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스1) 박우영 기자 = "얼마 전에 다른 유학생 친구가 클럽에 갔다가 경비원한테 내동댕이 쳐져 발길질을 당했어요. 그런데 현장에 출동한 경찰관은 언어적으로 잘 소통이 되지 않아서인지 친구를 병원에 데려가지도 않았고, 가해자도 그냥 돌려보냈어요."(미국인 유학생 A씨)
최근 'K컬쳐' 등의 영향으로 한국을 찾는 외국인 여성 유학생이 늘어나면서 이들에 대한 성폭력 범죄도 늘어나고 있다. 유학생 중 절반 가까이가 성폭력 피해를 경험했다는 조사도 있지만 언어 장벽으로 인해 성범죄 발생 현장에서 제대로 된 조치가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성범죄의 경우 피해자 보호는 물론 최종 처벌까지 이어지기 위해서는 초기 대응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유학생들 "성범죄 당해 신고했지만…출동 경찰과 소통안돼 접수 포기"
11일 <뉴스1> 취재를 종합하면 외국인 유학생들이 성범죄 피해를 당한 일이 적지 않았다. 또 현장에서 이뤄진 경찰 대응 등에 대해서도 아쉬움을 표했다.
영국에서 유학 온 B씨(24)는 올해 이태원의 한 클럽에 놀러갔다가 처음 본 남성들에게 강제로 입맞춤을 당하고 사진을 찍히는 등 성추행을 당했다고 밝혔다.
B씨는 곧바로 경찰을 불렀지만, 현장에 출동한 경찰관들이 B씨의 설명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고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아 결국 신고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고 설명했다.
B씨는 "경찰 측 통역가가 연결되기도 했지만, 영어에 능통하지 않아 소통이 매끄럽지 않았다"며 "또 (통역가를 통해) 질문받은 내용이 피해자를 돕기 위한 게 아니라 비난하려는 듯한 내용이라고 느껴져 충격을 받았다"고 덧붙였다.
성추행 등 여러 차례 성폭력 피해에 노출된 적 있다고 밝힌 미국 국적 30대 여성 C씨 역시 "일선 경찰서에 영어가 능통한 경찰관이 한 명쯤은 있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C씨는 "(성범죄 피해를 당한 뒤) 의사소통이 되는 경찰관을 찾아 여러 경찰서를 돌기도 했다"며 "외국인이 피해를 당할 경우, 경찰에 신고하려면 본인 언어와 한국어 모두 능통한 사람에게 따로 부탁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고 강조했다.
◇경찰 통역인 제도 있지만 처우 열악…"통역 수준 떨어져 문제"
현재 경찰에서는 '경찰 통역인 제도'를 두고 통역인을 선발해 국내 체류 외국인이 범죄 피해를 보거나 피의자 신분으로 경찰 조사를 받을 때 투입하고 있다.
문제는 이들의 통역 지원이 주로 경찰서 단위로 사건이 이관됐을 때 이뤄지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점이다. 초동 대처가 중요한 일선 지구대나 파출소 단위의 성범죄 현장까지는 잘 이뤄지지 않는 상황이다.
한 일선 경찰서 여성청소년과 관계자는 "서울지방경찰청에서 통역인이 지원되는 등 제도 자체는 외국인도 차별 없이 보호받을 수 있도록 마련돼 있다"면서도 "성범죄는 피해자 본인이 언어적으로 능숙해도 표현이 정확히 되기 어려운 부분인데, 한 다리를 건너면 내밀한 수사는 힘든 것이 사실"이라고 설명했다.
신진희 성범죄 전문 국선 변호사는 "성범죄는 목격자나 폐쇄회로(CC)TV도 없는 곳에서 발생하는 경우가 많아 물리력, 강제력 행사가 있었는지를 피해자 진술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며 "예를 들어 '옷을 벗겼다'라는 말의 경우에도 옷을 찢었는지, 단추를 풀었다는 건지 등을 자세하게 물어봐야하는데 통역이 제대로 이뤄져야만 합의 여부 등 사실관계를 파악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같은 맥락에서 경찰 통역인의 통역 수준에 대한 문제 지적도 나왔다. 책정된 통역비가 낮고 처우마저 열악한 탓에 적절한 통역인 수준을 담보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이에 대해 한 여성 상담센터 관계자는 "실제로 경찰청에서 통역 지원을 나오신 분들이 잘 세팅이 안돼 있는 경우가 많아 충분히 전달이 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고 생각한다"며 "다른 외국인 관련 기관 쪽에 통역을 요청해서 받기도 한다"고 귀띔했다.
신 변호사도 "외국인 피해자 수사 때 같이 동석하면 통역 실력이 떨어지는 분이 오는 경우도 있어, 반드시 영상 녹화를 함께 하자고 한다"며 "범죄와 관련된 통역은 대충 알아듣는 관광용 영어 수준으로 해서는 안되고 한 마디 한 마디가 중요하기 때문에 자질이 부족하신 분들이 오면 문제가 생길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女 외국인 유학생 47.3% "성폭력 피해 경험"…피해자 34% "전문통역 필요"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국내에 체류 중인 외국인 유학생은 지난 2011년 8만9537명에서 2배 가까이 늘어난 16만3697명에 달한다. 이 중 여성 유학생은 절반 이상인 8만6857명이다.
지난 2월 학술지 '다문화사회 연구'에 기고된 논문 '외국인 여성 유학생의 성폭력 안전실태 및 개선방안 연구'(공동저자 김은정 정세미)에 따르면 여성 유학생 410명을 상대로 '최근 3년 이내에 한국에서 성폭력 피해를 경험했는지'를 묻자 47.3%(194명)이 '그렇다'고 답했다.
연구에서 '성폭력 피해 피해자들에게 필요한 지원 대책'을 묻는 질문에 성폭력 피해 경험 유무에 따라 가장 응답률이 극적으로 변한 요소는 '전문통역 지원'이었다.
피해 경험이 없는 집단에서는 14.8%가 전문통역 지원이 필요하다고 답했으나 피해 경험 집단에서는 이 응답이 34%로 치솟았다. 실제 피해자들이 형사사법체계상 통역지원이 미비하다고 느꼈음을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다. 피해자들이 실제 도움을 청한 사례도 가장 많아 제도 개선이 시급하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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