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전국

청계천따라 만나는 광장·평화시장[길 위에 장이 선다]

파이낸셜뉴스

입력 2023.02.05 19:36

수정 2023.02.06 09:33

<3편> 동대문상권

먹거리 체험 관광지로 재탄생한 광장시장 내 포장마차들. 사진=김경수 기자
먹거리 체험 관광지로 재탄생한 광장시장 내 포장마차들. 사진=김경수 기자
동대문은 서울 도심에서 보기 드문 '야(夜) 시장' 천국이다. 동대문에서 인접한 광장시장에 밀집한 포장마차들은 특별한 야식 체험지로 자리 잡았다. 광장시장은 종로5가에 있지만, 흥인지문(동대문)과 가까워 동대문 상권으로 오래전부터 불렸다.

광장시장 내 포장마차들의 분위기는 퇴근시간대부터 무르익는다. 광장시장 포장마차들에 매달린 수많은 조명들은 새하얀 불빛을 내뿜으며 방문객들을 향해 손짓을 하는 듯 하다.


광장시장 먹거리는 육회, 산낙지, 소간, 천엽, 빈대떡, 왕순대, 마약김밥 등 전형적인 시골장터 음식들이다. 저녁무렵 포장마차에 걸터앉아서 소주잔을 비우는 이들의 표정은 온갖 시름을 벗어낸 듯 하다. MZ세대부터 노년층까지 다양한 연령대가 광장시장 내 실내 포장마차에서 삶의 애환과 세월 이야기를 나눈다. 비라도 내리는 저녁에는 천장을 두드리는 빗소리를 들으며 포장마차 야식을 즐기면 옛 추억을 소환하게 된다.

포장마차들이 들어선 광장시장의 천장은 햇볕이 잘 비치는 지붕을 높게 씌운 아케이드 형태다. 광장이라는 이름처럼 실내 운동장 같은 넓은 공간에 셀 수 없이 많은 포장마차들이 한 데 몰려 있다.

광장시장 지붕에 내걸 전세계 만국기의 숫자만큼 많은 외국인 관광객들도 이곳을 찾고 있다. 시장 곳곳에는 연일 중국어, 일어뿐만 아니라 다양한 세계 언어가 쉽게 들린다. 광장시장 포장마차 맛집투어는 동대문을 찾는 외국인들에게 이색 관광지로 소문이 났다. 붉은색 옷을 입은 관광가이드가 늦은 저녁시간까지 근무에 나설 정도로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인기다.

1970년대 광장시장 풍경. 사진=서울시
1970년대 광장시장 풍경. 사진=서울시

■국내 1호 사설 상설시장 '광장'
광장시장 건물 매장 내에는 수입 용품을 파는 가게들이 유독 눈에 띈다. 한 때 광장시장에는 미군 PX에서 흘러나오는 식품, 잡화 등을 판매하는 상점들이 대거 몰렸다. 하지만 수입자유화 조치가 시행되고 온라인 등 다양한 경로로 수입물품이 유통되면서, 광장시장의 수입물품 가게들은 쇠퇴의 길을 걷고 있다.

광장시장은 지난 1905년 개장한 우리나라 최초의 사설 상설시장로도 유명하다. 시장 개발 허가시에는 동대문시장이라는 명칭을 쓴 것으로 전해졌다. 회사의 운영 주체인 광장주식회사는 1904년에 고종의 측근이 설립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오래된 기업 중 하나이기도 하다. 조선인 회사인 광장주식회사가 부지와 점포를 소유하고 있던 광장시장은 일본인 경영자와 상인들 사이에 대립과 갈등이 많았던 남대문 시장보다 비교적 순조롭게 운영됐다. 광장주식회사는 주주들이 운영, 관리했다. 거래 품목별로 상인 조합을 결성하도록 했으며 조합원의 자격만 갖추면 누구나 시장에서 판매할 수 있었다. 광장 주식회사가 경영권을 갖고 있어, 민족 시장으로서의 명목을 유지할 수 있었다.

광장시장 옆 청계천을 건너가면 을지로쪽으로 방산시장도 자리 잡고 있다. 방산시장은 1987년 인쇄업체들이 모여서 만든 시장이다. 방산시장이라는 이름이 붙기 전인 1960년대부터 제과점에 물품을 대는 도매상 밀집지로 유명했다. 제과점에 들어갈 기구를 파는 곳이 먼저 생겼고, 자연스럽게 그 옆에 재료상이 자리 잡아 베이커리 골목이 됐다.

방산시장 인근에는 특이하게도 중국 삼국시대의 장수 관우의 영정을 둔 사당 '성제묘'가 있다. 임진왜란때 파병된 명나라 장군들이 '관우의 음덕으로 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다'라는 믿음을 가지면서 나중에 조선 조정에서 여러 곳에 건립을 허용한 것으로 전해진다. 오늘날에는 방산시장 상인들이 이 사당에서 제를 지내고 있다. '전쟁의 신'인 관우가 '상업 신'으로 바뀐 셈이다. 중국에선 관우가 '재물 신'으로도 불린다.

1962년도 광장시장 인근 종로5가 상가. 사진=서울시
1962년도 광장시장 인근 종로5가 상가. 사진=서울시

■청계천로 따라 시장거리 이어져
광장시장에서 배를 채우고 동대문 방향으로 청계천을 따라서 도보로 10여분만 걸어가면 곧바로 평화시장을 만나게 된다. 동대문상가의 근대화는 이 곳 평화시장이 열었다. 평화시장은 동대문 패션 1번지를 탄생시킨 우리나라 대표 상가다.

평화시장 상가 내로 들어가면 모자, 겉옷, 속옷, 허리 벨트, 목도리, 가방 등 온갖 패션 용품들이 마치 전시장에 온 것처럼 끝없이 쌓여 있다. 온갖 패션용품중 신발만은 별도 구역에서 판매가 이뤄지고 있어 '동대문 신발'이라는 말도 생겨났다.

평화시장은 근대화시기에 먹고 살길이 막막했던 여공들의 생계 터였다. 18세 미만의 어린 여공들이 이곳 평화시장에서 주말도 없이 미싱(재통틀)을 돌리면서 한국 근대화의 기초를 닦았다. 평화시장에서 근무하는 2만여 명 근로자의 90%에 달하는 18세 미만의 여공들이 하루 열다섯 시간씩 고된 작업을 이어 가야 했다. 이중 40% 정도는 15세 정도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청계천을 마주보는 평화시장 1층에는 특이하게도 지난 1960년대부터 하나둘씩 헌책방이 모여들었다. 지금은 수십 곳만 남았지만 전성기에는 100여곳의 헌책방이 있었다. 이곳 헌책방들은 평화시장에서 청춘의 꿈을 불살랐던 어린 여공들에게 마음의 양식터가 됐다. 소녀들은 헌책방에서 시집, 소설, 성경책 등을 구매해 돌려보면서 고된 노동의 힘겨움을 잊었다.

여공들의 힘겨운 삶은 이곳에서 함께 일했던 청년 전태일을 통해 세상에 열려지게 된다. 평화시장 앞에는 청계천을 건너는 다리가 하나 있다. 이 다리에는 전태일 동상이 놓여 있다. 그래서 이 다리 이름이 '전태일 다리'로 불린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전태일도 이곳 헌책방에서 근로기준법 서적 등을 구해 읽었다고 한다. 서울시는 청계천 헌책방 거리를 '서울미래유산'으로 지정했다.

평화시장 앞 전태일 동상. 사진=김경수 기자
평화시장 앞 전태일 동상. 사진=김경수 기자


평화시장 내 모자 매장. 사진=김경수 기자
평화시장 내 모자 매장. 사진=김경수 기자


동대문 신발상가. 사진=김경수 기자
동대문 신발상가. 사진=김경수 기자
■'패션과 스포츠 성지' 동대문의 변신
동대문에선 의류뿐만 아니라 가성비가 뛰어난 체육용품을 파는 가게들도 쉽게 만날 수 있다. 축구, 테니스, 야구, 헬스용품 등 스포츠에 관련된 모든 용품을 파는 스포츠용품점들이 동대문역 인근에 자리잡고 있다. 조기 축구회 단체복은 동대문에서 구입하는 경우가 많았다.

동대문은 패션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스포츠의 출발지이기도 하다. 지난 1959년 건립된 동대문운동장(서울운동장)은 철거직전까지 대한민국 근대 스포츠의 산실이었다. 동대문야구장은 암울했던 시대에 민족의 아픔을 달래줬던 고교 야구의 성지였다.

또한 동대문운동장은 국내 최초 근대체육 시설로 야구와 축구, 육상 등 각종 경기가 열렸다. 수많은 우리나라의 스포츠 영웅들이 이곳을 거쳐갔다.

동대문 상권
동대문 상권
흥인지문에서 바라본 두산타워. 사진=김경수 기자
흥인지문에서 바라본 두산타워. 사진=김경수 기자
오세훈 서울시장(왼쪽 앞줄 세번째)이 지난 2011년 4월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공사 현장을 살피고 있다. 사진=서동일 기자
오세훈 서울시장(왼쪽 앞줄 세번째)이 지난 2011년 4월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 공사 현장을 살피고 있다. 사진=서동일 기자
세월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은 개국과 더불어 서울 동대문운동장 부근에 활과 말타는 법을 연습하는 명철방을 설치했다. 1467년(세조 13) 훈련원으로 개칭한 뒤 조선왕조 500년간 이어졌다.

근대 스포츠의 효시는 병사들의 훈련에서 부터 시작됐다. 이를 감안하면 조선시대 훈련원이 있었던 동대문은 국가 스포츠의 기원지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훈련원은 1907년 일본에 의해 강제로 폐지됐다. 그 뒤 훈련원 인근에 성벽을 허물고 동양 최대 규모의 경성운동장을 지었다. 광복 이후에 임시정부 환국봉영회, 기미독립선언기념 전국대회, 김구 선생 국민장(장례식), 신탁통치 찬반 집회 등 역사적인 행사가 이곳 운동장에서 열렸다.

오세훈 서울시장은 '파리의 퐁피두센터'처럼 세계적인 문화시설로 만들겠다며 동대문운동장 재개발을 제안했다. 그렇지만 동대문운동장 재개발 당시에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함께한 공간인만 큼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하여 보존해야 한다는 반대의 목소리도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동대문운동장은 철거되고 그 자리에 4996억원을 들여 지하 3층~지상 4층 규모로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를 건립했다. DDP는 지난 2008년 착공했지만 2011년 무상급식 주민투표로 오 시장이 사퇴하면서 완공을 함께 하지 못했다. 지난 2014년 3월 고 박원순 전 시장 재임시기에야 DDP는 개관했다.

오세훈 시장은 DDP 건립 비화에 대해 "일할 때는 욕 많이 먹었다.
왜 서울운동장 야구장, 축구장을 없애느냐고"라며 "바꿔놓고 보니까 서울에 들어오는 관광객들이 한 번씩 꼭 가보는 명소가 됐다"며 회고한 바 있다.

◆파이낸셜뉴스는 연중기획으로 '길 위에 장(場)이 선다'를 연재합니다.
서민들의 애환이 깃든 전통시장, 근대 상가, 지역 특화 '시그니처 상권' 등 다양한 팔도 상권을 소개할 예정입니다.


rainman@fnnews.com 김경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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