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막상 전쟁이 터지고 나니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젤렌스키의 지도력하에 똘똘 뭉쳐 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목숨을 건 항전을 지속하고 있다. 겨울이 오면 대러시아 제재 대열에서 이탈해 각자도생의 길을 갈 것 같았던 나토 동맹국들도 단일대오를 유지하며 우크라이나에 군사·경제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오히려 철통같아 보이던 푸틴의 국내 위상이 흔들릴 조짐이 있다는 보도가 나온다.
푸틴은 여전히 민주주의의 취약성을 공략하는 전략을 고수하고 있다. 폭격으로 전력망 등 에너지 수급시스템을 파괴하고 있는데, 추위를 견디지 못한 우크라이나 국민들이 "그만 싸우고 협상하자"고 정부를 압박할 것이고, 결국 젤렌스키가 유화책을 쓸 것이라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러시아가 폭격의 수위를 끌어올릴수록 우크라이나 국민들의 전의는 더 불타오르고 있다. 북한 독재자의 전략도 푸틴의 전략과 별반 다르지 않다. 무력도발의 수위를 끌어올리는 북한의 전략에는 분열하는 한국의 정치권과 불안해하는 국민 때문에 결국 한국 정부가 유화책으로 선회할 것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서구의 민주국가는 아돌프 히틀러의 팽창정책에 유화책으로 대응하다가 결국 더 큰 안보위기를 맞닥뜨리게 된 쓰라린 경험을 기억하고 있다. 체코의 일부를 떼어주고 히틀러의 야욕을 일시적으로 무마한 1938년 '뮌헨협정'은 어설픈 유화정책의 대명사가 되었다. 지금 서구 민주국가는 '뮌헨의 교훈'을 되새기며 푸틴의 도발에 용감히 맞서고 있다. 한국은 '9·19 합의의 교훈'을 배웠는가?
문재인 정부는 9·19 남북 군사합의 정신을 앞세우며 북한의 도발에 유화책으로 일관했지만, 북한은 한국의 선의를 악용하며 더 큰 도발을 자행하고 있다. 문 정부가 김여정 하명법으로 불리는 대북전단금지법까지 제정하는 정성을 보였지만, 북한은 9·19 합의를 17번이나 어기며 도발을 지속하고 있다. 그 정부에 몸담았던 인사들이 윤석열 정부의 강경일변도 정책 때문에 북한이 도발의 수위를 끌어올리고 있다고 강변한다. 윤 정부의 대응이 너무 강경해서 불안해 못살겠다며 북한과 대화할 것을 종용하고 있다. 북한을 핵보유국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스멀스멀 나오고 있다. 서구 민주주의가 뮌헨의 교훈을 배웠듯, 민주국가 한국도 9·19의 교훈을 배워야 한다. 선의와 합의에만 의존하는 대북 유화책은 결국 더 큰 북한의 도발로 귀결될 것이라는 교훈이다.
김재천 서강대 국제대학원 교수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