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송환씨( 사진)는 한국전쟁(6·25전쟁) 중인 1952년에 태어났다. 황씨는 기족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고 한다. 너무 어린 나이에 부모와 이별한 '전쟁고아'이기 때문이다.
황씨는 "아버지의 이름인 '황손하'는 보호소 기록을 통해 알게 됐다"며 "이후에 한국전쟁 사망자 명단에 대령으로 전사한 것을 확인은 했지만 명확하지 않다"고 전했다.
그는 "그동안 가족을 찾기 위해 이산가족 찾기 방송에도 나갔고 다른 방송 출연도 했지만 소식이 없었다"며 "어머님 송지애와 남동생 황동희, 여동생 황순이의 이름을 알게 된 것도 사실 4~5년 전 꿈에 어머니가 나오셔서 본인의 이름과 동생들 이름을 알려줘서 알았다"고 덧붙였다.
황씨가 가족에 대한 기억이 없는 것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가족들과 헤어진 5살은 무엇인가를 뚜렷하게 기억하기에는 너무 어렸던 것이다. 당시 황씨는 부산의 거리를 방황하다가 '영화숙'이라는 곳에 끌려갔다. 영화숙은 부산 사하구 장림동에 위치한 부산 최초의 공식 부랑인 집단 수용시설로 폭행과 강제노역 등이 자행됐던 곳이다. 황씨가 영화숙에서 생활한 시기는 총 6년이었다. 그리고 다시 옮겨진 곳은 '재생원'이다. 재생원도 영화숙과 마찬가지로 인권유린이 있었던 부랑인 집단 수용시설이다.
황씨는 "영화숙과 재생원에서 7년을 지냈다. 그곳에서는 제식훈련을 받고 못 할 경우 단체 기합과 폭행이 자행됐다"며 "재생원이 내부적으로 사고가 생겨 폐쇄돼 밖으로 나오게 됐지만 구두닦이를 하면서 어렵게 지냈다"고 했다.
끝이 날 줄 알았던 황씨의 수용시설 생활은 1965년에 서울시립아동보호소로 들어가게 되면서 다시 시작됐다고 한다. 그렇게 황씨는 영화숙·재생원을 거쳐 서울시립아동보호소, 대구희망원, 부산소년의집, 형제육아원(형제복지원) 등을 20대가 될 때까지 수용소 생할을 이어갔다. 해당 수용시설에서의 생활은 제식훈련과 폭력 노동, 인권유린 등으로 얼룩졌다.
황씨는 "(수용시설 생활은) 제식훈련과 노동, 작업, 폭력의 반복이었다"며 "행복하고, 즐거웠던 기억이라고는 영화숙에 있었던 시절 친구들과 땅따먹기와 구슬치기를 했던 것이 전부인 것 같다"고 언급했다.
20대에 수용시설에서는 벗어나게 됐지만 똑바른 일자리를 찾지 못했다. 오랜 기간 여러 수용시설을 전전하던 과정에서 주민등록증을 발급받지 못해 일자리를 구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때문에 공사판 막일이나 머슴살이 등이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일할 때마다 돈을 뜯기거나, 빌려주고도 받지 못하던 일도 수도 없이 많았다고 한다.
황씨는 "주민등록증이 없으니 수모를 당한 일이 너무 많았다"며 "어렵게 경기도 한 시설에 주민등록증이 있다는 걸 알게 됐고 겨우 주민등록증을 받았는데 본적은 서울 동대문구로 돼 있고 성도 강씨로 돼 있고 나이도 10살이나 어린 1962년생으로 돼 있더라"고 토로했다.
어느덧 칠순을 넘긴 황씨의 마지막 희망은 가족을 찾는 것이라고 했다.
황씨는 "부모님 생신 한번 챙겨드리지 못한 게 너무 한이 된다. 동생들을 만나면 서로 껴안고 울고 어떻게 살았는지 안부나 물어보고 싶다"며 "얼굴이라도 보고 이산가족들이 만난 것처럼 울고 싶다"고 심경을 토로했다.
coddy@fnnews.com 예병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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