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감 활용 ‘소리 튜닝’ 해야
[파이낸셜뉴스] 나는 종종 공부에 소질이 있었냐거나 외국에 살다 왔느냐는 질문을 받는 경우가 많다. 미국, 러시아, 카자흐스탄, 이란 등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영어와 러시아어를 능숙히 통역하고 있으니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매번 같은 대답을 남긴다. “저는 사실 지진아였어요.”
세 살 무렵, 원인 불명의 고열이 지속되는 가와사키라는 병을 앓은 일이 있다. 당시에는 이렇다 할 치료법도 없었지만, 그저 운이 좋았다는 이유로 기적처럼 살아났다. 하지만 문제는 후유증이었다. 2년의 입원 치료 속에서 몸은 허약해져만 갔고, 두뇌 역시 정상적인 수준으로 발달하지 못했다. 퇴원 후에도 온종일 멍하니 하루를 보내는 것이 일상이었고, ‘가위’가 무엇인지 잊어버려 사소한 심부름조차 할 수 없었다. 당연하겠지만, 학교에서도 열등생 성적을 받는 소심한 외톨이 신세를 면치 못했다.
그러던 내가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바로 ‘흥미’ 때문이었다. 열세 살 때, 처음으로 접한 영어는 지루하기 그지없었다. 그룹 과외까지 받으며 알파벳과 문법을 배우기 시작했지만, 전혀 재미를 느끼지 못했고, 여전히 도태되어가는 것만 같았다.
그러다 우연히 교재에 딸린 테이프를 틀었는데 거기서 나오는 영어 소리가 신기하고 재미있게 느껴졌다. 아마, 남들이 잘하는 문법 공부는 따라갈 수 없으니 다른 데 희망이 생긴 것 같다.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하루 종일 영어 소리를 듣고 똑같이 흉내내기 시작한지 3개월 정도 지날 무렵, 영어가 편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처음처럼 신기하다거나 하지 않고 너무도 익숙하게 말이다. 입을 통해 나오는 영어 발음도 나름 유창해졌고, 선생님의 칭찬을 받자 친구들은 나를 부러운 시선으로 보기 시작했다. 처음 느껴보는 만족감이었다. 소심하기 그지없던 나는 점점 친구들 앞에 나서기 좋아하는 성격으로 변해갔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삼수 끝에 대학의 문턱을 겨우 넘을 수 있었다. 이번에는 러시아어학과에 진학해 새로운 언어에 도전한 것이다. 3개 국어 통역사가 되겠다는 야심찬 꿈을 꾸었지만, 영어와 달리 러시아어는 도통 이해되지 않았다.
교환학생까지 떠났지만 실력은 늘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남자친구와도 헤어졌고, 집에서 은둔하며 주야장천 TV만 보며 허송세월하는 듯했다. 보드카에 취해 지내던 어느 날, 그 딱딱하고 어려운 러시아어가 귀에 꽂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득 어린 시절을 떠올리며 방구석에 처박아두었던 교재와 CD를 꺼내서 듣고 또 들었다. TV 속 어느 러시아 여배우의 소리가 너무 지적이라 따라 하고 싶었고, 그 배우가 나온 영화 CD도 모조리 사서 들으며 따라 했다. 몸짓, 제스처, 표정, 입 모양, 호흡까지 말이다. 나는 이 과정을 반복했다. 그리고 외국어 공부의 비밀을 알게 됐다.
외국어를 원어민 수준으로 이해해야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구나 ‘소리 튜닝’을 통해 원어민과 같은 영어 소리를 구사할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소리 튜닝이란 단순한 발음 개선과는 완전히 다른 개념이다. 발성에서 시작해 호흡으로 끝나는 과정을 직접 소리 내며 익히는 과정이다.
사람들은 오감을 통해 세상을 익혀나간다. 이중 전 세계 50% 이상은 ‘시각형’으로, 주로 시각을 통해 정보를 얻는 것을 선호하고, 체각을 통해 주로 정보를 얻는 ‘체각형’과 외국어 학습에 최적화된 유형이라 할 수 있는 ‘청각형’이 각각 20% 정도를 차지한다.
혹자는 영어 공부를 위해 먹지를 채우고 누군가는 단순히 미국 드라마 시청에 사활을 건다. 하지만 영어 학습에서 가장 이상적인 것은 세 가지 감각 체계를 골고루 발달시키는 것이다. 훈련을 통해 부족한 감각도 키울 수가 있다. 영어에 실패했다고? 아직 제대로 시작도 못했다고 생각해보길 바란다.
외국어 공포증에 시달리고 있는가? 완벽히 이해해야 누군가에게 소리 낼 수 있다는 강박감부터 버려라. 지진아에, 말도 제대로 못하던 내가 용기를 내어 내뱉은 소리에 인생이 변했다. 누구나 할 수 있다. 바로 당신도 말이다.
이정은 영어 강사/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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