 ‘레거시’ 반도체에 집중하며 새로운 도약을 꿈꾸고 있다. 이들은 한국과 대만, 서방 기업 등이 최첨단 반도체에 집중하는 사이 세계 경제에 반드시 필요하면서도 서방의 견제를 피할 수 있는 시장을 차지할 계획이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24일(현지시간) 국제반도체장비재료협회(SEMI) 집계를 인용해 2021~2024년까지 4년 동안 중국이 신설하기로 계획한 반도체 공장 숫자가 31곳이라고 전했다. 이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숫자로 같은 기간 대만(19곳)과 미국(12곳)이 계획한 건설 건수를 압도하는 숫자다. 중국은 현재 중앙정부 차원에서 반도체 프로젝트에 500억달러(약 65조6000억원) 이상을 투입하고 있으며, 지방정부도 별도의 유사한 반도체 투자 기금을 마련 중이다. 동시에 자격을 갖춘 기업들은 최대 10년까지 세금 감면 혜택을 받는다.
WSJ는 중국 기업들이 경쟁적으로 공장을 신설하면서 레거시 반도체에 집중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레거시 반도체는 마이크로컨트롤러칩, 전력관리반도체 등 비교적 옛날 공정으로 제작되어 구조가 단순하고 가격도 저렴하다. 이들은 최신 반도체가 7나노미터(㎚·10억분의 1m) 이하 공정으로 제작되는 반면 주로 28㎚ 공정으로 생산된다.
레거시 반도체는 비록 최첨단 제품은 아니지만 전자제품이나 자동차 등에 반드시 필요하다. 최근 몇 년간 이어진 반도체 공급 부족 사태 역시 주요 반도체 개발사들이 높은 마진의 첨단 제품에 집중하느라 마진율이 낮은 레거시 제품 생산을 줄여서 비롯됐다. 대만 TSMC는 최근 7㎚ 이하 공정의 최첨단 반도체 제품이 2·4분기 매출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면서 앞으로도 첨단 반도체 판매에 집중하겠다고 밝혔다.
반면 중국 최대 반도체 위탁생산(파운드리) 업체인 중신궈지(SMIC)는 지방정부와 협력해 상하이에 89억달러를 투자, 28㎚ 반도체 공장을 짓고 있다. 중국 최대 스마트폰 위탁생산업체 윙테크 테크놀러지도 올해 자동차 부품용 반도체 공장을 세워 연 40만장의 웨이퍼를 만들 계획이다. WSJ는 세계 최대 반도체 장비 업체인 미 어플라이드머티리얼즈(AMAT) 자료를 인용해 중국이 지난해 사들인 반도체 장비만 145억달러 규모라며 미 기업들이 수출 통제를 요청할 정도라고 전했다.
앞서 중국 정부는 2025년까지 중국 내 반도체 수요의 70%를 자급할 목적으로 칭화유니 같은 기업들에 공격적인 투자를 진행했다. 칭화유니는 자체적인 반도체 설계와 메모리 반도체 생산에 나섰으나 결국 경영난에 좌초됐다. 다른 중국 반도체 기업들은 미국과 무역전쟁에 희생됐다. 미 정부는 첨단 반도체 기술과 장비를 국가 안보 품목으로 지정해 중국 기업들의 접근을 막았다.
이에 중국은 질보다는 양으로 승부할 생각이다. 미 IT 컨설팅업체 IBS는 28㎚ 공정 반도체 수요가 2030년까지 281억달러(약 36조9000억원)로 10년 전에 비해 3배 이상 증가한다고 전망했다. 동시에 2025년까지 28㎚ 칩의 40%가 중국에서 생산될 것으로 예상했다. 2021년 기준 세계 28㎚ 반도체 생산량에서 중국의 점유율은 15%로 집계됐다. 중국은 2017년만 해도 자국에서 필요한 반도체의 13%를 자급했으나 올해는 26%까지 자급률을 끌어 올릴 것으로 보인다.
미 컨설팅 업체 베인앤드컴퍼니의 피터 핸버리 반도체 애널리스트는 미국과 동맹들이 구형 반도체에 충분히 투자하고 있는지 의문이라며 중국이 해당 분야의 공급망을 더 차지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편 중국 기업들도 첨단 기술을 포기 하지 않았다. 캐나다 반도체 정보업체 테크인사이츠는 지난 21일 가상자산 채굴 장비 업체 마이너바 반도체가 자사의 채굴용 반도체를 지난해 7월부터 7㎚로 생산했다고 보도했다. 마이너바는 어느 업체에 해당 반도체 생산을 맡겼는지 알리지 않았으나 테크인사이츠는 해당 제품을 위탁생산한 곳이 SMIC라고 지목했다.
pjw@fnnews.com 박종원 기자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