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검찰·법원

휴정기에 '깡치사건' 들여다보는 판사들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2.07.31 08:13

수정 2022.07.31 08:57

기록 방대·내용 파악 어려운 '깡치사건'
품 들여도 보람 없는 사건 이르기도
재판 업무 없어도 '깡치사건'에 여념
/사진=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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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낸셜뉴스] 재판을 잠시 쉬어가는 법원 휴정기에도 판사들은 이른바 '깡치사건'을 들여다보느라 분주하다.

깡치사건은 기록이 방대하고 내용 파악이 어려워 품이 많이 드는 사건을 이르는 법조계 은어다. 더러는 공력을 쏟은 만큼 보람을 찾기 어려운 사건을 가리킬 때도 있다. A 현직 판사는 "각 재판부가 맡는 200~300건 사건 중 5%가량은 깡치사건이라고 보면 된다"고 했다. 그 어떤 판사도 깡치사건을 피해 갈 순 없다.
그래서 1년에 두 차례, 여름과 겨울 휴정기는 일상적인 재판 업무가 사라져 여유가 생기는 만큼 두꺼운 기록을 펼치기에 좋은 때다. 보통 2~3주간 주어지는 휴정기에 일주일은 휴가를, 나머지 시간에는 이 깡치사건을 들여다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부장판사 출신 B 변호사는 "10년 전에는 법원 휴정기에도 휴가를 반납하고 일하는 게 미덕이었다"고 했다.

■'나 홀로 소송'·'민원성 사건'에 많아
깡치사건은 보통 민사사건에 많다. 대리인 없이 '나 홀로 소송'을 하는 경우 소송 경험이 없는 당사자가 직접 나서면서 서면의 질이 떨어지는 경우 사건 파악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A 판사는 "무엇을 주장하고자 하는지 본인도 모르다 보니 불안해서 두꺼운 서면이 제출되는 경우가 있다"고 했다. 부장판사 출신 C 변호사는 "페이지 수에 따라 돈을 받는다거나, 의뢰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 10페이지면 가능한 내용을 100페이지까지 쓰는 대리인들도 있다"고 했다.

빌린 돈을 받기 위한 구상금 소송은 대표적인 깡치사건의 예다. 곗돈과 관련된 소송은 장부도 없고, 있더라도 '철수엄마', '홍길동 미용실'처럼 실명이 아닌 기록들이 대부분이라 사건의 전모를 파악하기 더욱 어렵다. 빌려주고 받지 못한 돈을 두고 벌이는 소송이다 보니 양측 간 사연도 구구절절하다. 언제 서로를 처음 만났는지, 서로에게 어떤 점들이 서운했는지 등 온갖 사연들이 법정에서, 또 서면을 통해 쏟아진다. '그때 밥을 산 것으로 일부 변제했다'거나, '수백만원짜리 모피코트로 갚았다'는 식의 얘기까지 나온다. '언제 돈을 빌렸고, 언제 얼마를 갚았다'는 사실관계를 파악해야 하는 판사들 입장에서 곤란한 경우가 적지 않다. 이 때문에 '깡치사건'은 판사 입장에서 '들여다보기 좀 꺼려지는 사건'이기도 하다.

/사진=뉴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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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 반납한 채 휴정기 내내 '깡치사건' 들여다보기도
3주간의 법원 휴정기 내내 깡치사건을 들여다보는 경우도 없지 않다. 수년 전 군 내 의문사 사건의 항소심을 맡았던 부장판사 출신 C 변호사는 일주일 내내 군 관계자 50명 이상의 진술 기록 2만페이지를 훑었다고 했다. 당시 사건 쟁점은 군 내에서 사망한 군인의 죽음을 타살인지 극단 선택인지를 가리는 것이었는데, 2심에서 1심 판단이 뒤집히면서 판결문을 다시 새로 써야 했다. 80여쪽이 넘는 판결문을 쓰는 데만 또 일주일이 걸렸다고 한다.

2년마다 재판부가 바뀌었던 탓에 여러 판사의 손을 거치며 '깡치사건화'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사건 파악을 위한 품은 많이 드는데 재판부가 여러 번 바뀔 동안 결론이 나지 않은 사건은 종국에는 '누구도 손댈 수 없는 사건'이 된다.

또 다른 부장판사 출신의 D 변호사는 부장판사로 근무할 당시 '전기요금 누진제 소송'을 맡게 됐다. 전기요금 누진제 소송은 '누진제 적용은 평등권 침해'라며 차액을 돌려달라는 소송으로, 당시 전국 주요 도시 법원에 제각기 제기됐다. D 변호사가 사건을 맡을 당시에는 이미 소송이 제기된 지 3년가량 지나 있었다. 어떤 판결을 내려도 부담스러운 사건이었다. D 변호사는 선고기일을 인사가 있는 2월로 잡고 고민에 빠졌다. D 변호사는 "다음 재판부에 판결을 미루고 싶다는 유혹이 없지 않았다"고 했다.

서울 서초구 대법원 모습. /사진=뉴스1
서울 서초구 대법원 모습. /사진=뉴스1

깡치사건은 법원의 사건 적체 문제와도 맞물려 있다. 2년마다 한 번씩 재판부가 바뀌었던 탓에 소송 당사자도, 바뀌는 재판부도 지리한 재판과정을 반복해야 했다.

대법원이 올 초 한 재판부에서 재판장이 근무하는 기간을 확대한 것도 이 때문이다. 지난 2월부터 개정·시행 중인 '법관 등의 사무분담 및 사건배당에 관한 예규'에 따라 재판장이 한 재판부에서 근무하는 기간은 기존 2년에서 2년 이상으로 늘어났다.


A 판사는 "재판부가 바뀌면 새로운 재판부는 기록을 처음부터 다시 봐야 한다"며 "재판부 사무분담 기간 확대는 깡치사건 문제를 해소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있을 것"이라고 했다.

clean@fnnews.com 이정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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