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이런 체스판을 만든 미국의 의도에 철저하게 끌려다니고 있다는 점이다. 미국이 직접 나서지 않고 나토를 활용한 전쟁 지원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배경도 이런 맥락이다. 결과적으로 나토의 대미 안보 의존도는 더욱 높아졌고, 유럽과 러시아는 돌아올 수 없는 다리를 건넜다. 나토는 미국의 의중과는 무관하게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러시아의 천연가스 등 에너지 의존도를 줄이고 늘 골칫거리였던 러시아의 서진을 원천 봉쇄하겠다는 야심이 더 크다.
나토가 우크라이나까지 진격할 경우 이 지역을 둘러싼 지정학적 충돌이 얼마나 폭발적인지는 미국도 러시아도 사전에 충분히 인지하고 있던 사안이다. 위키리크스가 폭로한 2008년 2월 1일자 모스크바발 비밀전문에 따르면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문제가 장기적으로 미·러 관계의 최대 불안요소이며, 양국을 전형적인 대결 태세로 몰고 갈 수 있다고 우려했다. 우크라이나가 나토에 가입할 경우 나토와 러시아는 국경을 맞대고 있는 초긴장 상황을 초래하게 된다. 2014년 크림반도를 합병한 러시아는 나토를 견제하기 위해 친러시아계 주민이 다수 살고 있는 돈바스 등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을 강제합병하기 위해 군사적 개입에 나설 수밖에 없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시발점이다.
소련이 붕괴되면서 경제가 거덜난 러시아가 생존할 수 있는 길은 충부한 에너지를 유럽에 판매하는 것이다. 그 중심에는 최대 시장인 독일 등이 있지만 우크라 전쟁으로 여의치 않다. 러시아는 안보와 경제적 이유로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 같은 완충지역을 다시 장악해야 하고 가능하면 폴란드, 슬로바키아, 헝가리, 루마니아까지 통제력을 확대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특히 러시아는 유럽이 우려하는 것처럼 팽창하려는 게 아니라 자국을 방어하기 위해 서쪽으로 진출해야 하는 운명에 빠진다. 결국 나토의 동진과 러시아의 서진이 충돌해 벌어진 우크라이나 전쟁은 흑과 백의 싸움이 아닌 철저하게 자국 이익을 중심에 두는 국제정치의 전형적 단면이다.
ktitk@fnnews.com 김태경 정책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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