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조선후기, 백태의(白太醫)이라고 불리는 어의(御醫)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바로 종기치료로 이름을 날린 백광현(白光鉉)이다.
백광현은 젊었을 때 군 복무 중 말에서 떨어져 다리를 다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상처는 아물지 않고 심해지더니 종기처럼 변해서 절름발이가 될 지경이었다. 그는 잠시 귀향을 해서 집에 의원들을 머물게 하면서 치료를 받았다. 그는 침과 뜸으로 종기가 치료되는 것이 신기했고, 어깨 너머로 치료과정을 유심히 관찰하며 마치 자신이 의원이 된 것처럼 침구(鍼灸) 치료에 매료되었다. 다행스럽게 종기는 잘 치료되어 다시 군으로 복귀했다.
백광현은 군에서 주머니에 항상 침통을 가지고 다녔고, 쉬는 시간이면 숫돌에 침을 가는 것이 일이었다. 침은 바늘처럼 보이는 호침(毫鍼)이나 대침(大鍼)도 있었지만, 칼날처럼 보이는 피침(鈹鍼), 3개의 능선이 있는 봉침(鋒鍼)도 있었다. 호침이나 대침은 보통 혈자리에 놓은 침이지만 피침과 봉침은 종기를 치료하는 침이다.
어느 날, 동료 군사들이 침을 갈고 있는 자신을 보더니 “자네는 그 침으로 사람을 찔러 죽일 셈인가?” 혹은 “바로 면전(面前)에서도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작은 침이 100보 밖에서도 보이는 긴 창을 이길 수 있을 것 같은가?” 하면서 놀렸다.
그러자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웃으면서 “언젠가는 자네들이 나에게 목숨을 구해달라고 하는 날이 반드시 올 것이네!”라고 했다.
당시에는 종기 환자가 많았기 때문에 언젠가는 자신이 그들의 종기를 치료할 기회가 생길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그러나 동료 군사들은 종기가 나도 자신을 찾지 않았다.
반면에 군에는 말들이 많았는데, 말들도 종기를 앓았다. 그는 말에 종기가 생겼다고 하면 가장 먼저 달려가서 치료를 했다. 말의 종기를 치료하면서 다양한 경험을 쌓았다. 그래서 동료들은 그를 마의(馬醫)라고 불렀다. 그러던 중 군사들의 종기 또한 동일한 방법으로 시술을 해서 역시 효과를 보는 경우가 많았다. 사실 군대만큼 대담하게 종기 치료를 할 수 있는 곳도 없었다. 환자들은 건장한 청년들이라 종기를 쨀 때 통증도 잘 견뎠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경험을 쌓은 그는 종기 치료에 있어서 도통했고 신묘한 깨달음을 얻었다.
백광현은 시간이 흘러 군 복무를 마치고 마을로 돌아왔다. 그러던 어느 날, 저잣거리에서 절룩거리면서 걷는 사내를 환도에 침을 놓아서 멀쩡하게 걷게 한 적이 있었다. 환도혈은 엉치에 있는 혈자리로 옛 어른들은 해당 부위가 아프면 ‘환도 선다’라고 하기도 한다. 절름발이 사내가 백광현의 침을 맞고서 나았다는 소문이 나자 ‘침으로 앉은뱅이를 살렸다’는 명성이 하루아침에 온 마을을 뒤덮었다. 이후로 그에게 침을 맞으려고 오는 환자들을 태운 수레가 온 마을에 가득했다. 환자들 중에는 특히 종기 환자가 많았다.
백광현의 명성은 궁궐에까지 알려져 현종 때 태의원(太醫院)으로 들어가게 되었다. 그는 궁에서 치종교수(治腫敎授) 역할을 했다. 치종교수란 다른 의원들에게 종기 치료법을 가르쳐 주는 의원을 말한다. 백광현은 다른 의원들과 견해 차이가 있을 시에 자신의 의견이 맞다고 여기면 뜻을 굽히지 않았다.
어느 날은 현종의 목에 종기가 생겨 위중한 상태에서 백광현은 “과감하게 종기를 터뜨려야 합니다.”라는 의견을 냈다.
그러나 다른 어의들은 모두들 꺼려했다. 왕의 목에 칼을 댈 수 없었고, 치료를 시도해서도 만일 실패한다면 목이 달아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백광현의 의견대로 종기는 째서 치료했고, 이를 계기로 현종은 백광현의 실력을 신뢰해 마지아니하였다.
어느 날은 인선왕후(현종의 모)의 발제(髮際, 두부의 머리카락이 시작되는 곳)에 종기가 생겼다. 종기의 뿌리는 매우 크고 하루하루 심해졌다. 식욕까지 떨어지더니 죽조차 넘기지 못할 지경에 이른 것이 수일이 지났다. 현종은 백광현을 불러서 들어가 진찰하기를 명했다.
백광현은 진찰을 마치더니 “침으로 종기를 째서 종근(腫根)을 제거해야 합니다.”라고 했다.
현종은 난감해하더니 자전(慈殿, 왕의 어머니)과 상의를 해보겠다고 했다. 그러더니 다른 의원들을 치료에 나서지도 않고 다른 뾰족한 방법이 없기에 시술을 허락했다.
백광현은 대비궁으로 들어가 궁녀들에게 인선황후의 팔다리를 꽉 잡게 하고는 발버둥치지 못하시도록 했다. 칼을 대서 종기를 째야 하는데, 조금이라도 움직인다면 엉뚱한 새살을 찢게 되기에 인정사정 볼 겨를이 없었다.
“대비마마의 팔다리와 머리가 조금이라도 미동이 있으면 안 될 것이요!!!”라고 호통을 쳤다.
그는 종기침으로 4촌 정도 길이로 내 천(川) 자을 그어서 종기를 터뜨리고자 했다. 4촌이면 거의 13cm정도 되는 길이로 단순한 처치가 아니었다. 그가 종기침을 꺼내 들자 인선왕후는 몸서리치는 듯했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던 현종은 손을 저으면서 만류시키고자 했다.
“그만 멈추도록...” 그러나 백광현은 왕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종기침으로 종기를 찔러 그어 내렸다.
명주천을 입에 문 인선왕후는 신음소리를 냈다. 진노란 농이 뿜어져 나왔고 핏빛으로 바뀔 때까지 종기를 짜냈다. 백광현은 서둘러서 처치를 완료하고서는 차비문(差備門) 밖으로 나와 앉아서 대기했다.
한숨 돌리려는 순간, 왕이 급히 찾는다는 부름을 받고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하고 걱정스러움에 바삐 움직여 성상 앞에 넘어질 듯 엎드렸다.
왕은 “방금 전 자전께서 그대의 종기침을 맞고서 즉시 죽을 드셨다. 수고가 많았다.”라고 치하했다.
백광현은 왕의 용안이 평안한 것을 보고서는 이제야 말을 꺼냈다.
“방금 전 전하께서 치료를 만류하시고자 하셨지만, 저로서는 확신이 있었기에 치료를 그만둘 수 없었습니다.”하고 아뢰고 나왔다.
그러나 백광현은 자신의 집에 귀가해서 가족들에게 “내가 오늘 대비마마의 종기 치료를 하면서 십년감수 했소이다.”라고 했다.
자신도 신(神)이 아닌 이상 두려움이 있었던 것이다. 다행히 인선왕후는 평상시와 같이 완전히 건강을 회복했다.
백광현은 숙종 때에 이르러서도 태의원에 머물렀다. 그런데 어느 날, 숙종의 배꼽 주변에 종기처럼 혹이 하나 생겼다. 배꼽 주위에 경계가 딱딱하고, 색깔은 자흑색으로 매우 짙었으며 그 중심부는 나날이 점차 높이 부풀어 오르면서 홍시 감처럼 말랑거렸다. 조정과 재야에서는 모두 근심과 두려움에 빠졌다. 왕의 병은 나라의 존망과 관련된 문제였고, 치료 여부에 따라서 자신의 생사 또한 달린 막중함 때문이었다.
내의원에서는 매일 모든 의원을 불러 진찰하게 했는데, 모든 의원이 “이것은 종기입니다. 말랑거리는 것을 보면 농이 이미 완성되었으니 내일 쯤이면 종기를 터뜨릴 수 있습니다.”라고 하여 결국 종기를 째는 것으로 의견을 모아지는 듯 했다.
그런데 오로지 백광현만이 “제가 진찰한 견해로는 이는 바로 담수(痰水)이지 농이 아닙니다. 이것은 종기가 아닙니다. 따라서 여기에는 침을 놓으면 안 되고 대제혈(對臍穴)에 뜸을 뜨는 것이 마땅합니다.”하고 아뢰었다.
백광현이 담수라고 한 것을 보면 일종의 물혹으로 판단한 것이다. 대제혈은 배꼽과 대칭이 되는 위치로 척추 중의 척중혈(脊中穴)을 말하는데, 원래 의서에는 없는 혈자리로 백광현이 만든 혈명(穴名)이다. 이것은 마치 등에 오장육부를 치료하는 배수혈(背兪穴)과 같은 혈자리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척추를 자극해서 복부질환을 치료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원리다. 백광현은 여러 의원들과 왕 앞에서 격렬하게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
이에 숙종은 백광현에게 “지금 공의 말대로 대제혈이란 곳에 뜸을 뜨면 어떤 증표가 먼저 나타나는가?”하고 물었다.
백광현은 “대제혈에 뜸을 뜨면 3일 뒤에 반드시 배꼽 오른쪽에 누런 색깔이 나타나고 그렇게 되면 나을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숙종은 “그럼 공의 말대로 하겠다.”라고 했다.
그러자 비슷한 지위에 있는 다른 의원들이 난리가 났다.
이미 왕이 한번 결정한 것이라 왕에게는 차마 말을 못하고 백광현에게 “종기의 농이 밖으로 터져서 흐르면 조치할 방법이 없소이다. 또한 안쪽에서 터져서 복강 안으로 들어간다면 더 큰 화(禍)를 자초하게 됩니다. 그럼 어찌할 것입니까?”라고 걱정을 했다.
그러나 백광현은 “무릇 치종의(治腫醫)라고 하면 종기가 아닌 것도 능히 구별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면서 흔들림이 없이 왕의 등 척추에 뜸 시술을 했다.
드디어 3일째 날이 밝았다. 과연 숙종이 배꼽 오른쪽에 누런 빛깔이 나타나고 자흑색이던 것이 차츰 누런색으로 변하다가 천천히 사라지는 듯했다.
숙종은 자신의 혹이 사라진 것을 보고 “백광현은 과연 신의(神醫)라고 할 만 하다.”하고는 그날 즉시 내의원의 당직을 면제하라고 명했다.
동료 의원들이 “공은 3일 뒤에 반드시 누런색이 생길 줄 어떻게 알았습니까?”라고 묻자, 백광현은 “이는 하늘의 이치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의서에 나와있지 않지만 경험에 의해서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숙종은 건강을 회복한 후에 백광현을 특별히 정헌대부로 승진시켰다. 백광현은 마의(馬醫)에서 시작해서 왕들의 종기를 치료하면서 신의(神醫)라는 찬사까지 얻었다. 의원들은 이 일로 백광현의 의안(醫眼)과 종기 치료기술을 더욱 존중하게 되었다.
** 제목의 ○○는 종기입니다.
■오늘의 본초여담 이야기 출처
< 지사공유사(知事公遺事)> 公, 諱光玹, 字叔微, 系出林川. 早習弓馬之才, 入屬禁旅者, 盖爲家貧親老故也. 偶因墜馬落傷, 轉輾沈重, 將至癃廢. 邀致鄕醫有名者, 留置家中, 以爲療治. 凡其腧穴所注ㆍ鍼炙所施, 心自黙想, 兼解奇方, 於是, 慨然有志於司命之術. 常藏鍼子囊中, 每於射場有暇, 則輒出而磨之. 同射戱之曰: “君將欲殺人耶?” 公笑曰: “若曺他日必求活於我也.” 聞有瘡瘍者, 輒自往治之. 如是積久, 自然神悟. 見病者, 辨症候, 決死生, 一於形聲之間, 而無甚知者. (공의 이름은 광현, 자는 숙미이며, 관향은 임천이다. 어릴 때부터 활쏘기와 말타기 등의 무예를 익혀 도성수비군에 들어갔는데, 이는 가난한 집안과 연로하신 부모님 때문이었다. 우연히 말에서 떨어져 부상을 입었는데 시간이 갈수록 점점 심각해져 장애인이 될 지경이었다. 그래서 유명한 시골 의사를 초청하여 집안에 머물러 치료하게 하였다. 혈이 흘러가는 길과 침뜸의 방법에 대해 마음속으로 묵묵히 생각하여 기기묘묘한 방법을 모두 통달하고는 개연히 생명을 주관하는 의술에 뜻을 두게 되었다. 항상 주머니에 침을 넣고 다녔는데, 군사 훈련에 틈이 날 때 마다 번번이 침을 꺼내서 날카롭게 갈았다. 동료 군인이 “그대는 장차 그 침으로 사람을 죽이려는가?” 놀리면, 공은 웃으며 “그대들이 나중에 반드시 나에게 목숨을 구해달라고 할 것이다.” 하였다. 종기가 난 자가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 즉시 자발적으로 가서 치료해주었다. 이렇게 치료한 경험이 오래 쌓여 저절로 신묘한 깨달음을 얻었다.)
庚午肅宗十六年五月, 上患臍腫, 四畔堅硬, 色甚紫黑, 其中日漸浮高而柔軟, 如柿狀. 朝野莫不憂惶, 以其分野之重也. 藥院日引諸醫入診, 皆曰:“膿已成, 明日可以破腫.” 遂定受鍼之議, 公獨奏曰:“以臣診察, 此乃痰水, 非膿也. 鍼之不可, 宜灸對臍穴.” 仍與諸醫爭辨, 甚力. 上問曰:“灸則先有何驗耶?” 公對曰:“灸對臍穴, 三日後, 必有黃色見於右邊, 自此自愈.” 上用公議, 遂停鍼. 同列皆不信, 爲公危之曰:“膿若外潰或漏, 其將奈何?” 公堅執不動. 至其日, 果有黃色繞於臍右, 向之紫黑, 漸變爲黃, 後仍消散, 一如公言. 崔公有泰, 向公拜曰:“吾乃今以後, 知君吾師也.” 同僚問曰:“公何以知三日後, 必有黃色?” 公答曰:“此, 天也, 非我術也.” 人以是益重公. 平復後, 特陞正憲. 盖對臍穴, 古未嘗有此穴名, 而公自以意創名者也. (경오년. 1690년, 숙종 16년 5월에 성상께서 배꼽에 종기가 생기셨다. 배꼽 주위 네군데의 경계가 딱딱하고, 색깔은 자흑으로 매우 짙었으며, 그 중앙이 나날이 점차 높이 부풀어 오르면서 감의 모양처럼 말랑말랑하였다. 조정에서나 재야에서나 모두 근심과 두려움에 빠졌으니, 분야의 막중함 때문이었다. 약원에서 매일 모든 의원을 불러 진찰하게 했는데, 모든 의원이 “고름이 이미 완성되었으니 내일 종기를 터뜨릴 수 있습니다.” 하여 마침내 침을 놓는 의견을 확정했는데, 공만이 유독 “제가 진찰한 견해로는 이는 바로 담수이지 고름이 아닙니다. 침을 놓으면 안 되고 대제혈에 뜸을 뜨는 것이 마땅합니다.” 아뢰었다. 이에 여러 의원들과 격렬하게 논쟁을 벌이게 되었다. 성상께서 “뜸을 뜨면 어떤 증표가 먼저 나타나는가?” 물으시자, 공이 “대제혈에 뜸을 뜨면 3일 뒤에 반드시 배꼽 오른쪽에 누런 색깔이 나타나고, 이로부터 저절로 나을 것입니다.” 대답하였다. 성상께서 공의 의견을 채택하셔서 마침내 침술 시술을 멈추게 되었다. 같은 지위에 있는 의원들이 모두 신뢰하지 못하고 공에게 위험성을 경고하면서 “고름이 밖으로 터져서 흐르면 조치할 방법이 없습니다.” 했지만, 공은 흔들림 없이 자신의 의견을 견지하였다. 그 날이 되자 과연 배꼽 오른쪽에 누런 빛깔이 나타나고, 일전이 자흑색이던 것이 차츰 누런색으로 변하다가 공의 예견대로 뒤에 사라졌다. 최유태 공이 공에게 절하면서 “내가 이제야 그대가 나의 스승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였다. 동료 의원들이 “공은 3일 뒤에 반드시 누런색이 생길 줄 어떻게 알았습니까?” 묻자, 공이 “이는 하늘의 뜻이지, 나의 기술이 아닙니다.” 대답하였다. 사람들이 이 일로 공을 더욱 존중하였다. 성상께서 평상시의 상태로 돌아오신 뒤에 특별히 정헌대부로 승진시키셨다. 대제혈은 옛날에는 이런 혈의 이름이 없었는데 공이 스스로 뜻을 부여하여 이름을 만든 것이다.
/한동하 한동하한의원 원장
pompom@fnnews.com 정명진 의학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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