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성비가 사라진 시대다. 한때 신문기사 제목에 단골로 등장했던 가성비는 치솟는 물가에 치이다 어느샌가부터 기사 속에서도 사라져버렸다. '월급 빼고 다 오른다'는 자조 섞인 말로도 지금의 물가는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다. 직장인들의 소울푸드였던 순댓국은 이제 9000원을 넘어 1만원을 향하고 있고, 식당에서 파는 소주는 한 병에 5000원이 돼 버렸다.
저렴한 가격으로 유명했던 곳들도 예전 같지 않다. 1000원으로 다양한 물건을 살 수 있었던 생활용품점 다이소에서도 1000원대 상품은 흔하지 않고, 저렴한 미용실의 대명사였던 블루클럽도 이젠 커트에 1만원을 달라는 곳이 등장했다.
물가급등은 우리나라만의 얘기는 아니다. 영국과 프랑스에서는 폭등한 물가에 참지 못한 시민 수만명이 거리로 뛰쳐나왔고, 아르헨티나에서는 생활고에 시달리는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나오기도 했다. 인도네시아도 휘발유 가격 인상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국회로 달려가기도 했다. 미국은 상황이 조금 다르다. 인플레이션을 비켜가지는 못했지만 강달러 덕분에 소비자의 구매력은 오히려 높아졌다. 이 같은 상황을 반영하듯 올해 미국의 블랙프라이데이 매출은 온라인에서만 91억2000만달러를 기록하며 사상 최대치를 기록했다. 인플레이션으로 예년만 못할 것이라는 예측이 완전히 빗나갔다.
미국에서 눈여겨봐야 할 대목은 인플레이션 감축법(IRA)이다. 국내에서는 국산 전기차 수출에 발목을 잡은 제도로 논란이 되고 있지만 법안의 상당 부분은 '미국 국민의 생활 안정화'를 위해 가계의 지출부담을 줄이는 것에 할애했다. 처방약 부담금 상한제, 건강보험개혁법(오바마케어) 보조금 연장, 전기차 구매 세액공제 등인데 IRA를 통해 미국 국민이 연간 500억~1000억달러의 에너지비용을 줄이고, 800억달러의 의료비를 절감할 것이라는 게 현지 관측이다. 말 그대로 미국민에게는 물가급등의 부담을 줄이는 법안이었던 셈이다.
물가는 민심과 직결되는 문제다. 윤석열 정부도 수입축산물 무관세, 유류세 인하, 근로자 식대 비과세 한도 확대 등 물가대책을 내놨지만 유류세 부분을 제외하면 큰 반응을 얻지 못했다. 안정세를 찾고 있다지만 국내 소비자물가는 4개월 연속 5%대 상승률을 기록 중이다. 정부와 한국은행의 물가목표 2.0%보다 여전히 높은 상황이다. 큰 틀에서 서민의 물가부담을 낮출 수 있는 한국형 인플레이션 감축법을 기대해 본다.
cynical73@fnnews.com 김병덕 산업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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