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뉴스1) 박준배 이수민 기자 = "내가 소리를 잘 못 들어요. 5·18 때 맞아서 뇌 손상으로 소리가 안 들리요. 보훈병원서 MRI를 찍어봉께 그때 맞어서 안 들리는 거라고…."
목소리 크기는 들리는 소리에 반비례한다.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그만큼 자신의 목소리는 더 커진다.
29일 오후 광주 광산구 월곡중앙경로당. 5·18피해자 김용기씨(76)의 목소리가 경로당 천장을 쩌렁쩌렁 울렸다.
애초 집에서 인터뷰하려고 했으나 대화가 잘 안 된다고 해 경로당으로 옮겼다. 김씨는 취재진을 만나자 "미안하다"는 말과 함께 청력을 잃은 사정부터 얘기했다.
질문과 답이 오고 가면서 기자의 목소리도 덩달아 높아졌다. 바로 옆에서 얘길 해도 못 알아듣는 경우가 많았다. 경로당에 있던 김씨의 지인들도 말을 거들었으나 답답했다.
노트북 화면을 김씨 방향으로 펼쳐놓고 인터뷰를 진행했다. 혹시나 김씨가 질문을 알아듣지 못하면 한글 화면에 큰 글자 크기로 질문을 적어 보여줬다.
"아이고, 나야 편하긴 한디 기자 양반이 너무 복잡헌 거 아녀? 미안혀. 내가 5·18 땜시 여기저기 죄인이 됐네."
80년 5월 김용기씨는 광주역 앞에 있는 '삼성화물' 사무실에서 화물차 운전일을 했다. 김씨는 주로 삼학소주 박스를 싣고 서울과 경기 등 수도권 배달을 담당했다.
삼학소주는 전남 목포를 기반으로 한 주조회사다. 목포 삼학도에서 따온 이름으로 60년대까지 전국 1위를 하던 국내 대표 소주였다.
1971년 '납세증지 위조'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은 후 73년 최종 부도 처리됐다. 80년 당시에는 삼학의 계열사인 삼원물산에서 '삼학소주'를 생산하며 명맥을 잇고 있었다.
먼 거리를 오가다 보니 늘 퇴근이 늦었지만,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언제나 가벼웠다. 스물여덟 살에 결혼한 이후로 두 남매를 낳아 키웠다. 아이들과 아내는 김씨가 몇 시에 귀가하든 매번 거실에서 그를 기다려줬다.
5월17일에서 18일로 넘어가던 자정 무렵이었다.
당시는 통행금지 시간이 있던 시절이다. 밤 12시부터 다음 날 새벽까지 통금시간이었다. 그 시간대에는 통행 제한을 받지 않는 화물차만 도로를 달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날따라 도로에 빼곡하게 차가 많았다.
여러 곳에 배달을 하느라 며칠 만에 광주에 온 김씨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의문의 차들을 유심히 쳐다보니 군용트럭이었다. 족히 수십, 수백 대는 돼 보이는 군용차량이 광주로 향하고 있었다.
"저거슨 뭐다냐 하고 계속 쳐다봤제. 전쟁이 난 건지, 간첩들이 들어온 것인지 알 수가 없응께…. 가족들 걱정도 되고."
송정리(현 송정동) 앞 검문소를 지날 때였다. 검문소 안에서 경찰 한 명이 나오더니 손을 휘저으며 김씨의 차량을 멈춰 세웠다.
경찰은 "오는 길에 누가 제지하진 않았냐", "뭐 이상한 거 본 것 없냐"고 물었다. 김씨가 군용차량 이야길 꺼내자 경찰은 "아마 계엄령이 선포된 듯하다"고 했다.
실제로 당시 전두환 신군부는 5월17일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김씨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사무실에 들르지 않고 곧장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돌아오니 다행히 가족들은 별일이 없었다. 김씨는 아내와 아이들에게 "무슨 일이 날 것 같으니 절대 밖으로 나가지 말라"고 신신당부한 뒤 잠을 청했다.
다음 날인 5월18일, 간밤의 상황이 걱정돼 집에 있고 싶었지만 회사에서 전화 연락이 왔다. 서울에 배달 갈 일이 있다고 했다. 김씨는 무거운 마음으로 사무실로 향했다.
광주역 근처에 있는 사무실에서 1차로 소주 박스를 싣고, 금남로와 광주공원으로 이동해 2차로 보따리 몇 개를 실었다.
그때 광주공원 앞에서 군인들이 곤봉으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폭행하는 모습이 보였다.
"당장 가서 '뭔 일입니까' 묻고 싶은디 지켜야 할 가족이 있고, 가야 할 길이 먼께 애써 외면했지요. 마음이 얼마나 무겁던지…."
광주공원에서 양동 부근을 지날 때였다. 한 할아버지가 도롯가에 앉아 피를 토하고 있었다. 김씨는 차를 갓길에 황급히 세우고 그에게로 다가갔다.
"한 70살은 묵어보이는 영감이 침을 뱉는데 피가 한 움큼인 거예요. 영감님이 공수부대에게 맞았다면서 '세상에 이럴 수 있는가' 하소연하시더라고…. 그 모습을 봉께 울화가 치밀어 오르드라고요."
광주공원에서 시민들이 폭행당하는 모습을 애써 외면했던 자신의 모습까지 분노로 더해졌다. 아무 죄 없는 시민을 왜 폭행하느냐고 군인들에게 따져 묻고 싶었다. 더 이상 배달 일이 중요하지 않았다.
영감에게 군인들이 어디 있냐고 물었다. 그는 한쪽 골목을 가리키며 그 근방에서 군인들에게 맞았다고 했다. 김씨가 황급히 골목 안쪽으로 가 보니 군인들은 낄낄거리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격분한 김씨는 곧장 몽둥이를 들고 군인들에게 따지려고 했다. 그때 주변에 있던 또 다른 시민들이 "감정적으로 굴면 해결을 할 수 없다. 시위대에 합류해 광주의 상황을 알리자"며 김씨를 만류했다.
그 말을 들은 김씨는 시위대가 모여있다는 광주공원 실내체육관 근방으로 갔다.
"딴 사람들은 '전두환 물러가라'를 외친디 나는 달랐어요. 전두환이가 뭐 하는 놈인 줄도 잘 모릉께…. 그냥 '군인들은 물러가라', '광주시민 내버려 둬라' 외쳤죠."
시민들은 투석전을 벌였다. 처음에는 구호만 외쳤던 김씨였지만 시간이 지나자 어느새 시위대의 선두에서 돌을 던지게 됐다. 그때 장갑차 위에 있던 지휘관급 군인이 "저 XX들 잡아!" 외쳤다. 순식간에 군인들이 김씨에게 달려들었다.
김씨는 잡히면 죽겠다는 생각에 골목 안쪽으로 도망쳤다. 추격자는 공수부대, 도망자는 시위대 십여 명이었다. 시위대는 울타리가 쳐진 한 주택 안으로 숨어 들어 가려고 했다.
하지만 시위대엔 성인 남성만 있는 게 아니었다. 김씨는 몸이 느린 한 여대생이 먼저 피할 수 있도록 다리를 굽혀 계단을 만들어줬다.
여대생이 울타리를 넘었고, 김씨가 뒤따라 넘으려는데 뒤통수를 무언가가 강타했다. 공수부대의 몽둥이였다.
공수부대는 김씨의 뒤통수를 내려친 뒤 그의 옷을 잡아끌어 내리고 무차별 폭행하기 시작했다. 뒤통수가 얼얼해졌고 귀에서 '삐-' 소리가 났다.
"잠깐만요! 귀가, 귀가 안 들려요! 잠시, 잠시만요!"
'삐-' 소리와 함께 오른쪽 귀에서 소리가 들리지 않자 김씨가 잠시만 멈춰달라고 했다. 그러나 군인들의 폭행은 계속됐다. 군인들은 김씨의 옷을 벗기고 팬티 차림으로 낮은 포복 자세를 시킨 뒤, 큰 도로까지 기어가라고 했다.
"귀가 안들링께 챙피한지도 몰랐어요. 그냥 계속 '아 왜 이러제' 하면서 기어갔습니다."
큰 도롯가에 세워진 군용트럭에 탔다. 트럭 짐칸에 엎드려 있는데도 군인들은 군홧발로 질근질근 머리와 어깨, 손을 밟았다. 그때 왼팔과 왼손 엄지손가락 뼈가 부러졌다.
"손가락 부러졌는데, 그건 뭐 걱정도 안 됐어요. 귀가 안들링께, 그것만 미치겄는 거예요. 잡혀 끌려가는 와중에도 소리가 안들링께 혼자만 얼 타고 있고…. 그러다 더 맞았죠."
오후 10시쯤 상무대로 옮겨졌다. 광주경찰서와 31사단을 들렀지만, 하도 잡혀 온 사람이 많아 수용할 곳이 없어 상무대까지 오게 된 것이었다.
트럭에서 내리자 수십 명의 군인이 기다리고 있었다. 군인들은 양쪽으로 서서 "고개 박아"를 외쳤다. 고개를 들면 "이 XX들아, 대한민국 공수부대가 우습냐"고 주먹이 날아왔다.
상무대 안에 있는 교회가 잡혀 온 사람들의 임시 거처가 됐다.
군인들은 유리창을 검은 보자기로 가린 뒤 "한 명씩 돌아가며 간첩인지 아닌지 조사를 받을 것"이라고 했다. 시민들끼리 어떠한 대화도 허용되지 않았고, 잠도 자지 못하게 했다.
다음날인 19일부터 조사가 시작됐다. 군인들은 21일까지 3일간 한 명씩 불러 취조를 했다. 자신이 조사를 받지 않는 시간에도 잠은 허용되지 않았다.
종일 앉아서 꾸벅꾸벅 졸다가, 취조를 받으러 가자 정신이 몽롱했다.
"아직도 뭔 질문을 혔는지 기억도 안 나요, 소리도 안 들리고 정신은 헤까닥하니 모르죠. 그냥 '예, 예, 대충 다 맞습니다' 했어요."
21일 오후였다. 군인들은 끌고 온 시민들을 전부 연병장에 모았다. 그들은 "바깥사람들이 요구하는 '구속자 석방'을 들어주기로 했다"며 "여기 있는 사람 중 빨갱이는 없는 것 같으니 조속히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김씨는 타고 왔던 군용차량에 다시 탑승해 금남로 시내에서 내렸다.
집으로 돌아가 아내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양동에 있는 한 병원으로 갔다. 왼팔과 왼쪽 손가락 부러진 것은 엑스레이로 확인할 수 있었지만, 귀는 영문을 알 수 없었다.
병원에서 20일간 입원 치료를 했지만 차도가 없었다. 그렇게 잃어버린 청력은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이후 김씨는 화물차 운전 일을 그만뒀다.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장거리 운전을 하며 위험천만한 사고가 날 뻔한 적도 많고, 남들 앞에서 위축되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배달을 하다가도 누가 뭐라고 해 "다시 한번만 이야기 해달라"고 하면 그들은 "에라이, 못 들으면 됐어요"라며 말을 멈추곤 했다.
"후천적 장애가 생긴 겅께 더 미치겄는 거예요. 넘들이 다 내 욕을 허는 것 같고, 흉보는 것 같고…. 거 군인 놈들한티 잘못 맞아가꼬 내 인생이 꼬인 거죠."
김씨는 80년 5월 이후 농촌에서 품앗이로 남의 농사와 공장 일을 도우며 간간히 생계를 유지했다.
1990년대 들어 의료기술이 발전하자 그제야 보훈병원에서 MRI(자기공명영상)를 찍었다. 귀가 안 들리는 것은 외부 충격(폭행)으로 인한 뇌 손상 때문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정부가 5·18 보상금을 지급한다고 했다. 김씨는 장애 10급으로 분류돼 5000만원을 받았다.
김씨는 보상금으로 전남 장성에 조그마한 논을 사 벼농사를 지었다. 돈벌이가 생기자 보청기도 맞췄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보청기를 사용해도 잘 들리지 않았다.
김씨는 정신적 손해배상금을 받으면 오랜 고통의 시작인 '귀'를 고치고 싶다고 했다.
인터뷰 진행 중에 경로당에 모인 김씨의 동네 주민들도 하나같이 "귀가 문제"라고 입을 모았다.
한 주민은 "국가에서 이 양반 귀에 뭐라도 해줘야 한다"며 "소리가 안 들리니 우리도 답답하고, 이 양반도 미칠 것 같아 한다"고 거들었다.
주변 사람들도 답답하지만 가장 억울한 건 김씨다. 그는 아직도 42년 전 그날 이전의 청력을 기억한다.
"잘 들리던 귀가 안 들리는 것은 신체적 고통이 아니에요. 맨날 잘 들리고, 노래도 듣고 하던 것이 40년 전 어느 날부터 갑자기 안 들리고 장애인이 됐으니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어요. 다시 소리를 듣고 싶은 것이 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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