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한 모임에서 일본 반도체 기업 임원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특파원으로 부임하기 직전까지 수년간 반도체 업계를 취재했기에 대화 주제가 자연스럽게 반도체로 흘렀다.
그의 말에는 '이제 일본 반도체는 힘들 것'이라는 분위기가 시종일관 읽혔다. 특히 삼성전자 출입을 오래 했다는 기자의 소개를 듣자 쉴 새 없이 질문이 쏟아졌다. "삼성의 임직원 대우는 어떠한가" "삼성의 개발 프로세스와 기업문화는 어떠한가" "핵심인재는 어떻게 영입하고 있나" 등이다.
그러면서 현재 일본 반도체 업계를 이야기할 때는 "삼성은 제풀에 지쳐 망할 것이라며 무시하던 때도 있었는데…"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최근 일본은 '반도체 부활'을 천명했다. 일본 정부는 8개 대기업이 뭉쳐 이 프로젝트를 성사시킬 신설법인 '라피더스'(Rapidus)를 출범시켰다. 도요타, 소니, 소프트뱅크, 미쓰비시UFJ은행 등 일본의 내로라하는 대기업이 대거 동참했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도 그는 "안 될 것"이라며 냉소적인 반응을 보였다.
"삼성전자와 TSMC는 한 해 R&D(연구개발)에만 수조엔(수십조원)을 투자해요. 근데 라피더스는 얼마 투자했는지 아세요? 정부 지원이 700억엔(약 6700억원)에 8개 기업의 초기 투자금이 고작 73억엔(약 700억원)입니다. 게임이 되겠습니까?"
일본 정부가 주도한 반도체 부활 프로젝트는 사실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99년 일본 정부 주도로 다수의 메모리반도체 회사를 합쳐 설립된 엘피다메모리가 삼성전자와의 치킨게임에서 패배해 사라진 전례가 있다.
이 충격을 기억하는 일본 반도체 업계는 라피더스의 투자금 규모를 볼 때 이번에도 결국 보여주기에 그칠 것이라며 정부를 의심하고 있다.
그는 삼성전자의 막대한 사내유보금이 그 자체로 압박이라고 언급했다. "반도체 같은 장치산업의 본질은 결국 돈 넣고 돈 먹는 돈싸움입니다. 과거 치킨게임에서 이겨본 삼성은 어떤 경쟁자가 나타나도 언제든 돈싸움을 할 준비가 된 기업이에요. 그게 무서워서 후발주자들이 공격적인 투자를 할 수가 없어요."
라틴어로 '빠르다'라는 뜻의 라피더스는 청사진에서도 '속도'를 강조했다. 오는 2027년부터 일본에서 2㎚(나노미터·1㎚는 10억분의 1m) 반도체를 양산하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현존 최첨단 반도체는 삼성전자와 대만 TSMC가 만드는 3나노인데 이를 단숨에 따라잡겠다는 의지다.
하지만 여기서도 그의 자조는 계속됐다. "일본 반도체 생산기술력은 아직도 레거시반도체 수준인 30~40나노에 머물러 있어요. 깃발만 든다고 저절로 5년 안에 2나노가 만들어지고 한국, 대만에 10~20년이나 뒤처진 기술력이 올라갈까요?"
km@fnnews.com 김경민 도쿄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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