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유가 먼저인가 언어가 먼저인가? 약 20년 전쯤 대학의 교양 수업에서 이 질문을 받고 머리에 쥐가 났던 적이 있다. '닭이 먼저인가 달걀이 먼저인가?'라는 질문에 답이 없던 것처럼 도무지 명확한 설명이 떠오르지 않았다. 생각의 재료가 언어이니 만큼 언어가 먼저인 것 같다 가도, 언어 이전에도 분명히 사유가 있었을 테니 언어가 먼저인 것도 같았기 때문이다.
■사유가 먼저다
지금은 답을 알고 있다. 언어보다 사유가 먼저다. 학술적으로 배운 것은 아니지만 경험, 직관, 논리에 기반해 몇 가지 근거를 댈 수 있다. 첫째, 언어가 있기 전부터 인간의 사유는 존재해 왔고 언어를 발명할 수 있었던 것도 인간의 사유에 기반한다. 둘째, 언어의 발명 이후 사유의 재료는 언어가 됐고, 사유의 양과 질이 급속하게 발전하는데 큰 기여를 했지만 언어 없는 사유도 가능하다. 셋째, 사유의 양과 질을 측정하는 '지능'을 보더라도 언어가 없는 다른 동물도 지능이 있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언어보다 사유가 먼저라고 할 수 있다. 넷째, 숫자와 기호의 발명 이전에도 수학적 사고가 존재했던 것처럼 언어의 발명 이전에도 인간의 사고는 존재해 왔다 등등 여러가지 설명이 가능할 것이다.
근데 철학의 아버지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를 모든 학문의 제1 원리로 정립했다. 전지 전능한 악마가 인간의 모든 감각을 속일지라도 생각하는 나 자신의 존재 자체는 부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물론, 극도로 발달한 과학 문명이 인간의 뇌 자체를 조작해 매트릭스의 세계에 가둬두고 생각한다는 착각을 심어주는 일도 가능하겠지만 일단 여기선 그냥 넘어가기로 하자.
역사 학자 유발 하라리는 그의 저서 사피엔스에서 지구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생물 종 가운데 인간(호모 사피엔스)이 지배자가 될 수 있었던 단 한 가지 이유로 '거짓을 상상하고 그것을 집단적으로 믿을 수 있는 능력'이라고 주장했다. 불의 발명도 아니고, 언어의 발명도 아니라 속된 말로 '구라를 믿는 능력'이라고 한 것이다. 개별 개체로서 한 인간이 현실에서 맺을 수 있는 최대한의 물리적 관계는 기껏해야 수백이지만 '신', '돈' 과 같은 보이지 않는 개념을 만들고, 70억 전 지구의 인간이 그것을 믿으며 기업, 국가, 지구촌 이라는 거대한 덩어리를 형성해 지구를 지배하게 된 것이다. 물론, 허구를 상상하고, 그것을 집단적으로 믿기 위해서는 그것을 전달, 전승하는 역할을 '언어'가 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닥터 스트레인지 형이 여기서 왜 나와
14만605개의 미래를 보고 타노스와의 최후의 전투에서 승리한 단 한 개의 가능성을 찾아낸 닥터 스트레인지를 연기한 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를 우리는 모두 알고 있다. 그 이전에 그는 영국 드라마 셜록에서 '셜록 홈즈'를 연기한 배우로도 유명했다. 하지만 그가 근대 컴퓨터와 인공지능에 대한 선구자인 '앨런 튜링'을 연기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우리의 닥터 스트레인지 형은 2014년 개봉한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에서 앨런 튜링을 연기했다. 영화의 대략적인 내용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은 절대 풀수 없는 독일군의 암호 '에니그마'로 인해 연전연패를 하게 되고, 이를 역전하기 위해 수학자인 앨런 튜링이 근대 컴퓨터의 기본이 되는 암호 해독기를 개발해 전쟁에서 승리한다는 내용이다. 앨런 튜링이 개발한 암호 해독기 덕분에 세계대전에서 1400만명의 생명을 구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전쟁 영웅으로 영국에 돌아왔으나 당시 영국에서 불법이던 동성애 혐의로 체포되고 화학적 거세형을 받게 된다. 그 후 2년 뒤인 1954년 자살로 추정되는 말로를 맞게 된다.
그가 사망하기 4년 전인 1950년 앨런 튜링은 인공지능에 대한 최초의 논문인 '계산 기계와 지능'을 발표한다. 인공지능이란 말이 생기기 전에 인공지능에 대해 예측한 최초의 과학적 논문이라고 할 수 있다. '튜링 테스트'를 통해 인공지능을 판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튜링 테스트는 기본적으로 인간이 질문하고 기계가 대답해 인간 질문자 10명을 다 속일 수 있다면 기계도 인간처럼 지능이 있다고 간주하는 것이다. 인간을 따라 한다고 해서 영화의 제목인 '이미테이션 게임'이라고도 불린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했다. 데카르트는 '너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고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생각하는 인간 A는 또 다른 생각하는 인간 B를 보고 그의 머릿속에도 자신과 같은 사유를 가능케 하는 의식(지능)이 있다고 여기고 B의 존재에 대해 받아 들일 수 있게 된다. 마찬가지로 튜링 테스트 역시 인간의 존재를 증명하는 사유→사유의 증거인 언어→언어를 통한 의사소통의 과정을 통해 그것이 가능하다면 인가이든 기계든 지능이 있다고 믿어주는 것이다.
하지만 이 같은 '결과'를 보고 인간적인 지능이 있다고 보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공격을 받게 된다. 여기서 인간이 말하는 '지능'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다시 답을 해야 하는 과제가 생긴다.
hwlee@fnnews.com 이환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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