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연합뉴스) 현경숙 기자 = 바짓가랑이를 걷어 올리고 냇가에 발을 담근 채 치던 물장구, 친구들과 물 끼얹기 싸움을 할 때 허공에 흩어지던 하얀 물보라…. 이제는 아련해진, 지난 여름의 추억들이다.
◇ 꽃잎처럼 흩어진 아름다운 시절
맑았던 계곡은 오염됐고, 남아 있는 청정 계곡들은 상수원, 환경 보호 등을 이유로 물놀이가 금지된 곳이 대부분이다. 물놀이 풍경이 사라져가는 요즘 보기 드물게 깨끗하면서도 물놀이가 허용된 장소가 경기도 양평 중원계곡이다. 우리 정서에 깊이 녹아있는 물놀이의 즐거움이 살아나는 곳이다.
중원산(해발 800m)은 양평의 진산인 용문산(1,157m) 동쪽에 솟아 있다. 웅장한 용문산의 명성에 가려 덜 알려졌지만 용문산 못지않게 장엄한 바위산이다. 중원산, 백운봉(940m), 도일봉(864m)은 용문산을 주봉으로 한 지봉들이다. 네 산이 연봉으로 우뚝 솟아 절경을 이룬다. '경기도의 금강'이라 불리는 이유다.
중원산에는 걷는 데 4~7시간 걸리는 탐방로 4개 코스가 조성돼 있다. 이 중 중원산 주차장∼중원폭포∼숯가마 터∼돌무더기∼중원산 정상∼절벽 전망대∼소나무 숲길 코스는 맑고 깨끗한 중원계곡을 끼고 걷는 길이다. 거리는 5∼6㎞. 걷는 속도에 따라 5∼6시간 걸린다. 중원폭포를 지나 정상으로 향하는 길은 꽤 가파르다.
약간 힘들 수 있지만, 쉬엄쉬엄 올라가면 체력 단련에 적당한 정도라는 생각이 들 것 같다. 오르막이 부담스럽다면 소나무 숲길 쪽에서 시작해 절벽 전망대를 지나, 중원계곡으로 내려올 수도 있다.
어느 쪽에서 시작하든 탐방을 끝낸 뒤 차가운 계곡물에 발과 몸을 담그면 그 상쾌함이 산행의 피로를 날려버리고도 남을 것 같다.
무더운 여름에는 등산이 힘들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실제로 해보면 그렇지 않다. 계곡 옆 숲길을 걸으면 도심에서 지낼 때보다 훨씬 시원하다. 나뭇잎 터널이 그늘을 만들어주고 산골짜기에 흐르는 시냇물이 주변 온도를 낮춰 서늘한 기운을 느끼게 해준다.
중원계곡 주차장에서 10~20분 올라가면 중원폭포를 만날 수 있다. 높이가 10m 안팎인데 삼단 폭포를 이룬다. 물줄기는 기암괴석들 사이로 용트림하듯 허리를 꺾고 또 꺾었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폭포 옆 바위 절벽은 여름에 다이빙 장소로 주목받았다.
지금은 안전사고 우려 때문에 폭포 아래 소(沼)에서 수영이나 다이빙을 할 수 없다. 소는 짙은 초록빛을 띨 뿐 눈으로는 바닥을 가늠할 수 없었는데 깊이가 3m나 된다고 한다.
◇ 참나무 숲과 숯가마 터…소나무들은 어디로 갔을까?
중원폭포를 지나면 길은 중원산 정상과 도일봉 쪽으로 갈라진다. 중원산 정상으로 가는 길은 많은 돌과 바위가 흩어져 깔린 너덜길이다. 폭포에서 정상 사이에는 숯가마 터가 셋이나 있었다.
양평쉬자파크 산림교육센터의 최은정 숲해설가는 중원산에는 숯으로 쓰이는 참나무 숲이 크다고 했다. 그러면서 숯가마 터는 중원산을 터전 삼아 살았던 옛사람들의 생활상을 보여주는 흔적이라고 설명했다. 192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중원산 일대에는 숯가마가 많았으며 주민의 대부분이 숯과 관련된 일에 종사했다.
굴참나무, 떡갈나무, 갈참나무, 신갈나무, 상수리나무, 졸참나무 등 '참나무 6형제' 중 유난히 굴참나무가 눈에 많이 띄었다. 재질이 무겁고 단단해 지붕 재목으로 애용됐던 굴참나무는 껍질에 두꺼운 코르크가 형성되기 때문에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중원산에서 자라는 굴참나무들은 유난히 수피가 두꺼워 나그네의 탄성을 자아냈다.
탐방로 주변에는 참나무 종류 외에도 눈길을 끄는 꽃과 나무가 많았다. 60~70년대 '국민 영양제'였던 원기소 냄새가 나는 누리장나무, 잎이 커서 수줍은 새색시 얼굴도 가릴 것 같은 쪽동백, 벌써 열매가 맺힌 참다래, 가을에 잎을 태우면 노란 재가 나오는 노린재나무, 나뭇가지가 여러 단을 형성하며 자라는 층층나무, 영하의 날씨를 견디는 청보랏빛 산수국, 태양 빛보다 짙은 주황색의 하늘말나리, 하나하나의 꽃송이가 모여 긴 꽃다발을 이루는 까치수염….
개다래는 벌과 나비를 유혹하기 위해 여름에 초록 잎을 눈에 잘 띄는 흰색으로 바꾸는 독특한 생존 전략을 쓴다.
숯가마 터들을 지나 정상 가까이 가면 특이한 돌무더기가 넓게 펼쳐져 있다. 그 끝에 수령이 몇십 년, 혹은 몇백 년 될 것 같은 함박꽃나무가 있었다. 산목련이라고도 부른다. 늙은 산목련은 가파른 돌 비탈에 굳건히 서 있었다.
봄이면 이 나무가 피우는 희고 큰 함박꽃은 척박한 환경을 이겨내는 고귀함의 상징일 테다. 함박꽃은 천년화라고 일컫는다. 돌무더기까지 걸어오는 동안 울창한 숲은 계속됐다.
특이한 것은 한반도에 흔한 소나무를 보기 어려웠다는 점이다. 소나무는 정상 가까이 도달해서야 발견할 수 있었다. 능선 주변에는 적송 군락도 군데군데 형성돼 있었다.
최 해설가는 소나무로 만든 숯은 참나무 숯보다 품질이 훨씬 좋고 비싸다며 접근하기 쉬운 곳의 소나무들은 숯 만드는 데 쓰이느라 베어졌을 것으로 유추했다. 산길을 걷는 숲 연구가의 인문적 해석이 자못 흥미로웠다.
능선 길에는 끝이 날카로운 바위가 많아 걷는 것이 한편 긴장되기도 하고, 한편 지루하지 않고 재미있기도 했다. 낭떠러지 가장자리에 오래된 소나무가 위태롭게 버티고 있었다. 절벽에서 살아남기 위해 뿌리를 땅 안쪽으로 길게 뻗었다.
그 탓인지 굵은 나무줄기는 동물의 엉덩이 볼기를 연상시키는 특이한 모양으로 변형돼 있었다. 끈질기고 강한 생명력의 표상이었다.
◇ "치유 인자의 보고"…산이 우리를 부른다
하산 길은 돌과 바위가 별로 없는 편안한 흙길이었다. 출발지에 원점 회귀한 뒤 시원한 계곡물에 몸과 마음을 풀었다. 평일인데도 물놀이객이 적지 않게 모여 있었다. 쨍쨍 내리쬐는 햇볕처럼 마음이 밝아지는 여름을 실감했다.
흐르는 물의 리드미컬한 소리가 마음을 가라앉힌다. 최 해설가는 "푸른 하늘과 숲, 계곡물 소리, 나무 향기, 땅의 기운, 물에서 발생하는 음이온, 서늘한 공기 등 오감을 통해 전해지는 치유 인자가 무궁무진한 곳이 산"이라며 "산에서 사람은 편안해지고, 치유되고, 자신의 참모습으로 돌아간다"고 강조했다.
어차피 내려갈 산을 왜 오르는지 알 수 없다는 말들을 한다. 단지 저기 산이 있어 오른다고도 한다. 산은 극기와 정복의 대상만은 아닌 것 같다.
우리가 산을 찾는 것은 산에서 생명력이 충만해짐을 생각지도,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체험하기 때문이지 싶다. 한국에서 산은 가까이 있고, 그다지 험하지 않다. 치유의 장소로 한국의 산만한 곳도 많지 않을 성싶다.
※ 이 기사는 연합뉴스가 발행하는 월간 '연합이매진' 2022년 8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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