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학교 부지에 합판 지붕 얼기설기… 정면엔 초고층 새 아파트 [개발의 그림자 강남 판자촌]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3.01.30 18:15

수정 2023.01.30 18:15

(1) 서초 잠원동 나루마을
대단지 아파트로 재개발 되면서 체비지에 초등학교 신설 움직임
40년 가까이 살고 있는 사람들
"제일 싼 곳 찾아 쫓겨 왔는데 또 쫓겨나면 어디로 가야하나"
서울 서초구 잠원동 나루마을 전경. 사진=김동규 기자
서울 서초구 잠원동 나루마을 전경. 사진=김동규 기자
30일 서울 서초구 잠원동 나루마을에 체비지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걸려있다.
30일 서울 서초구 잠원동 나루마을에 체비지임을 알리는 표지판이 걸려있다.

한국의 '판자촌'은 해외의 '슬럼'과는 매우 거리가 멀다. 슬럼이 치안 문제로 많은 범죄가 발생하는 우범지역이라면 한국의 판자촌은 저렴한 주거비를 찾아온 취약계층이 모여 사는 지역이다. 환경이 매우 열악하다는 점은 같지만 적어도 치안에서는 문제가 생기지 않는 것이 한국의 판자촌이다. 이 같은 이유 때문인지 판자촌은 서울 한복판, 그것도 가장 땅값이 비싼 강남에도 있다. 대표적으로 '구룡마을'이 있으며 이외에도 강남 3구 곳곳에 판자촌이 존재한다.
이들 강남 3구 판자촌은 나무와 펜스, 건물로 가려져 있어 평소에는 잘 드러나지 않아 지역 주민도 그 존재를 모르는 경우가 많다. 파이낸셜뉴스는 강남 3구에 있는 여러 판자촌의 형성과 현재 모습, 미래를 6차례에 걸쳐 조명한다. <편집자주>
서울 지하철 3호선 잠원역 4번 출구를 나오면 강남에서 쉽게 볼 수 없는 생경한 풍경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여기가 서울이 맞는지 의아할 정도의 녹슨 철제문과 슬레이트, 합판, 천막 등으로 만들어진 판잣집들이 눈에 띈다. 강남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아파트나 빌라촌과는 거리가 먼 판자촌이 이곳 서울 서초구 잠원동 61-6번지에 있다. 이곳은 '나루마을'이라고 불린다.

나루마을은 1980년대 영동개발과정에서 철거민들이 체비지(개발이 보류된 땅)에 모여 살며 형성됐다. 서초구청에 따르면 나루마을에는 지난해 4월 기준 무허가 주택 60채가 모여있고 주민 108명이 살고 있다. 대부분 주민들은 월세조차 못 내 쫓겨났거나 서울에서 월세가 가장 싼 집을 찾아 모인 사람들이다. 더구나 이주 초기에는 주변 재개발로 아파트 건설 공사가 많아 일자리까지 구할 수 있어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그렇게 40여년을 이어온 나루마을도 최근 강남 지역 부동산 개발 바람은 피하기 어려운 분위기다. 주변 지역 재건축으로 학령인구가 급증하자 나루마을에 초등학교를 만들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학교부지 위의 '판자촌'

지난 1월 30일 방문한 나루마을에서 눈길을 사로잡은 것은 판잣집들이 아닌 30층이 훌쩍 넘는 고층 아파트였다. 바로 길 하나 건너에 있는 신축 아파트 때문인지 판자촌은 마치 신기루같이 느껴졌다.

사막의 신기루가 언젠가 사라지듯 이곳 나루마을도 사라질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나루마을은 도시계획상 학교부지로 지정돼 있다. 인근 한신 신반포 4지구 아파트가 3000여세대 대규모 아파트 단지로 재건축됨에 따라 늘어나는 학령인구를 수용하기 위한 초등학교가 설립될 예정이다. 강남서초교육지원청도 나루마을 주민 이주가 이뤄진 이후 초등학교를 설립하겠다는 입장이다. 나루마을 주민들은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기도 했다. 서울 서초구 잠원동 나루마을에서 떡볶이집을 운영하는 한모씨(50대)는 "땅은 서울시 소유여도 1년에 100만원이 넘는 사용료를 내며 40년 가까이 살아왔다"면서 "초등학교가 들어서면 우린 어디로 가야 할지 답이 없다"고 말했다.

일부 주민 중엔 '재테크'의 기회로 판단하는 사람들도 있다.

20년 전 나루마을에 정착한 최모씨(60대)는 "최근 이곳에 이주하는 사람들 중 일부는 공공임대 아파트 입주권 등을 노리고 이사 오는 경우가 있다"면서 "가난한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종의 재테크인 셈"이라고 언급했다.

다만 아직 교육당국과 지자체에서 뚜렷한 이주대책을 만들지 못한 만큼 초등학교가 만들어지기까지는 다소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하루 살기도 빠듯"

지난 1995년 서울 동작구 사당동에서 쫓겨나 일자리를 찾으러 온 장모씨는 "서울 한복판에 보증금 1000만원에 월세 13만원을 내고 살 수 있는 곳이 거의 없다"며 "주거 환경이 좋지 않아 춥고 냄새도 나지만, 이곳 말고 갈 곳이 없으니 참고 사는 수밖에 없다"며 설명했다.

플라스틱 천막(PVC)에 폐타이어가 얹어진 집에 살고 있는 김모씨(60대)는 "추위가 살을 이고 들어 1달에 1~2번 정도밖에 집에서 목욕을 할 수가 없다"면서 "가끔은 수도관이 얼기도 해 구청에서 받은 열기구로 수도관을 녹이곤 한다"고 토로했다.

주변 부동산 개발로 일자리를 잃은 주민도 있었다.
이날 골목에서 은행을 다듬고 있던 이모씨(60대)는 "20여년 전 세차 일을 하며 먹고살기 위해 이곳에 들어왔다"며 "하지만 3~4년 전부터 근처에 있던 세차장들이 상가 등으로 재개발되었기 때문에 하던 일을 그만두게 됐다"고 말했다.

최근 초등학교 설립이 마을의 이슈로 떠올랐지만 대부분 주민들의 일상은 여전히 열악한 주거 및 생활 환경에 힘들어하고 있었다.
돈이 있으면 떠나겠지만 가파르게 오른 주거비를 생각하면 엄두도 내지 못하는 상황이다.

kyu0705@fnnews.com 김동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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