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일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2부(이준철 부장판사)는 전날 선고한 곽 전 의원의 판결문에서 검찰이 제출한 증거에 효력(증거능력)이 있는지 판단하고 근거를 설명하는 데 약 40쪽을 할애했다.
이 가운데 핵심은 대장동 사건의 '스모킹 건(결정적 증거)'으로 꼽히는 회계사 정영학씨의 녹음파일이다. 정씨는 2012년부터 김만배씨 등과 나눈 대화를 녹음했고 이 중 일부는 곽 전 의원 재판에도 증거로 제출됐다.
2020년 4월 4일 녹음된 파일에서 김씨는 정씨에게 "병채 아버지(곽상도)는 돈 달라 하지, 병채 통해서. 며칠 전에도 2000만원"이라고 말했다. 이어 김씨가 "그래서 '뭘? 아버지가 뭐 달라냐?' 그러니까 '아버지한테 주기로 했던 돈 어떻게 하실건지' 그래서 '야 인마, 한꺼번에 주면 어떻게 해? 그러면 양 전무보다 많으니까 한 서너 차례 잘라서 너를 통해서 줘야지 그렇게 주면 되냐'"라고 말하는 내용이 담겼다.
김씨가 곽병채씨와 나눈 대화를 정씨에게 전한 것으로 이 대화 내용이 사실이라면 곽 전 의원은 아들을 통해 김씨에게 수상한 돈을 요구한 것이 된다.
하지만 재판부는 이 녹음파일이 '김씨가 정씨에게 이렇게 말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증거로만 효력이 있을 뿐, '김씨가 곽 전 의원에게 돈을 주기로 약속했다'거나 '곽 전 의원이 아들을 통해 돈을 요구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증거로 쓰일 순 없다고 판단했다.
형사소송법은 전문진술을 증거로 인정하려면 원진술자가 사망·질병·외국거주·소재불명 또는 이에 준하는 사유로 진술할 수 없고 전문진술이 특히 신빙할 수 있는 상태에서 이뤄진 것이 증명돼야 한다고 정한다.
재판부는 "피고인 김만배의 (녹음 파일 속) 진술은 피고인이 아닌 자인 곽병채의 진술을 내용으로 하는 진술로 전문진술"이라며 "그런데 곽병채는 공판에 출석해 증언했으므로 전문진술을 증거로 인정할 사유에 해당하지 않는다"라고 판단했다.
다시 말해 곽병채씨 본인이 직접 법정에 나와 증언한 만큼 그의 말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한 김만배씨의 말을 증거로 삼을 수 없다는 취지다.
김씨는 재판에서 "정씨와 대화하면서 이같은 취지의 말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실제로 곽병채와 그런 (곽 전 의원이 돈을 요구한다는) 대화를 한 일은 없다"는 취지로 진술했다. 곽병채씨도 아버지를 대신해 돈을 요구한 일이 없다고 법정에서 증언했다.
다만 재판부는 2019년 12월부터 2021년 1월까지 정씨의 녹음파일 가운데 전문증거가 아닌 원진술에 해당하는 내용은 대부분 증거능력을 인정했다.
종합하면 녹음파일 속 대화 당사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한 '원진술' 부분은 증거로서 효력이 있으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전한 '전문진술' 부분은 증거가 되지 않는다는 취지다.
이 같은 판단은 향후 대장동 사건의 본류인 배임 혐의 재판에서도 그대로 적용될 가능성이 크다. 곽 전 의원의 뇌물 수수를 인정하지 않은 형사합의22부는 유동규 전 성남도시개발공사 기획본부장과 김씨, 정씨, 남욱, 정민용씨 등의 배임 사건도 심리하고 있다.
재판부는 전날 곽병채씨가 화천대유에서 퇴직금, 성과급 조로 받은 50억원이 이례적으로 큰 액수라면서도 그가 경제적으로 독립해 곽 전 의원이 돈을 직접 받았다고 평가할 수 없고 대가성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며 뇌물 혐의에 무죄 판단을 내렸다.
jhpark@fnnews.com 박지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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