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문화일반

산업재료인 스테인리스·철근에 '표정'을 불어넣다 [K-스컬프처와 한국미술]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2.08.11 18:04

수정 2022.08.11 18:04

(5) 한국적 미니멀리즘 조각
심문섭 'Point-77'
심문섭 'Point-77'
귤화위지(橘化爲枳). 귤이 회수를 넘으면 탱자가 된다고 했다. 하나의 양식이 생산되고 널리 퍼져가면, 그 양상은 외형은 유사하되 달라질 수밖에 없다. 오히려 달라지지 않는다면 게으른 것이다. 따라서 귤화위지의 해석이 비아냥거림에 닿을 수 없는 것이 예술에서의 경우이다. 새로운 양식을 수용하는 경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지점이 달라 결과적으로 작가마다 작풍이 다르게 나타나기 마련인 탓이다.


미국에서 시작한 사조로서는 최초로 국제적인 양식이 된 미니멀리즘 조각은 몇 가지 원리에 따른다. 미니멀리즘 조각은 산업재료를 사용하고 그 재료를 조작하지 않고 단일하면서도 규칙적이고 대칭적이며 색채는 건조하고 직설적인 것을 특징으로 한다. 오죽하면 칼 안드레는 자신의 작품을 일러 "단지 하나 다음에 또 하나"라는 구조로 설명했을까. 그것은 구성되거나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조립되거나 단순히 쌓아올려진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미니멀리즘 조각에서는 이러한 '원칙'은 낯설다. 공장에서 생산된 재료, 규칙적인 반복 구조라는 원칙은 애초부터 한국의 미니멀리즘 조각에 해당되지 않았다. 그것은 오히려 물질이 가진 표정을 극대화한 작가의 의지가 반영된 물성의 조각이었던 때문이다.

미니멀리즘은 산업사회의 표식과도 같은 양식이다. 조각의 물질을 확장시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재료로 사용하고, 작가의 손이 아닌 시스템 안에서 생산 가능한 체계를 갖춘 양식이다. 한국에서도 미니멀리즘 조각은 이러한 사회적 변화와 함께하였다.

한국에서 스테인리스 스틸이 일상에서 힘을 발휘한 것은 주방용품으로 사용되면서부터이다. 마당에 가마니를 깔고 겨울 동안 사용할 유기그릇을 닦는 일을 그만두게 한 것은 스테인리스 스틸 밥그릇이 등장했기 때문이었다. 유기보다 가벼울뿐더러 변색되지 않으며 공장에서 생산되어 가격도 저렴하였다. 공장생산품답게 작은 합모양으로 만들어진 밥그릇은 1970년대 들어서는 밥량이 동일한 '표준'이 되어 식당에서 사용됐다.

1968년 '국전'에서 문공부장관상을 받은 심문섭의 작품은 새로운 재료인 스테인리스 스틸을 이용하였다. 하지만 재료의 속성을 서구의 미니멀리즘 작가들이 선택한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사용하였다. 절단되고 꺾이고 구부려진 스테인리스 스틸은 내부의 응축된 에너지를 표현하기에 적합한 재료로 사용되었다. 건축 재료인 철근을 이용한 전국광의 작품도 작가에 의해 구성되고 용접되었다. 표정을 갖는 조각은 건조하고 무표정한 미니멀리즘과는 다른 것이다. 오래된 조각의 재료 중 하나인 돌이나 나무 또한 예외는 아니었다. 표면에 작가에 의한 일정한 자국을 냄으로써 수공을 가미하여 공장식 생산에서 멀어져 갔기 때문이다.

미니멀리즘에서 극대화하여 나타난 것은 물질을 다루는 방식에서 서양과는 다른 접근법이다. 생산 시스템의 표출이 아니라 물질 자체의 성격을 드러내는 조각의 방식은 외형은 단순하고 반복적인 형태를 사용하는 미니멀리즘을 따랐다.
하지만 물질 내부에 있는 힘, 에너지의 발현에 집중한 결과, 반복이 아닌 증식으로 나아갔다. 내부의 에너지에 집중하는 순간, 물질의 결을 따르는 태도는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오래된 한국의 자연관을 반영한다.
새로운 양식을 지향하면서도 한국의 전통에 기반한 사유를 적용시켜 새로운 양식을 창출한 것, 그것이 미니멀리즘이 바다를 건너 확장된 한국적 미니멀리즘의 모습이다.

조은정 고려대 초빙교수·미술평론가

fnSurv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