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이태원 참사 뒤 그의 통찰력 있는 경고를 떠올렸다. 지난여름 물난리 때 반지하 사는 일가족이 횡액을 겪었다. 이번엔 핼러윈 파티를 즐기던 158명이 압사했지만, 무고한 시민들이 귀중한 목숨을 잃었다는 본질은 마찬가지다. 다만 후자의 경우 '재난의 평준화'라는 벡의 예언이 소름이 돋을 만큼 꼭 들어맞은 격이다. 불특정 시민이 지위 고하나 재산의 다소와 무관하게 희생됐기에….
이태원 참사의 요체는 국가가 세금 내는 국민을 보호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좁은 골목에서 가엾은 청춘들이 숨 막혀 죽어가고 있다는 보고가 줄을 잇는 동안 서울경찰청 112상황관리관은 자리를 비웠다. 지척에 있는 사고 현장으로 뒤늦게 뒷짐 진 채 걸어가는 용산서장의 실루엣은 엽기적으로 비칠 정도였다.
그런데도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은 국회 보고에서 국민의 부아를 돋웠다. "경찰과 소방을 미리 배치해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라는 면피성 발언으로. 야당인 더불어민주당도 무책임하긴 오십보백보였다. 마치 "문재인 정권이었으면 사고가 없었을 것이라 믿는 집단"(진중권 광운대 특임교수)처럼 대여 공세에 열을 올렸지만, 문제의 112상황관리관과 용산서장 모두 문 정권이 임기 말 알박기한 인사였다니….
어찌 보면 우리 공동체 안의 누구도 이번 참사와 관련한 책임에서 전적으로 자유로울 순 없을지도 모르겠다. 필자가 몸담은 언론도 주요 방송들이 앞다퉈 핼러윈 축제의 열기만 띄웠을 뿐 안전한 행사를 미리 주문하는 곳은 없었다.
얼마 전 미국 워싱턴포스트의 지적이 그래서 뼈아프다. 1995년 삼풍백화점 붕괴 후 근 30년간 한국이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는 보도였다. 수많은 붕괴 조짐을 백화점 측도, 당국도 외면했던 무신경이 이번에 재현됐다는 뜻이다. 더욱이 2014년 세월호 참사 이후 해상 조난사고 건수가 매년 늘어났다는 통계에 할 말을 잃게 된다.
벡은 위험사회가 도래하면 제도권 정치는 쇠퇴한다고 봤다. 출범 6개월 맞은 윤석열 정부를 겨냥한 장외집회에서 벌써 "퇴진이 추모다"라는 구호가 등장했다. 야당도 국정조사 추진 서명운동을 빌미로 장외에 한 발을 걸치면서 그의 탁견에 무릎을 쳐야 할 판이다. 심지어 이재명 대표가 "이름과 영정을 공개하고 진지한 애도가 있어야 된다"라고 바람을 잡자 친야 인터넷 매체는 유족의 동의 없이 희생자 명단을 공개했다.
이런 '재난의 정치화' 게임이 퍽 불길해 보인다. 그러느라 군중관리시스템 등 제도적 안전장치를 갖추지 못하면 비극이 되풀이될 수 있어서다. 최근 한 신부가 윤 대통령 부부가 전용기에서 추락하길 바라는 저주를 사회관계망에 올릴 정도로 우리 사회 내 갈등의 골은 깊어졌다. 정치가 극단적 진영 대결만 부추기며 국민통합이란 순기능을 포기하면 그 대가는 결국 국민이 치르게 된다.
kby777@fnnews.com 구본영 논설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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