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훈처 "문학·군사·의학 분야 헌신하다 젊은 나이에 순국"
[파이낸셜뉴스]
보훈처는 이들 선생에 대해 "조국의 자주독립을 위해 문학, 군사, 의학 등 각 분야에서 헌신하고 청년 시절 순국한 독립유공자"라고 소개했다.
김 선생은 이후 1908년 세브란스병원의학교를 제1회로 졸업한 뒤 교수로 활동하며 후진을 양성했고, 특히 도산 안창호 선생의 활동을 지원하며 그해 4월 안창호·양기탁 등이 설립한 신민회에도 참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 선생은 일제가 조작한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조선총독 암살 미수사건'에 연루돼 1911년 12월 중국 만주로 망명했다. 당시 조선인 집단 거주지 퉁화(通化)현에서 근대적 병원을 세우고 조선인들을 치료하던 김 선생은 일제의 감시·간섭이 심해지자 1916년 내몽골 치치하얼(齊齊哈爾)로 다시 이주했다.
김 선생은 임시정부에서 독립운동을 이끈 김규식의 처남이자 김순애의 오빠이며, 여성 독립운동가인 김마리아의 삼촌이다.
치치하얼에서 '북제진료소'를 열어 의료 활동에 종사하던 김 선생은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기 위해 애쓰던 중 1919년 9월 순국했다.
안 선생은 1926년 여운형의 도움으로 항일무장투쟁에 참여하고 있던 산시(山西)성 군벌 염석산 군(軍)의 항공사령관으로 활동했고, 1928년엔 신덕영 등과 함께 '대한독립공명단'을 조직하고 군자금을 모집해 무관학교를 설립했다.
안 선생은 1922년 6월엔 '2등 비행사' 면허를 받은 뒤 12월10~13일 단발쌍엽 비행기 '금강호'를 타고 서울·인천 등지에서 고국방문 비행에 나섰다. 보훈처는 안 선생의 당시 비행에 대해 "조선 청년들에게 '과학기술에 대한 관심이 있으면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큰 울림을 줬다"고 평가했다.
이후 일본으로 돌아간 안 선생은 1923년 7월 '1등 비행사' 면허를 취득했다. 그러나 그는 같은 해 9월 '간토(關東) 대학살' 사건을 겼으면서 식민지 조선인의 울분을 느끼고, 이를 계기로 당시 중국 상하이(上海)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긴밀한 관계를 맺었다고 한다.
안 선생은 당시 조선인 군대를 양성하는 등 국내 진공작전을 구상하기도 했으나, 1930년 4월 산시비행학교에서 비행훈련을 하던 중 기체 고장으로 29세 나이에 산화했다.
송 선생은 연희전문학교 졸업 뒤인 1942년 교토(京都)제국대학 사학과에 입학해 윤동주 등과 함께 민족정신운동을 전개했고, 일제는 1943년 7월 '재교토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그룹 사건'의 주동 인물로 송 선생과 윤동주를 함께 체포했다.
윤동주 시인의 사촌형으로서 1917년 중국 룽징(龍井)에서 태어나 명동학교·은진중학교에서 민족교육을 받은 뒤 난징(南京) 학생훈련소에 입소했다.
난징 학생훈련소는 백범 김구 선생이 중국 중앙육군군관학교에 입학 예정인 청년들을 위해 만든 곳이었다.
송 선생은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형을 선고받은 송 선생은 이후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 수감됐으며, 조국 독립을 보지 못한 채 1945년 3월 28세 나이에 옥중 순국했다.
정부는 이들 선생의 공훈을 기려 송 선생과 안 선생에겐 각각 1995년과 2001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김 선생에겐 1997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wangjylee@fnnews.com 이종윤 기자
※ 저작권자 ⓒ 파이낸셜뉴스,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